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희망은 삶의 힘이다 (3)
자신도 모르게 손등에 묻은 눈물을 빨리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머릿속으로는 안전하다고 외쳐도 본능적인 두려움은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후!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들지? 환자가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손등에 떨어진 눈물이 흘러넘쳐 바닥에 떨어졌다.
벌겋게 변한 눈가를 훔치던 보호자가 깜짝 놀라며 김지훈의 손등을 맨손으로 마구 닦았다.
“에이구! 이걸 어째. 죄송해요. 임순아, 그만 울어. 선생님 손에 눈물 떨어져.”
까닭 모를 슬픔에 젖었던 이임순이 흠칫 놀라며 김지훈을 보았다. 우종철 교수에게 눈물은 전염원이 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에 불과했다.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눈앞에 에이즈 환자가 있다면 이임순 자신도 손끝 하나 접촉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은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만 의사이기에 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미안함과 함께 밀려온 묘한 감정에 이임순이 입을 열지 못했다.
‘에휴! 내가 더 미안하네.’
김지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운에 손등을 쓱쓱 비볐다. 내친김이었다. 정말 어렵게 병실 밖까지 나왔는데, 얼굴만 비치고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왕 나왔는데 복도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가죠.”
수액이 매달린 폴(Pole)대를 잡은 김지훈이 이임순에게 고갯짓을 했다. 보호자도 손을 꼭 잡으며 슬며시 재촉을 했다.
한참을 주저하던 이임순이 느릿느릿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드르륵! 드르륵!
폴대 끌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스테이션이 보였다. 깜짝 놀란 간호사들이 우르르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환자분, 드디어 걸으시는 거예요?”
“잘하셨어요. 환자분, 파이팅!”
이임순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본 얼굴들이었다. 매일 수액을 갈고, 몇 시간마다 와 혈압과 열을 쟀다. 검사가 필요할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혈관을 찾아 피까지 뽑았다.
간호사들은 자신과의 접촉이 두렵지 않았을까?
자신보다 더 무섭고 불안한 사람은 없겠지만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기는커녕 다정한 말을 건네며 항상 웃어 주었다.
이제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는지 알 것 같았다.
전염이 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였다.
문득 우종철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양성 판정을 받은 분이 아직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점점 더 효과가 있는 치료제들이 개발되고 있으니까, 스스로 몸 관리만 잘하면 절대 발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장담해요. 우리 서로를 믿고 열심히 치료해 나갑시다.’
칙칙하게 느껴졌던 병원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차갑기만 한 형광등 불빛이 오늘따라 따스하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함께 걷고 있는 김지훈이라는 의사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정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이임순의 눈 속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김지훈도 힐끗 이임순을 보며 묘한 감상에 젖었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환자와 복도를 거닌 적이 있었다.
인턴 시절, 꼼짝도 하지 않았던 할머니 환자가 생각났다. 어르고 구슬려 움직이게 하고는 약속대로 할머니를 업고 복도 한 바퀴를 돌았다. 얼굴이 화끈거릴 일이었지만 정말 보람되고 즐거웠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가오는 감정마저 똑같았다.
환자가 좋아질 것이란 희망.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희망이라는 두 글자였는지도 몰랐다. 이임순도 희망을 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느 틈엔가 스테이션을 지나쳤다. 이임순의 걸음에서 자그마한 힘이 느껴졌다. 이젠 다른 환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이제는 환자 스스로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환자분, 수술 들어가야 해서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병실까지 잘 들어가시고, 한 시간 정도 후에 한 번 더 운동하세요. 약속한 겁니다.”
부리나케 수술 방으로 향했다.
사실 아직은 여유가 있었지만 함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서는 것이 이임순에게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
휙! 스테이션을 지나치는 순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르륵 선생님, 대단하세요.”
친근함의 표현일 테지만 김지훈이 짐짓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허! 치프보고 따르륵이 뭡니까? 김명순 간호사, 나 화나면 무서우니까 조심해요.”
“어머! 제 이름을 알고 계셨네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얼굴을 본 게 몇 번인데 모를까?
하긴 전공의나 간호사들의 경우 서로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경우도 있긴 했다. 얼마 전까지 시행했던 순환 근무의 단점이자 정말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지만, 사실 너무한 일이었다.
힘들수록 서로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힘이 되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자,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날 밤, 이경석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오늘 일진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시작은 수술 방이었다.
예상한 대로 이준영 교수가 담낭 절제술과 T-tube 삽입술 및 환자에 대해 질문을 했다. 밤늦도록 준비했기에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몇 마디 질문에 혀가 꼬였고, 돌아온 것은 불덩이였다.
