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아! 여러모로 초조하다 (2)
고경아가 호들갑을 떨며 반색을 했다.
“형부!”
“어! 처제! 잘 지냈지?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옛날에는 잘만 놀러 오더니 요샌 찾아오지도 않고 서운해.”
“형부가 시간을 내주셔야죠.”
“그런가?”
손윗동서가 될 사람이자 검사인 고경순의 남편이다.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에 검은색 뿔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였다.
김지훈이 바짝 긴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김지훈입니다.”
“응. 와이프한테 말은 들었어. 나 서정호야. 반가워. 아버님 오시기 전에 호구조사부터 하자.”
약간은 무미건조한 말투다.
“예? 조사요?”
“아! 미안. 이런 말이 입에 붙어서 말이야. 자네 고향, 출신 학교, 학번, 현재 소속까지 짧고 간단명료하게 말해 봐.”
직업이 검사이기 때문일까? 아랫동서가 될 사람에게 할 인사말이 아니었다. 기분이 뭔가 묘한데, 고경아는 걱정 말라는 눈짓을 하며 웃고만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서정호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똑똑한 사람이 왜 이래? 시간 없으니까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짧고 간단하게 핵심만 얘기하자.”
“우리 형부 말투가 가끔 저런 때가 있어요. 금방 사라질 거예요. 속은 완전히 딴판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고경아의 귓속말에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리며 최대한 간략하게 신상 명세를 밝혔다.
한동안 가족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질문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대답을 할 때마다 서정호의 눈이 번쩍였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우리 처제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아버님보다 날 먼저 봐야 할 거야. 알았어?”
은근히 등짝이 서늘해졌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합격.”
고경아는 환하게 웃고, 김지훈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경아 씨 형부가 아니라 거의 친오빠네. 잘못하면 정말 불려 가는 거 아냐? 아후! 왜 이렇게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올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장인, 장모에 정훈철 부부까지 보였다.
김지훈과 서정호가 일어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오셨습니까?”
서정호의 말투에 친근함이 뚝뚝 묻어났다.
“응. 벌써 다들 와 있었네. 서 서방, 잘 지냈지? 이럴 때만 얼굴 보이고 사람이 왜 그래? 김 서방, 오늘은 머리 감고 왔네. 장모하고 다른 손님들 계셔서 그런가?”
김지훈이 멋쩍게 웃었다. 서정호가 큰사위답게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아버님, 앉으시죠. 어머님, 제가 요새 좀 바빠서 죄송합니다. 정 PD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어라? 둘이 아는 사이?
“저야말로 서 검사님과 지훈이가 동서 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단 아버님, 어머님께 먼저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정훈철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수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예전에 우리 김 서방과 경아가 말을 한 적이 있어서 성함은 들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듣던 대로 아주 미인이십니다. 그런데 정 PD님은 우리 큰사위를 어떻게 아십니까?”
정훈철과 서정호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서정호는 이제 30대 중반으로 40대인 정훈절과는 제법 나이 차가 나는데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보아서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서 검사님이 검사 되시고 얼마 안 돼서 몇 번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워낙 인상이 강해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서 검사님도 절 기억하시더군요. 정말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버님.”
“참 세상 좁아요. 인연이라는 것도 묘하고 말이에요. 반갑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다들 자리에 앉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음식이 준비되기도 전에 고성문이 서정호에게 슬쩍 물었다. 최문옥도 궁금한 얼굴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어때?”
“잘 고르셨습니다. 눈빛이 선하고 흔들리질 않는 걸 봐서 최소한 처제 눈에서 눈물 나게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확실해?”
“아버님, 저 검사 밥 먹은 지 꽤 됐습니다. 세상에 나쁜 놈들 눈빛은 거의 다 파악했어요. 이젠 몇 마디만 나누면 답이 딱 나옵니다. 확실합니다.”
“말은. 자네, 검사야, 점쟁이야?”
“검삽니다. 아버님, 한잔하시죠.”
삼겹살이 익어 가고, 가볍게 술 한 잔을 곁들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술잔이 오고 갈 만도 한데, 서정호는 물론 정훈철까지 더 이상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덩달아 김지훈도 술잔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이거 뭐지? 형님도 술을 거의 못하시나? 훈철이 형은 또 왜 저러셔.’
그래도 즐거운 자리다. 서서히 어색했던 기분이 사라지며 분위기가 슬슬 뜨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이 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최문옥과 한수임, 그리고 고경아의 목소리가 점점 늘어날 때쯤 뒤늦게 고경순이 도착했다.
그때 마치 고경순이 오기를 기다고 있었던 것처럼 서정호가 고성문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 정 PD님과 동서하고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뭐?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젊은 놈들끼리 뭐하려고 니들끼리만 나가? 나도 남자야.”
