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함께해야 할 사람들 Ⅱ (2)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기흉과 혈흉이 동반된 다발성 늑골 골절 및 상지 골절 등의 다발성 손상이 있었다.
게다가 긴장이 풀어지기 쉬운 주말이었다. 환자가 확실하게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중환자실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박순용과 흉부외과 2년차인 이종원이 환자 앞에 서서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당장 해야 할 검사들과 향후 치료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저 자리에 천유섭 환자가 있었잖아. 그때는 정식이하고 머리를 맞댔었는데 이번에는 흉부외과네. 팔 부러진 것도 빨리 해결해야 할 텐데.’
“경석이 형, 정형외과 컨설트 안 내요?”
정형외과 하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교수가 있었다.
악어와는 정반대의 느낌이랄까?
이경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순용 선생, 정형외과 김대성 선생님 앞으로 컨설트 내. 주말 동안 못 보니까 가급적이면 월요일 아침에 빨리 봐달라고 부탁하는 거 잊지 말고.”
망설이지도 않고 김대성 교수를 언급하는 모습에 김지훈이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누구에게나 신뢰를 받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이었다.
“지훈아, 안 올라가? 환자 괜찮은데 가서 쉬어.”
기명석 환자는 이준영 교수 앞으로 입원을 했기에 이경석이 봐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치료인 수술은 김지훈이 했다. 퇴원할 때까지 신경을 써야 할 환자였다.
순간 장난기까지 발동한 참이었다.
“수술을 했더니 피곤한 줄 모르겠네.”
언제 가져왔는지 김지훈이 떡하니 이경석의 눈앞에서 전공의 수술 수첩을 펼쳤다.
진단명 : 비장 및 공장 파열
수술명 : 비장 절제술 및 공장 절제 후 단단문합술
집도의 : 전공의 3년차 김지훈
김지훈이 쭉쭉 새로운 칸을 채웠다. 이경석이 입맛을 다시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수술 건수가 두 개였다. 많고 적음을 떠나 3년차 때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도 기분이 묘한데, 현수가 알면 아주 눈에 불을 켜겠네. 너희 둘이 경쟁하는 덕에 나도 자극을 많이 받고 산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 숨겨진 강한 승부욕.
당당하기에 보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덩달아 함께 노력할 수 있었다. 지금은 구미에 있지만 손일석까지 가세하면 정말 볼 만할 것이다.
이경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공의 수첩을 챙긴 김지훈이 환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옆구리에 박힌 드레인을 확인하며 눈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안정적인 바이탈.
피와 물, 혹은 체액이 섞여 발그스름해진 거즈.
이 정도 색깔만 유지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환자분! 힘냅시다.’
불끈 뒨 주먹을 부르르 떠는 모습에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피식피식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끔 보면 의외로 웃긴 구석이 많은 놈이었다.
어느새 밤 10시다.
숙소에 앉아 논문을 작성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문장 하나가 막혔다. 자연스럽게 연결할 문구가 금방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용은 머릿속에 있는데 그깟 단어 하나에 막힌 것이다.
영어라서 그럴까?
이혁민 교수의 빨간 펜이 주는 중압감일까?
찬물에 세수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료들을 뒤적이며 궁리를 해도 막상 쓰려고 하면 손이 나가질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던 김지훈이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어우! 답답해. 시간이 나면 뭐해. 논문이 써져야지. 제길! 경석이 형, 커피 한 잔 안 할래요?”
“난 잘 써진다. 니가 사 오면 마셔는 줄게.”
“좋겠습니다. 전 찬바람 좀 쐬고 올게요. 커피는 생각나면 사 오고요.”
“그러지 말고 하나 사 와. 내 스타일 알지? 블랙이다.”
논문을 작성하는 이경석의 눈이 번쩍였다. 말을 하면서도 손가락이 쉬질 않았다. 부러울 뿐이었다.
