제10화 희망은 삶의 힘이다 (4)
순간 누구인지 못 알아볼 뻔했다.
깔끔한 옷차림에 옅은 화장기가 도는 얼굴.
맨얼굴에 환자복을 입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수척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건강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몸이 아무리 좋아져도 마음이 아프면 환자들은 퇴원을 할 때나, 혹은 그 이후에도 자신을 꾸밀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에 해당되는 일은 아닐 테지만 경험적으로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더구나 이임순은 경우가 달랐다. 누구보다도 힘들고, 괴로울 사람이 화장을 했다. 진심으로 환영할 일이었다.
“선생님, 내과 병동에 입원했던 이임순 환자라고…….”
“아! 그 환자구나. 빨리 가 봐, 빨리. 지훈아, 치프야, 잘했다. 잘했어. 기운 좀 주고 와. 건강하시라고 전해 주고.”
이준영 교수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이임순 환자에게 다가갔다. 보호자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환자분, 퇴원 축하드립니다. 빨리 가시지, 여기는 왜 오셨어요?”
“그간 너무 고마웠습니다. 우리 딸이 이렇게 건강하게 퇴원하게 된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환자분이 힘을 내신 덕분이죠.”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는지 보호자가 김지훈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보였다. 이임순이 입을 꼭 다문 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기분 좋은 날이다. 이런 날은 눈물보다 웃음을 보여야 하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긴 했다. 그래도 웃으며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김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어머니, 환자분, 퇴원하는 날인데 왜 그러세요.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주간의 짧은 인연은 이것으로 끝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어서 타세요. 항상 건강하시고, 웃으셔야 합니다.”
이임순이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솟구치는지 눈가가 벌게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가장 많은 신경을 써 준 의사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음으로 다가왔다. 김지훈이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절망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입안에서 감돌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입을 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잡은 채 웃고 있는 김지훈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이임순이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마… 흑!”
입을 여는 순간 꾹꾹 눌려 있던 온갖 감정이 이임순의 가슴을 헤집었다. 서럽고도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이임순이 김지훈의 팔을 잡고 엉엉 울었다.
당황한 보호자가 이임순을 꼭 안아 주었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위로의 말은 천 마디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임순의 서러움과 두려움이 울음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참 만에야 이임순이 울음을 그쳤다.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며 어렵사리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보냈다.
‘힘내세요. 건강하세요.’
이것이 마지막 인사겠지만, 어쩐지 고맙다는 말 그 이상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치프야, 지훈아, 잘했다. 잘했어. 얼마나 아프고 힘들겠니. 이럴 땐 그냥 말없이 들어 주는 게 좋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어떻게 알겠니. 잘했다. 잘했어.”
가슴이 먹먹하기만 한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아까 환자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그렇구나.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환자가 곧 입원할 예정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랬구나. 에이! 나이 들면 정신을 더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쯧! 대장암 환자야. 대장암. 오늘 오후에 입원하고, 다음 주 수요일에 수술할 거니까 준비 철저히 해라. 철저히.”
순간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항상 들었던 말이었다. 엉뚱한 기대는 접고 수술 준비에만 여념할 일이었다.
게다가 대장암 수술은 수술 전에 최대한 장을 비워야 한다. 다른 준비들까지 고려하면 최소 3일은 잡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래그래.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근데 치프야, 지훈아, 너 대장 잘라 봤나? 잘라 봤지? 그치?”
“예. 응급 수술로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응급이나 정규나 그게 그거지, 뭐 다른 거 있니? 준비하자. 철저히 준비하자. 대장이 재밌다. 이번 수술 하고 대장 하자, 대장. 지훈아, 치프야, 좋지? 그치?”
이번 수술 하고 대장을 하자?
김지훈이 놀란 눈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수술을 주신다는 말씀인가? 맞지?’
“왜 대답이 없어? 대답이? 너 수술하기 싫으니?”
확실하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천장을 뚫었다.
“아닙니다!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깜짝 놀라며 귀를 후볐다.
“나 아직 잘 들린다. 살살 말해도 다 들려. 지훈아, 살살 말해. 좋다. 좋아. 대장 하자, 대장. 간다.”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워워워! 대장암이다.’
아무도 없었으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기쁨도 잠시, 초조함이 엄습했다.
일과가 끝날 때까지 환자가 입원을 하지 않았다. 이경석과 똑같은 경우를 당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장암 수술을 대비한 이론 준비를 하려도 해도 손에 책이 잡히질 않았다.
‘위치마다 유의해야 할 점이 다 다른데,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지? 아! 해부학! 랜드마크라는 표현까지 하시는데, 해부학적 구조도 제대로 모르면 송재덕 선생님에게 최초로 탄 전공의가 될지도 몰라.’