식은땀이 나도록 탔다.
“이경석, 정규 수술을 받을 환자야. 치프가 돼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이따위로 준비해 놓고 메스를 잡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일 분이 한 시간 같았다. 정말 이러다 한 줌 재로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수술 사이 시간이 나는 대로 부족한 부분을 찾아 준비했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혼이 난 탓인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오후 회진을 돌 때까지도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풀리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이임순 환자가 제대로 도와줬다.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복도에서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본 이준영 교수가 그 보기 힘들다는 전설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 덕에 상당히 오랜 시간 회진을 돌아야 했다.
한 번 입이 열리자 이임순은 그간 궁금해했던 것을 모두 알고 싶다는 듯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냈다. 이준영 교수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을 했다.
‘아이고! 다행이다. 분위기 좀 나아지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분위기가 급격히 좋아졌다.
그런데 막 내일 수술할 환자 병실에 들어서려는 순간 공정식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들려온 말에 귀를 의심해야 했다.
수술 취소!
이미 과를 옮기고 수술 스케줄까지 낸 마당이었다. 병실이 나는 대로 외과 병동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환자가 갑자기 집 근처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합니다. 지방이 집이라서 보호자들이 간병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선생님들께서 모두 수술 중이라 제게 먼저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래? 알았다.”
환자와 보호자를 만났다.
공정식의 말대로였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아쉬웠지만 수술은 의사만의 결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퇴원 오더를 낼 때는 목아 콱 막혀 왔다.
Discharge(퇴원).
이렇게 가슴 아픈 오더는 이경석에게 처음이었다.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아 일과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수술을 위해 준비한 자료는 보기도 싫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런데 김지훈과 신현수가 속도 모르고 대뜸 자리를 잡고는 눈을 반짝이며 복사물을 읽기 시작했다.
“지훈아,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이거 내일 수술할 환자 준비물 아니에요?”
“맞아.”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혹시 형답지 않게 긴장하시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복사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신현수를 보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현수야, 여기 내용이 좀 빠지지 않았어?”
“그런 것 같은데. 경석이 형, 총수담관에 T-tube 넣고 마무리할 때 방법이 정확하지가 않네요.”
“맞아요, 형. 이 부분 잘못 처리하면 틈이 생겨서 담즙이 샐 텐데, 확실하게 숙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글로 정리하는 것이 정확하게 기억날 텐데요.”
‘도대체 이 자식들은 뭐야? 수술을 받은 놈은 난데, 나보다 더 자세하게 준비를 했네.’
이경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한 놈은 당직이라 응급실을 오갔고, 다른 놈은 오프였다. 그 와중에 준비를 한 것도 모자라 이준영 교수가 지적한 부분까지 집어내고 있었다.
“무서운 놈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형, 빨리 발표하시죠. 나 오늘 오프라 나가 봐야 돼요.”
김지훈의 말에 이경석이 피식 웃고 말았다.
“수술 취소됐다. 환자가 집 근처로 가서 수술한단다. 마음 놓고 오프 가라.”
“예? 정말이에요?”
“그럼 이걸 농담이라고 하겠어? 에휴! 차라리 말이라도 안 나왔으면 아쉽지나 않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은 또 아니다. 수술 하나에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니고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경석이 얼마나 아쉬워하는지는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힘차게 손뼉을 쳤다.
“형, 아쉽기는 하지만 케이스가 어디 한두 개예요? 금방 또 받을 겁니다. 아예 준다는 말도 못 들은 우리보다 훨씬 낫죠. 얼굴 피시고, 이왕 준비한 거 공부나 하죠. 다음에는 정말 확실하게 할 수 있잖아요.”
“그래요, 형. 어쨌든 형이 제일 빨리 가고 있어요.”
신현수에게서는 듣기 어려운 말까지 들었다. 이경석이 입맛을 다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회가 한 번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마냥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의 말대로 지금 확실하게 준비한다면 다음번에는 절대 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확실하게 수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표가 시작됐고, 이내 토론이 이어졌다.
별일이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내용이 무시무시했다. 이준영 교수가 지적한 부분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거론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가 찬지 이경석이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현수야, T-tube를 박기 전에 조직 손상 없이 췌장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차피 총수담관 바로 밑에 췌장이 있는데, 겸사겸사 확인하는 것도 의의가 있잖아.”
“위험해. 주변 조직에는 손상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췌장은 노출되는 것 자체로 손상을 주는 게 아닐까? 나 같으면 절대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아. 경석이 형,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나야 당연히 현수 네 말에 동의하지. 안전한 게 최고다. 그러다 출혈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토론에 빠져들었다.