쩝쩝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1층 로비로 향했다. 캔 커피 하나를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블랙도 하나 챙겼다.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밤바람에 머릿속이 개운해졌지만, 그 사이로 응급실의 소란함과 분주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현듯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를 업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 엄마, 복통이 꽤 심한지 머리가 희끗한 엄마에게 기댄 채 응급실로 들어서는 젊은 여인, 시뻘겋게 변한 수건을 머리에 감싸고는 황급히 달려오는 남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인턴들과 전공의들은 물론 간호사까지 모두들 밤새 환자와 씨름을 할 것이다.
‘다들 고생이 많네.’
허리춤에 달려 있는 삐삐를 만지며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고경아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이번 주도 일반 외과 주요 수술을 담당하느라 꽤 힘들었을 것이다.
“경아 씨, 많이 힘든 모양이네.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잘 자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나 오늘 너무 피곤하네요. 미안해요. 내일 꼭 전화해요.)
‘미안할 일도 많네. 흠! 서운하긴 하네.’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는 로비에 들어서던 김지훈이 응급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박순용과 꽤 오랫동안 같은 파트를 한 모양이다. 희끗한 그림자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봤으니 말이다.
“박순용 선생님, 환자 있어요?”
“어? 선생님, 어떻게 알고 내려오셨어요? 안호석 선생님께 막 노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요? 노티하세요.”
각 년차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치프가 아무 때나 개입을 하면 결국에는 아랫년차들의 실력을 저하시킬 것이다.
김지훈이 스테이션에 앉아 턱을 괴고는 눈가를 비볐다.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박순용이 노티를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31살 여자 환자, 이임순.
아뻬가 의심되며, 열이 39도나 되는 것으로 보아 터졌을 가능성이 있다. 3년 전 교통사고로 인한 골절 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으며, 그 외 특이 사항은 없다.
“바로 내려갈 테니까 검사부터 내보내세요.”
“혈액 검사 내보내고 X-ray 찍겠습니다.”
필요한 검사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호석이 내려왔다. 김지훈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어? 선생님, 언제 내려오셨어요? 환자 있다는 연락받고 내려오신 거예요?”
“아니야. 잠깐 커피 마시러 내려왔다가 들렀어. 열이 39도나 난다는데 빨리 봐.”
“아직 안 보셨어요?”
안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환자가 있으면 득달같이 보던 김지훈이었다. 의아하긴 했지만 최근에 와 조금씩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호석아, 박순용 선생님이 아니라 너한테 노티를 받아야지. 그리고 우리 엑설런트한 2년차들이 이렇게 빨리 내려오는데, 내가 먼저 볼 이유가 없잖아.”
김지훈이 히죽 웃으며 손짓을 했다.
안호석이 박순용과 함께 다시 환자를 보는 사이 검사 결과가 나왔다. 간호사가 이임순 환자의 응급실 차트에 혈액 검사 결과를 붙였다.
“우리 환자 거 맞죠?”
“예, 맞아요.”
“이리 주세요. 토요일 저녁 치고는 한가하네.”
“어머! 김지훈 선생님, 치프까지 돼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오늘 밤에 난리나면 책임지세요.”
이런 말을 하면 꼭 난리가 난다. 경험이 그렇다고 분명히 말을 하는데 큰 실수를 했다. 김지훈이 딴청을 피우며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항목을 쭉 따라 내려가던 김지훈이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어? 이게 뭐야?”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왜 그러세요?”
“잠깐 검사실 좀 갔다 올게요.”
다급하게 응급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무슨 생각인지 다시 돌아왔다. 이임순 환자를 보고 있는 안호석과 박순용을 불러냈다.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호석아, 아무도 환자하고 접촉하지 못하게 막아. 너나 박순용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갔다 와서 얘기해 줄게.”
검사실에 도착한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검사 결과가 확실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두 번이나 다시 검사를 했어요. 간호사가 나 없는 사이에 결과지를 가져가서 안 그래도 조심하라고 할 참이었다고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일단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검사실 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당장 필요한 조치는 취했으니까 걱정 말아요. 확실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고, 혈액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채혈해서 한 번 더 검사합시다.”