“제 업무 때문에 술 먹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아버님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에잉! 일은 직장에서만 해야지, 이런 자리까지 끌고 와?”
꾸벅 인사를 한 서정호가 눈짓을 하며 따로 자리를 잡았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훈철과 함께 뒤를 따랐다.
서정호의 눈빛과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했다. 정훈철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꽤나 의아한 얼굴이었다.
“정 PD님, 지금은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은 아무리 사소해 보인다고 해도 절대 비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동서, 자네도 마찬가지야.”
말투가 다시 무미건조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진평호 때문입니다.”
“진평호 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훈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습니다. 제가 병아리 시절 때 힘이 없어 놓쳤던 고기를 다시 잡아 볼 생각입니다. 그때처럼 절 다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정권 말기 아닙니까? 윗선과도 어느 정도 얘기가 된 상태입니다. 이번에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검찰의 일인 데다 정권 말기라는 말까지 나왔다. 더구나 서정호와는 첫 대면을 하는 자리였다. 일개 전공의인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말 같았다.
굳이 관련이 있다면 진평호가 병원 재단 이사라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말만 들었을 뿐, 진평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어도 몰라볼 사람의 일에 왜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거물이 분명한데 말이다.
서정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물어볼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네도 불렀지만, 지금 오고 간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마. 진상미 알지?”
“진상미 환자요?”
“그래. 자네를 상당히 믿었다고 하던데, 입원했을 때 특별히 들은 말이 있거나 이상한 행동은 없었어? 정황을 보니까 정신병으로 몰렸을 수도 있는 것 같던데, 그럼 진평호나 주변 사람들에게 일종의 원한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겠어? 그러다 보면 어디선가 말이 새기 마련이거든.”
의료 기록은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정보였다. 더구나 진상미가 한 말들도 지극히 사적인 일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동서, 나 검사야. 그 정도는 눈 감고도 알아야 해. 다른 질문 하지 말고 묻는 말에만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말해 봐.”
무미건조한 말투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진상미의 질병에 관한 것만 빼고 생각나는 것은 모두 말했다. 대부분 진상미의 하소연이었지만, 서정호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그만 단서라도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단 말이지. 알았어. 혹시 진상미가 자넬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그럴 수 있지?”
“제게요? 그럴 일이 있나요?”
“세상일은 누구도 몰라. 진상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오직 진상미만이 알지 않겠어? 하여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진상미가 찾아오면 이 번호로 전화해. 그럼 자네는 이제 아버님께 가 봐. 정 PD님과 조금만 더 얘기하고 건너갈게.”
“예, 형님.”
“아! 자네 과 과장이 금경태지? 그 사람하고는 어때?”
서정호의 표정이 묘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과장과 전공의라는 관계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지 묻는 거야. 의사들도 그렇게 서로 엮이지 않나? 세상이 다 그렇잖아.”
“특별한 일은 없는데, 왜 그러세요?”
“다행이네. 앞으로도 그 사람하고는 절대 엮이지 마. 동서에게 좋을 일이 없어. 가 봐.”
검사라서 그런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말투가 단호했다.
자리로 돌아가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단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그러면 현수한테도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근데 금경태 과장과 엮이지 말라는 소리는 또 뭐야? 설마 검찰에서 조사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거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희미하게 들려온 서정호의 목소리에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연줄을 만드는 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금경태 과장은 진평호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자리를 빌려 정 PD님을 만나 뵙고자 한 이유는…….”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입맛을 다시며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폭탄을 맞았다. 처갓집 최고 고수인 고경순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미 원주에서 경험한 일이었다.
“제부, 경아만 놔두고 자리 비웠으니까 석 잔 마셔야 하는 거 알죠? 아니면 경아 줄까요?”
고경순의 피는 최문옥의 피인 모양이었다. 내리 석 잔을 받은 후, 장모의 잔을 또 받았다.
고경아가 손사래를 치며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동생은 언니를 이기지 못했고, 김지훈은 당연히 장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다행히 남은 삼겹살은 충분했다. 얼른 알싸한 식도와 위를 기름기로 달랬다.
잠시 후, 서정호와 정훈철도 폭탄을 맞았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풍부한지 서정호는 달랐다.
“여보, 석 잔 마셔야지? 자! 따르시고. 장모님도 한 잔 주실 거죠?”
무미건조한 말투가 다시 사라지며 아예 타령조로 자청을 했다. 지금은 검사가 아니라 큰사위였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을 실천하는 중인지도 몰랐다.
정훈철도 한수임에게 세 잔의 술을 받았다. 고경순의 가공할 친화력과 거부할 수 없는 힘은 한수임의 얼굴까지 벌겋게 만들어 놓은 후였다.
도합 넉 잔의 술 때문일까? 급속도로 어색함이 사라지며 웃음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서정호가 고경순 못지않게 수다를 떨며 분위기를 방방 띄웠다. 사람이 달라 보일 지경이었다.
