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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84화 (484/1,329)

제8화 누구나 아플 수 있다 (2)

다음 날 아침, 스테이션이 술렁거렸다.

HIV 보균자를 수술했다는 사실은 교수들에게도 놀랄 일이었다. 회진을 끝낸 교수들이 하나둘 이준영 교수 주변으로 모였다. 모두들 걱정스러워했지만 송재덕 교수의 얼굴이 특히 심각했다.

“이 교수, 어제 고생했네. 수술하면서 문제는 없었어? 조심해야 돼. 조심. 간염 환자 수술할 때도 우리가 얼마나 조심하니. 방심하면 큰일 난다. 큰일 나. 근데 지훈아, 경석이는 어디 있니? 그놈 괜찮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거야. 이런 일 생기면 맥이 쭉 빠지는 법이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잘 거야. 지훈아, 경석이 괜찮지?”

“예. 별일 없습니다.”

금경태 과장과 회진을 돌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송재덕 과장이 이경석을 찾으며 한걱정을 했다. 일반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하는 일이지만 간염 정도와 비교할 일이 아니긴 했다.

한참 교수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이경석이 막 스테이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준영 교수를 보자마자 눈가를 찌푸렸다.

‘제길! 다른 준비는 다 하면서 정작 건물 매입에 대해서는 왜 연락이 없지? 이러다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신경 쓰여 죽겠는데 아침부터 보기 싫은 놈들이 다 모여 있네.’

“이경석, 무슨 일 있어?”

짜증이 솟구친 목소리였다.

이경석이 간략하게 이임순 환자에 대해 설명을 하자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입원해 있는데?”

“내과 병동에 있습니다.”

“거긴 왜?”

“우종철 교수님과 협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우종철 교수? 쯧! 국립 병원은 괜히 있어? 보내면 간단한 환자를 두고 왜 수술까지 해. 감당을 못할 거면 병원 이미지라도 생각해야지 말이야.”

혼자 중얼거리며 외래로 향하는 금경태 과장을 본 이경석이 쓴 입맛을 다셨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평가 절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병원 이미지는 뭡니까? 과장님이면 최소한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준영 교수와의 회진이 남아 있었다. 꿀꿀한 기분으로 인사를 한 이경석이 재빨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교수들과 함께 있던 송재덕 교수가 손짓을 했다.

“경석아, 너 난리 쳤다며? 무서웠니? 무서웠겠지. 말만 들어도 무섭다. 혹시 바지는 안 젖었니? 지훈아, 넌 봤지? 그치? 솔직하게 말해 봐. 솔직하게.”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지금까지 이경석 걱정을 하던 송재덕 교수가 애먼 말을 던졌다.

눈을 부라리는 이경석을 보며 식겁을 한 김지훈이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오해를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순간, 송재덕 교수가 슬며시 이경석의 손을 잡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눈가를 좁히며 초점을 잡느라 애를 썼다.

“괜찮네. 괜찮네. 아무것도 아닌데 경석이 넌 왜 호들갑을 떤 거야? 증상이 없으면 에이즈 환자도 아니잖아. 이 교수, 내 말이 맞지? 보균자면 간염 보균자처럼 대하면 될 거야. 그치? 맞지?”

“감염 내과 우종철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런 일이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극히 드문 일이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럼, 그럼. 별거 없어. 경석아, 넌 그냥 편안하게 치료만 해. 아무 걱정 하지 마. 겁먹지 말고. 에이! 괜히 놀랐네. 이경석, 이 나쁜 놈! 조심해, 조심. 아프면 안 돼.”

“예.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순간 분위기가 묘해졌다. 송재덕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 교수, 환자가 잘 극복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겠지? 그게 문제다, 그게. 사람들 시선도 있고 말이야. 그치?”

“예. 그 점이 제일 중요하겠죠.”

언제까지 말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치프들은 남은 회진을 돌았고, 교수들도 외래나 수술 방으로 향했다.

아침에 일이 있어 뒤늦게 회진을 돈 이혁민 교수가 신현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현수 니도 그런 경험을 해 봐야 하는데 아깝네. 시간 되는 대로 어떤 준비가 필요하고, 어떻게 수술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아 놔라. 심리적인 부담이 상당했을 거다.”