응급실에서 콜이 오고 나서야 허겁지겁 정리를 했다.
신현수는 응급실로 내려가고, 오프인 김지훈은 잠깐 바람을 쐰다며 함께 일어섰다.
홀로 남아 한참 생각에 잠겼던 이경석이 피식 웃고 말았다.
‘수술이 취소된 게 잘된 일이었네. 오프에 당직이었던 놈들이 이 정돈데, 난 준비한 것도 아니었어. 좋아. 다신 허술하게 준비 안 한다. 이준영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확실하게 준비하자.’
이경석이 눈빛을 굳히며 불끈 쥔 주먹을 힘차게 흔들었다. 다소 느슨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가장 뛰어나다는 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과 신현수의 눈빛이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이경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정규 수술을 먼저 받고 싶었다.
오늘 토론을 하며 서로에게 다시 한 번 놀랐다.
‘오프인 자식이 나보다 더 자세하게 준비를 했단 말이지. 좋았어. 우리 후끈하게 한번 달아올라 보자.’
‘어제 당직이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언제 준비를 했지? 어쩐지 아침에 유난스럽게 눈이 벌겋다 했어. 집중해야 해. 김지훈을 앞서려면 그 수밖에 없어.’
빠지직!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불똥이 튀었다.
“현수야, 너 눈이 왜 그러냐?”
“내가? 오프 간다면서 너야말로 표정이 왜 그래?”
“나? 난 그냥 평소와 똑같은데.”
“나도 그래. 오프 잘 갔다 와라.”
“그래. 수고해.”
친구 간에, 혹은 동기 간에 흔하게 하는 말이 오고 갔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 치프가 된 이후 조금씩 늘어난 잠을 모두 반납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모두가 같은 주에 수술을 받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경쟁을 떠나 첫 번째로 정규 수술을 받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실력과 신뢰를 받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시작이다.
***
김지훈이 오래간만에 고경아와 함께 이모네 포장마차를 찾았다. 주인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면서도 서운해했다.
“어머머! 김지훈 선생님, 얼굴 잊어 먹겠어요.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그렇게 바빴어?”
“미안해요, 이모.”
“한가한 것보다 바쁜 게 좋지. 소주하고 골뱅이?”
“아니요. 맥주 한 병만 주세요.”
고경아는 물론 주인아주머니까지 깜짝 놀랐다.
“당분간 소주는 입에 못 댈 것 같아요.”
고경아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데이트 때도 모자라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도 술자리를 이어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지훈이 정말 맥주 한 병으로 끝냈다. 그것도 셋이 나눠 마셨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고경아가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김지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늘따라 감명 깊네.’
고경아의 입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달디달았다.
***
피 튀기는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서도훈과 박순용이 의아해하다 못해 엉뚱한 질문을 할 정도였다.
“선생님, 선생님들끼리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요새 은근히 살벌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김지훈이 웃기만 했다. 기분 좋게 말이다.
이임순도 하루가 다르게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배 속의 심지를 빼고 고름이 잡혔던 상처도 모두 아물었다. 다행히 우종철 교수도 내과적인 문제로는 입원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퇴원이 결정됐다.
토요일 아침, 이준영 교수가 마지막으로 이임순 환자를 보았다. 모든 환자들을 똑같이 대해야 하지만, 의사들도 사람인지라 유난히 마음이 가는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임순이 그런 모양이었다. 한동안 주의할 사항들을 얘기하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럼 퇴원 잘하시고, 항상 몸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실 줄로 믿겠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이준영 교수가 돌아서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도 못 보고 퇴원하면 지훈이가 많이 서운해할 텐데. 어쨌든 경석이도 열심히 환자를 봤지만 네 덕이 정말 컸다. 어려운 환자였는데 고맙다.’
그렇게 또 한 명의 환자가 퇴원을 했다.
김지훈이 오전 회진과 주말 집담회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내과 병동을 달려갔다. 이임순이 퇴원을 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었다.
이미 퇴원을 한 후였다.
‘축하합니다, 환자분. 건강하세요.’
아쉽고, 은근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임순 역시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서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환자의 마음이었다.
터덜터덜 병동으로 돌아가자 무슨 일인지 송재덕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없어. 없어. 그냥 심심해서 올라왔다. 치프야, 지훈아, 다음 주에 말이야. 내가 외래에서 잡은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가 곧 입원을.”
갑자기 말이 뚝 끊어졌다. 송재덕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지훈아, 치프야, 저 사람 누구니? 누구야?”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하얀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