방향은 잡았는데 집중이 되질 않았다. 눈과 귀가 온통 전화기로 쏠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기가 쉬지 않고 울려 댔지만 대장암 환자가 입원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후 5시가 넘어선 것을 보고는 거의 포기할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대장암 환자 입원했습니다.”
박순용의 말에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만세를 외칠 뻔했다.
곧바로 환자를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진찰과 병력 청취를 했다. 외래 차트와 검사 결과도 신중하게 확인했다.
59세 남자 환자, 홍선호.
에스 결장암(Sigmoid Colon Cancer).
1기 암(Stage I).
암 수술치고 쉬운 수술은 없지만, 대장암 중에서는 그나마 수술하기 수월한 부위였다. 손가락을 튕긴 김지훈이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로 올라가 책을 펼쳤다.
해부학부터 시작해 대장암의 병리를 비롯해 수술 방법까지 차근차근 검토를 했다.
한참 몰두했을 무렵, 신현수가 들어왔다.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현수야, 무슨 일 있어?”
“응? 응. 그런 일이 있네. 오늘 오전에 위궤양인데 약에 반응을 안 하는 데다 사이즈가 상당히 커서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환자를 보고 왔어. 이혁민 선생님이 금요일에 수술한다고 나보고 준비하라네.”
“뭐? 그럼 수술 받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보여.”
“야! 축하한다. 근데 말이야. 나도 받을지 몰라.”
신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장암이다.
순간 가슴이 턱 막혔지만, 위궤양 환자라고 해도 절제술이 필요한 환자였다. 수술 자체로만 보면 난이도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대장암 환자가 있는 모양이네? 언제 하신대?”
“수요일로 예정돼 있어.”
신현수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가 수술을 먼저 받으면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지겠지?’
김지훈은 대장암이고 자신은 위궤양이라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윈윈(Win-Win)이다.
“먼저 수술을 하네. 꼭 받아라. 그래야 나도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경석이 형도 또 기회를 얻을 거 아냐.”
이젠 어느 구석에서도 예전의 신현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두 손을 활짝 폈다. 신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해? 하이파이브 몰라?”
“애들이냐?”
한마디 툭 던진 신현수가 책상에 앉아 주섬주섬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예전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아니면 김지훈이 정말 애들 같든지.
주말 당직은 김지훈이고, 신현수는 백(Back)당직이었다. 실전은 김지훈, 이론은 신현수라는 선입견을 떠올리면 우연치고는 아주 적절한 근무였다.
응급 수술에 들어간 김지훈이 눈에 불을 켰다.
대장암 수술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술이라도 집중해서 봐야 했다. 평소 그렇게 친하지 않은 임동완 교수마저 너무도 열성적인 모습에 의아해할 지경이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요즘 과장님 때문에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기분은 좋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 외과 센터가 만들어지면 인사이동이 불가피할 텐데, 그 자리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지?’
“수고하셨습니다.”
목소리까지 활기찼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다. 임동완 교수가 고개를 흔들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 시간, 신현수는 이론의 강자답게 책상 앞에 앉아 코를 박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는 단순히 수술 방법만을 물어볼 사람이 아니었다. 위절제술은 99퍼센트 위암에서 시행하기 때문에 범위를 위암까지 넓혀야 했다. 그 탓에 분량이 많아진 데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식사 시간마저 지나칠 정도였다.
‘이 자식이 밥도 안 먹고 준비를 해? 무서운 놈.’
수술 방에서 막 올라온 김지훈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팔을 비볐다. 소름이 돋은 것이다.
힐끗 신현수를 째려보고는 김지훈도 이내 심각한 얼굴로 책에 집중했다.
사라락!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주말이 가고, 일요일 오후가 돼서야 준비 자료들이 모두 작성됐다. 이경석이 아직 복귀하지 않았지만 일단 점검부터 하기로 했다.
발표가 이어졌다. 눈가에 주름까지 만들어 가며 부족한 부분, 혹은 의문이 가는 부분들을 서로 질문하고 보완했다. 서로가 내심 감탄이 나올 정도로 충실했던 준비가 더더욱 풍성해졌다.
‘역시 이론의 최강자 신현수답다. 대단해.’
‘후우! 점점 빠르게 달려가네. 아차하면 순식간에 멀어질 수도 있겠어. 긴장하자.’
신현수가 발표한 내용과 지적을 생각하며 고심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찡그렸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환자 복부 CT를 가져왔다.
‘암으로부터 상방 15센티미터 이상, 하방은 5센티미터 이상 제거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래쪽으로는 직장에서 불과 1~2센티미터밖에 여유가 안 남네.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범위긴 한데.’
김지훈이 턱을 비비며 좀처럼 복부 CT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갸웃거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야! 어렵네.”