“빨리 보내 주세요.”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주사기와 고무줄을 챙겼다. 난데없이 의료용 장갑까지 끼고는 이임순 환자를 찾았다.
기다리고 있던 안호석과 박순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손짓해 부르고는 주머니 속에서 결과지를 꺼냈다.
“호석아, 박순용 선생님, 결과 보고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마세요. 다시 채혈해서 확실한지 확인할 겁니다.”
“뭔데 그러세요?”
결과지를 받아 든 안호석이 눈을 부릅떴다. 박순용도 크게 놀라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석아, 침착하게 행동해. 환자 앞에서 티를 내면 안 돼.”
환자를 본 김지훈이 긴장된 표정을 짓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희끗한 머리의 보호자가 눈에 익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보았던 환자였다.
내과에서 먼저 본 탓에 시간이 지연된 상태라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환자 상태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김지훈이 연거푸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일반 외과 3년차 김지훈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힘드시겠지만 진찰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장갑을 낀 채로 환자를 진찰했다.
우하복부 압통과 반사통이 관찰됐다. 모든 증상으로 보아 전형적인 아뻬였다. 39도에 달하는 고열은 맹장이 터졌거나, 혹은 염증이 아주 심하다는 암시였다.
“맹장염이 강하게 의심됩니다. 그런데 혈액 검사상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채혈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 기다리신 줄 알지만 양해해 주세요.”
이임순 환자가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하루 종일 지속된 고열로 몸과 마음이 엉망이었다. 맹장염이라면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또 검사를 한다니,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한 부분이라니요?”
역시 짜증이 잔뜩 실린 목소리였다.
“검사 결과가 다시 나오면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힘드신 건 압니다만, 조금 더 참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설명에 이해할 수 없는지 숨을 몰아쉬던 환자가 입을 꼭 다물었다. 김지훈이 상당히 신중한 손길로 직접 채혈을 하고 있었다.
다른 환자는 다 간호사들이 채혈을 했다. 자신 역시 처음에는 간호사들이 했기 때문에 의아하면서도 뭔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피를 뽑던 김지훈이 물었다.
“환자분, 예전에 수술하신 적이 있다고요?”
“네. 이미 말했는데요.”
“그 당시 피 검사 결과는 다 괜찮다고 했나요? 혹시 수술을 받을 때 수혈을 했단 말을 들으신 적은 없나요?”
“특별한 말은 못 들었고, 수술 후에 빈혈이 심해서 피를 맞은 적은 있어요. 딱 한 번이었는데, 그건 왜 물으세요?”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상하게도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박순용 선생님, 검사실하고 얘기 됐으니까 바로 검사할 겁니다. 빨리 다녀오세요.”
“예, 선생님.”
“환자분, 보호자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안호석이 환자 곁을 지켰다. 난데없이 치프인 김지훈이 직접 채혈을 하자 간호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저 환자에게 무슨 일 있어요? 아니면 잘 아시는 분이에요?”
“아니에요. 일단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환자와 접촉하지 마세요. 복부 CT 예약하고요.”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맹장염이라면서 갑자기 CT는 왜 찍어요?”
궁금해 죽겠다는 간호사들의 질문 공세에도 김지훈은 입을 열지 않았다. 도리어 양 미간을 좁힌 채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양성이 확실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현재까지 접촉한 사람들은 괜찮겠지? 어후! 당연히 괜찮지. 당황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배운 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박순용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검사실에서도 최대한 서두른 모양이었다.
“선생님, 결과 나왔습니다.”
“양성이 확실해요?”
“예. 두 번을 검사했습니다. 확실합니다.”
박순용이 결과지를 내밀었다. 김지훈의 손이 살짝 떨렸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 항체 양성
이임순은 에이즈(AIDS) 환자였다. 또한 39도의 고열이 날 정도로 심한 아뻬가 동반된 환자였다.
너무도 익숙한 질환 뒤에 숨은 공포의 질환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아니, 두려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