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함께 불타오르자 (2)
항문 밖으로 뛰쳐나온 치질 덩어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꽃이 핀 것처럼 항문을 뒤덮고 있었다. 의사들끼리 흔히 해바라기라고 부르는 형태였다.
검붉은 색에 퉁퉁 부어 있는 것이, 빠져나온 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항문에 조여진 치질 덩어리의 혈류가 차단되며 썩기 시작했을 것이다.
불편함을 넘어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간경화로 컨디션까지 나빠 훨씬 더 아프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오상익 교수가 찬찬히 치질을 살폈다.
항문 안쪽에서 발생한 내치질이었다. 변을 볼 때 새빨간 피를 쏟거나 덩어리가 뛰쳐나오는 것이 주증상이다. 빈혈이 유발될 정도로 출혈이 심하거나, 치질 덩어리가 항문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을 때 수술을 요한다.
통상적으로 이 정도로 심하면 당연히 수술을 해야 하는 케이스였다.
“너무 심하네. 이러다 조직 괴사까지 오겠다. 김지훈 선생, 빨리 조치부터 취해.”
“예, 선생님.”
김지훈이 급히 의료용 젤리를 가져왔다. 장갑에 과할 정도로 젤리를 묻히고는 조심스럽게 치질 덩어리를 항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아악!”
환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김지훈을 밀쳐내다 못해 주먹을 휘두를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항문을 검사할 때도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썩기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치질 덩어리를 억지로 우겨 넣으니 극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새우등을 하셔야 됩니다, 새우등. 정식아, 환자 손 좀 잡아 줘.”
사람은 아플수록 힘을 주기 마련이다. 치질 덩어리를 밀어 넣을 때마다 항문이 바짝 조여졌다. 더구나 심하게 부은 상태였다. 쉽게 복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씨름을 했다. 치질 덩어리에서 새어 나온 검붉은 피가 장갑에 잔뜩 묻었다.
환자는 물론 김지훈의 이마가 땀으로 범벅이 된 후에야 멀쩡한 항문을 볼 수 있었다.
“어으으!”
환자가 묘한 신음을 터트리며 축 처졌다. 이제야 극심한 통증에서 해방된 것이다. 환자가 안정되기를 기다리던 오상익 교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환자분, 이젠 괜찮으십니까?”
“예. 죽는 줄 알았네요. 너무 힘들고 아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과 선생님들은 안 된다고 하지만 제발 좀 없애 주세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환자가 거의 애원을 했다.
오상익 교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수술에는 금기가 있다. 상대적 금기라면 최대한 안전에 유의하면서 시도할 수 있지만, 이 환자의 경우에는 절대적 금기였다. 간경화 때문이었다.
치질은 항문에 분포한 정맥이 확장돼 발생하는 질환이다. 이를 유발하는 원인은 상당히 많다. 간경화도 그중 하나로, 일단 간이 딱딱해지기 시작하면 간 내 혈관이 늘어날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에 혈관 내 압력이 크게 높아진다.
연쇄적으로 간 내 혈관과 연결된 항문 내 정맥의 피가 정체되게 된다. 이와 상관없이 동맥은 높은 압력으로 계속 피를 공급하기 때문에 결국 정맥이 크게 늘어나며 치질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간경화가 회복이 불가능한 질환이라는 점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백날 치질을 제거해 봐야 재발을 막을 수는 없다.
더구나 재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오상익 교수가 환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환자분, 불편하고 아프신 건 잘 알지만, 이 경우에는 수술을 해서는 안 됩니다. 치질이 생긴 원인이 간경화이기 때문에 억지로 칼을 대 봐야 100퍼센트 재발합니다. 게다가 간 기능이 좋지 못해 수술 후 출혈이나 감염이 발생하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 아시죠?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환자가 아프면 치료를 해야 하는 게 의사잖아요?”
환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간경화로 인해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알기에 이해는 됐지만 환자의 말이 점점 심해졌다.
그런데 오상익 교수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짜증스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김지훈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환자를 대할 때도 평소와 똑같이 점잖으시네. 이런 면은 정말 배워야 해.’
씩씩거리는 환자를 보며 오상익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환자분, 아시겠지만 간경화는 회복되는 질환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환자분은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수술은 못합니다. 만약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출혈이 발생하거나 치질이 썩을 정도라면 어쩔 수 없이 해야겠지만, 그때 역시 각오하고 수술을 해야 합니다. 치질이 주는 불편에 하나뿐인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한참을 설명한 끝에야 환자가 수긍을 했다. 목숨을 걸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었다. 운에 기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럼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오상익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그동안 하는 걸 봐서는 이 정도는 맡겨도 되겠어.’
“김지훈 선생, 환자분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려.”
김지훈이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웬만큼 신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오더였고, 신뢰에 부응해야 할 때였다.