신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저녁 오프에서 돌아와 이미 전해 들었다. 두렵고도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한 모습에 느낀 바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에 들은 김지훈의 말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환자를 이해한다고 너무 감정적이 아니었나 싶어.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이번 수술은 현수 니가 있었으면 훨씬 더 확실하게 준비했을 것 같아. 환자를 위해서라도 그게 더 좋았을 것 같아.’

진심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김지훈처럼 대처했을 자신이 없었다. 김지훈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했지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환자에 대한 자세와 마음가짐이겠지. 어쩌면 지훈이 네가 훨씬 더 환자를 이성적으로 볼지도 몰라.’

감정이 토대가 된 이성과 이성을 토대로 한 감정.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김지훈의 태도는 배워야 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면 허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수술할 환자는 준비 잘됐나?”

“예, 선생님.”

“그럼 수술실에서 보자.”

수술 방으로 향하는 이혁민 교수를 보던 신현수가 부리나케 병실로 향했다. 이미 회진을 돌면서 보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를 잊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환자가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필요했다.

***

오늘도 수술실은 쉬지 않고 팡팡 돌아갔다.

이임순 환자를 수술한 방은 당분간 사용할 수 없기에 여분이 없었다. 그 탓에 본의 아니게 수술실을 줄여 버린 일반 외과 수술이 줄줄 뒤로 밀렸다. 평소 세 방에서 벌였던 수술을 이젠 두 방에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과가 늦게 끝나겠지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치프 중 누군가 한 명은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수술 사이에 이임순을 찾았다. 겸사겸사 다른 환자들과도 간만에 여유를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새삼스러웠지만 환자들 저마다 사연이 많았다. 다들 언제 퇴원할 수 있을지부터 물어 왔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고민들이 깔려 있었다.

자식과 남편 걱정.

경제적인 문제.

퇴원 후에는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

모두들 이러저런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누구도 자신이 아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환자 중 누군가는 마냥 건강할 줄만 알았다고 했다.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런 말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 그런 기분도 잠시, 다시 수술 방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다.

문득 한숨이 터졌다.

‘우리는 언제나 환자하고 느긋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체력이 걱정이 될 정도로 일인당 맡아야 할 수술과 환자가 많았다. 미국처럼 입원 차트만 앞뒤로 서너 장을 꽉 채워야 할 정도로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환자 한명 한명에게 단 30분이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이임순 환자로 인해 생각이 참 많아지는 하루였다.

그날 모든 일과가 끝난 후 교수 몇몇이 모였다. 송재덕 교수가 자리를 갖자고 한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벌써 11월이고, 텀도 곧 바뀌잖아. 치프들 어떻게 할지 상의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그치? 때가 됐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교수, 경석이 좀 어때? 이제 슬슬 수술 좀 줘야 하지 않겠어? 내가 보기엔 그만큼 올라왔는데 말이야. 이번 아뻬 하면서 많이 놀랐을 텐데 좋은 일도 있어야 하잖아. 사람이 힘들기만 하면 지친다. 지쳐. 알잖아.”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석이는 상당히 침착하고 기본기가 탄탄해서 걱정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담낭 쪽으로 케이스 몇 건 줄 생각입니다.”

“그렇구나. 경석이가 수술은 안전하게 하지. 그렇지. 치프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아서 그런지 너무 안전하게 하지 않아? 옛날에는 술 먹고 행패 좀 부렸을 것 같은 얼굴인데, 의외로 성격이 너무 무난해. 그치? 내 말이 맞지?”

“지금 치프들 성향을 볼 때 그런 스타일도 꼭 필요합니다. 다들 개성이 뚜렷해서, 예전에 선생님이 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는 중심을 잡고 조절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런 말을 해. 어이구! 얼굴이 화끈거리네. 어쨌든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근데 지훈이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훈이 말이야, 지훈이.”

“지훈이는 키워야 할 방향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요? 현수나 일석이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구나. 결국 끼리끼리 놀자는 말이구나. 경석이는 나고, 나머지는 니들이란 소리지? 좋아. 그래. 내가 인정할 테니까 대신 경석이 라파로 하나 주자. 대장을 하지만 라파로에도 욕심을 낼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놈이 나 닮아서 은근히 욕심이 많아요. 그치? 그렇지?”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손으로 하는 수술과 기구를 이용한 수술은 다르다. 더구나 스테이플을 이용하는 수술과는 달리 라파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구를 사용해야 한다. 수술의 난이도뿐만이 아니라 의사의 기술적인 측면을 매우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가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도 주기 어려운 수술입니다. 경석이가 뛰어나긴 해도 노력은 못 따르는 것 같습니다.’