“넌 상행 결장도 절제해 봤잖아. 그거에 비하면 에스 결장이야 소장 자르는 것하고 다를 게 거의 없는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
“그렇긴 한데, 어떻게 자르고 이어 주지?”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한두 번 장을 절제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대장암이기에 초기라고 해도 주변 조직, 특히 임파선 절제에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수술 중 유의해야 점들을 빼고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송재덕 교수도 그런 이유로 김지훈에게 줄 첫 번째 정규 수술 케이스로 삼았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고민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오프에서 돌아온 이경석이 깜짝 놀라며 과한 반응을 보였지만 김지훈은 무덤덤할 뿐이었다. 도리어 신현수가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김지훈, 난리를 쳐도 모자랄 놈이 왜 이렇게 심각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에요, 형.”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한 김지훈이 다시 차트와 검사 결과들을 찬찬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부 CT는 물론 대장 조영 필름들까지 일일이 걸어 가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몇 번 말을 걸던 이경석이 고개를 저으며 신현수와 함께 위절제술에 대해 다시 토론을 했다. 어인 일인지 내켜 하지 않는 김지훈을 닦달해 대장암 준비 자료를 보며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이경석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자식들은 뭐야?’
“역시 김지훈, 신현수다. 나도 이렇게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에이! 순서가 뒤바뀌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날 밤, 치프 3명이 모두 뒤척였다.
한 명은 아쉬움과 후회로, 또 다른 한 명은 기대감과 김지훈이 준비한 내용 때문에, 남은 한 명은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한 고민으로 말이다.
***
새로운 주가 밝았다.
아침부터 대장암 환자 홍선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대장암 수술을 하기도 전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은 미음이고, 내일 아침부터는 금식을 해야 한다. 게다가 눈앞에 놓인 4리터짜리 하제(설사 유발제)를 이틀 동안 6시간 간격으로 다 마셔야 한다.
가뜩이나 밥맛을 잃어 금식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하제는 양도 양인 데다 구역질까지 유발했다.
오늘 아침 한 모금 마시고는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저걸 꼭 다 마셔야 합니까? 이러다 수술 전에 진이 다 빠질 것 같습니다. 반만 마시면 안 될까요?”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만 다른 환자보다 유달리 민감했다. 또한 환자는 물론 보호자들까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나머지는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김지훈이 어제저녁에 설명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말했다.
“대장은 말 그대로 대변을 만들고, 저장하는 장깁니다. 만일 수술 전에 장을 깨끗하게 비워 놓지 않으면 남아 있던 변이 수술할 부위에 묻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수술한 부위가 샐 수도 있어요. 재수술을 하고 싶지는 않으시죠? 힘드시더라도 다 마셔야 합니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어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알고는 있는데, 그냥 속도 상하고 짜증이 나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초기 암이라 수술 잘 받으시고, 항암 치료 하시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이러저런 말들이 오고 갔다. 회진 전이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시간을 냈다. 직접 수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이 더욱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송재덕 교수와 회진을 돌았다.
“환자분, 우리 김지훈 선생한테 설명 잘 들으셨죠? 궁금한 게 더 있으면 김지훈 선생에게 물어보세요.”
다른 때와는 달랐다. 평소 환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마다하지 않았던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을 유독 강조하며 특별한 말없이 회진을 끝냈다.
환자와의 라뽀(Rapport), 즉 신뢰 관계를 확실하게 만들라는 의도일 것이다.
수술을 받는다는 것이 점점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김지훈의 얼굴이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어제부터 시작된 고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훈아, 치프야, 무슨 일 있니? 너 얼굴이 갑자기 왜 그래? 좋다고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더니 수술하기 싫어?”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 즐겁게 수술하자. 그동안 잘해 왔지만 이번 환자에게는 더 큰 신뢰를 얻어야 된다. 그게 중요하다. 중요해. 치프야, 지훈아, 오늘 오후에 발표하자. 좋다. 좋아.”
좋아 입이 찢어졌어야 할 김지훈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가 조금은 의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진을 끝냈다.
‘도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러지? 무슨 일이 있나?’
다행히 오전 수술이 벌어지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번쩍여 마음을 놓긴 했다.
모든 수술이 끝나고 치프들이 모두 모이자, 송재덕 교수가 귀신처럼 딱 맞춰 의국으로 올라왔다.
“시간이 늦었다. 빨리 발표하자. 배고프다. 배고파.”
김지훈이 재빨리 복사물을 자리에 놓고는 발표를 시작했다. 환자의 기본적인 정보부터 시작해 대장의 해부학 및 수술 방법까지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아. 이렇게 단단하게 준비하고, 평소처럼 수술하면 잘되게 돼 있다. 잘했다. 잘했어. 지훈아, 치프야, 대장 하자, 대장.”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순간 콧등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고민한 일을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래그래. 말해 봐. 뭔데?”
김지훈이 조용히 또 다른 한 장의 복사물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