‘야! 정말 잘 노시네. 아까 본 사람은 어디 갔지?’
함께 따라 웃으며 좋아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빼며 누군가를 찾았다. 당연히 최문옥과 함께 한가운데 있어야 할 사람이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은 어디 계시는 거야?’
고성문이 홀로 식당 입구에 서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11월의 밤바람이 차갑지도 않은지 하늘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사위들은 잘 보네. 이쯤에서 경순이가 손주 하나 떡하니 안겨 주면 최고겠구만.’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나갔다.
“아버님, 추운데 여기서 뭐하세요? 감기 걸리세요.”
“나 아직 젊어. 이 정도는 까딱없어.”
정색을 한 고성문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병원 생활은 어때?”
어른들의 질문에 으레 하는 대답처럼 별일 없다고 하려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문득 이임순이 떠오른 것이다. 어쩌면 주로 수술 환자들만 보게 되는 대학 병원 의사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환자를 경험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버님, 환자 중에 HIV 양성인 환자가 한 명 있는데요. 이번에 아뻬 수술을 했습니다.”
이임순과의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무척 난감한 일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절대 갖출 수 없는 경험과 연륜이 해답을 줄지도 몰랐다. 고성문이 진지한 눈빛으로 김지훈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어려운 상황이네. 김 서방, 환자는 때로 어린아이가 될 때가 있어. 그만큼 몸보다 마음이 훨씬 힘들다는 얘기야. 그땐 의사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돼야 해. 참고 기다리며 이해해 주는 거지.”
“언제까지 그렇게 이해하고 참아야 합니까?”
“의사 하기 나름인데, 그걸 누가 알겠어? 자네 정성을 마음에 담아 환자에게 다가가. 설혹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후회가 되지는 않을 거야. 의사가 환자의 인생을 책임질 수도 없고 말이야. 어이구! 김 서방, 들어가자. 잔소리 듣겠다.”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최문옥 여사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라지지 좀 말아요. 손님들 앞에 두고 뭐하는 거예요.”
“미안해요.”
고성문이 허허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을 했다.
이것도 연륜일까?
어느덧 밤은 깊었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고경아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삼겹살집을 막 나섰을 때 서정호가 호기롭게 외쳤다.
“장모님, 우리 동서 처음 보는 날이고, 정 PD님에게 신세를 좀 질 일이 있습니다. 남자들끼리 딱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여보, 괜찮지?”
핑계가 좋았다. 고경순이 콧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다행히 한수임도 집이 근처라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내려 주면 됐다. 정훈철이 눈치를 보면서도 입을 쫙 찢고 있었다.
“아버님, 저희와 함께 가실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젊은 사람들끼리 먹고 들어와. 서 서방, 자네 스트레스가 많은 건 알지만 정신은 챙겨 와야 돼. 김 서방, 잃어버리지 말고 꼭 데리고 와.”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남자들이 자유를 얻었다. 술도 얼큰하게 오른 참이었다.
“형님, 이차 갑시다.”
그새 무슨 말이 오갔는지 형, 아우가 돼 있었다. 고성문이 혀를 차면서도 웃었다.
그렇게 그날 남자 3명이 3차까지 달렸다. 서정호의 주량은 엄청났다. 정훈철도 전에 없이 마셨다. 소주가 아니라 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우와! 나도 나름 먹는다고 자부했는데, 형님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사실 김지훈에겐 편한 자리만은 아니었다. 주는 술은 술대로 다 마시고, 동시에 온갖 시중까지 들어야 했다. 그게 제일 어린 놈의 아픔일 것이다.
소주에서 시작해 소주로 끝났다.
한밤의 쌀쌀함을 뒤로하고 정훈철과 헤어진 후, 고경아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할 때까지 4차를 외치던 서정호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데 최문옥과 고경순이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있었다.
김지훈의 술자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장모님의 목소리와 상기된 처형의 목소리를 한 시간 동안 더 들어야 했다. 정말 눈물 나도록 가슴 뿌듯한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였다.
***
다음 날 점심때가 돼서야 눈을 떴다. 매콤한 냄새에 이끌려 거실로 나간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최문옥과 고경순이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다. 정말 세다.’
식사를 한 후, 모두들 아쉬움을 남긴 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이불 속을 헤매던 서정호가 고경순에게 단단히 한 소리를 들었다. 어째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지훈도 고경아와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천천히 병원으로 향했다. 숙소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뭔가를 생각하며 갈팡질팡했다.
‘가, 말아. 가, 말아. 에이! 그래. 아버님 말씀대로 이임순 환자는 지금 두려움에 빠진 어린아이야. 나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거야. 가 보자.’
눈빛을 굳힌 김지훈이 이임순을 찾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임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왠지 초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