무언은 긍정이라지만 이준영 교수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말 잘하던 이준영 교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송재덕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작은 이 교수, 현수는 어때?”

언제부턴가 모두 함께 있으면 송재덕 교수는 이혁민 교수를 작은 이 교수라고 불렀다. 물론 다른 교수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화나면 이준영 교수보다 더 무서울지도 몰랐다.

“현수, 그놈 아주 좋습니다. 정확하고 간결한 데다 이론적인 부분도 상당합니다. 최근에는 환자에게도 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해서 마음에 아주 쏙 듭니다. 저도 조만간에 수술을 줄 생각인데, 다만 암 수술은 4년차나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살짝 놀랐다.

“암 수술을 준다고? 정말이야? 정말이지? 야! 현수를 상당히 인정하네. 석재도 고민고민하다 4년차 말에 주지 않았나? 음! 현수가 생각보다 펄펄 나는구나. 날아. 그럴 거라 생각은 했는데, 우리 작은 이 교수한테 그 정도까지 믿음을 줬단 말이지? 대단하다. 대단해. 야! 대단하다. 이 교수, 그치?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하는 걸 봐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두 놈 남았는데 나쁜 놈은 구미 가 있으니까 일단 빼고, 나머지 한 놈은 어때? 손은 그놈이 제일 낫지? 그렇지? 이 교수, 어때?”

이준영 교수가 물끄러미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파트를 하고자 하는 치프들에게 더 깊은 정을 쏟기 마련이었다. 송재덕 교수처럼 대놓고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라 그렇다고 하기도 곤란했다.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낯을 가려? 어쨌든 이 교수 말대로 내가 더 잘 알 수도 있어. 수술 주고도 남아. 암! 남고말고. 나도 기회 되면 수술을 줄 생각이야. 음! 이거 흥미진진하네. 어느 놈이 제일 먼저 받을까? 누굴까?”

교수들이 말하는 기회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환자 케이스도 적당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치프들이 준비가 됐다는 확신이 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발전해야만 수술을 줄 것이다. 만에 하나 나태해지거나 태만하다면 다 잡았던 기회조차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거의 말이 없던 신기동 교수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이구! 일석이가 없으니까 난 끼지도 못하네. 이 교수, 동기들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신 교수, 한 달이면 텀 바뀐다. 이경석이 다음 달에 구미 간다는 말이다.”

신기동 교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럼 송재덕 선생님 차례네?”

가만히 있을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다.

“신 교수, 일석이가 대장 하면 좋겠지? 대장. 좋다. 좋아. 나쁜 놈 안 되고 얼마나 좋아. 경석이하고 일석이를 쌍두마차로 끌고 가야겠다. 가만, 지훈이는 어떻게 하지? 이 교수, 마부를 시킬까? 좋지? 그치? 어? 다들 어디 가? 이 교수, 작은 이 교수, 신 교수, 어디 가?”

다들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일어나 퇴근을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송재덕 교수의 욕심을 상대하다가는 입만 아플 것이다. 아낀다고 다 직속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

교수들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르지만 치프들은 오늘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난 뒤 누군가는 논문을 쓰고, 누군가는 발표할 환자 및 질환을 정리했다.

물론 오프는 꼭 챙겼다. 그 시간마저 일과 이론에 빠진다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 일이 년차 때와는 달리 같은 일도 점점 깊이 파고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1월 첫째 주도 후반에 들어섰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동안 이임순과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이제 보호자와는 곧잘 대화를 했지만 이임순의 닫친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이해는 하면서도 난감했다.

‘저렇게 말을 안 하면 기분이 더 가라앉을 텐데 문제네. 회복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게 뻔해. 그렇다고 하루에 몇 번씩 갈 수도 없고 곤란하네.’

다행히 열도 떨어지고, 검사상 이상 소견도 보이지 않았다. 우종철 교수 역시 이 상태로 순조롭게 회복된다면 증상이 발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기에 이임순의 의지가 더욱 중요했다.

걱정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발길이 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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