“예, 선생님. 환자분, 치질에는 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스스로 관리하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4시간 간격으로 따뜻한 물에 좌욕을 하시고, 항문 밖으로 치질이 뛰쳐나오면 바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방치하다 부종까지 발생하면 통증을 참기 힘드실 겁니다. 젤리하고 장갑을 두고 갈 테니까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손으로 밀어 넣으라고요? 그걸 어떻게 해요?”
“익숙해지실 때까지 제가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령만 알면 약간 나온 치질 정도는 그냥 손으로 밀면 되니까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사실 일반 외과 전공의면 다 아는 내용이었다.
오상익 교수는 그것보다 김지훈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기대했던 대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나 송재덕 교수가 총애할 만하네. 수술 실력도 그렇고, 전공의를 이렇게 키운 걸 보면 훌륭한 의사들인 건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하지? 후우! 외과 센터까지 생긴다니까 마음이 참 복잡해지네. 과장 한번 못해 보고 은퇴할 수는 없는데.’
만족스러우면서도 뭔가 묘한 표정을 지은 오상익 교수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한동안 환자에게 주의할 사항을 말한 김지훈이 공정식과 함께 병실을 나왔다.
‘그래. 수술만이 능사가 아니지. 이 환자는 이득과 손해가 분명하게 차이가 나니까 고민할 부분이 없지만, 애매모호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야겠어.’
컨설트도 배움의 연장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며 오상익 교수의 답이 담긴 컨설트 용지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간호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방금 전에 보신 환자 치질이 뛰쳐나왔대요.”
“벌써요?”
그럴 법도 했다. 워낙 부종이 심했기에 조금만 자세를 잘못 취해도 삐져나올 것이다.
부리나케 달려가 환자에게 방법을 다시 설명했다. 다행히 한 덩어리만 나온 상태였다.
“환자분, 손으로 치질을 만져 보세요. 손가락 3개로 감싸 쥐고 가운데로 모으면서 안쪽으로 미세요. 그렇죠. 그렇게 살살 조금만 더요. 됐습니다. 쉽죠?”
치질 덩어리가 쏙 들어간 자신의 항문을 확인한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게 웃던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리 의사라지만 남의 엉덩이에 고개를 박고 항문을 보며 웃는 모습이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이럴 땐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또 나오면 바로 연락하세요. 한두 번만 더 해 보시면 금방 쉽게 하시겠네요.”
후다닥 병실을 나와 외과 병동으로 향하려던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쳤다. 공정식을 찾았다.
“정식아, 송재덕 선생님 앞으로 난 컨설트는 뭐야? 급히 오느라 미처 확인을 못했네.”
“크론(Crohn’s disease)이야.”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론? 간경화 환자 치질을 컨설트 내더니, 크론은 또 뭐냐? 장 폐쇄라도 발생했어?”
“약물 치료에 반응을 잘 안 해. 복막염 증상도 있고, 니 말대로 장 폐쇄 증상까지 있어. 양승철 선생님이 일단 수술적인 치료를 요할 정도인지 판단을 받으라네.”
공정식의 대답을 들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오늘 이상한 날이네. 어떻게 수술 적응이 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환자 컨설트만 와.”
재빨리 차트와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공정식 말대로 검사 결과가 심상치 않았다. 시간이 없어 환자는 미처 보지 못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크론에서 수술 적응증이 어떻게 되더라?’
막간을 이용해 교과서를 펼치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크론 환자는 방금 전에 본 치질 환자 이상으로 매우 신중하게 수술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치프들과 함께 토론하고 준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케이스였다. 고민스러웠던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는 모양이었다.
곧 송재덕 교수가 올라와 오후 회진을 돌고, 마지막으로 컨설트를 보러 갔다. 단순 사진과 복부 CT 및 초음파와 대장 내시경 소견을 모두 취합했다.
‘다른 환자라면 당연히 수술을 해야 할 경우지만, 크론 환자는 완전히 상황이 다른데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지?’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23세 남자 환자, 천유섭.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전형적인 크론 환자였다.
영양 상태가 나빠 비쩍 말라 있었고, 혈색은 창백했다. 만성적인 복통과 설사, 그리고 체중 감소 등으로 고생하다 확진을 받은 지 5년째였다.
첫 2년간은 적절한 식이요법과 관리만으로 증상을 호전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스테로이드 제제를 비롯한 면역 억제제를 투여했고, 호전과 악화가 반복됐다. 최근에는 구강과 소화기 궤양은 물론 항문 주위 농양까지 병발했다.
다시 입원해 3주 동안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증세는 더욱 나빠졌다. 결국 외과에 컨설트를 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크론의 가장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한 것이다.
크론의 주 병세는 소장이나 대장에 발생하는 궤양이다. 얕은 궤양이 대장 전체를 침범하는 궤양성 대장염과는 달리 부분적으로 발생하지만, 대신 장벽 전체를 침범한다.
이런 특징이 미세한 천공을 만들고, 제때에 막히지 않으면 내용물이 새어 나오며 복강 내 농양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반복적인 염증 발생으로 장벽이 두꺼워지며, 심한 경우 장 폐쇄까지 초래한다.
천유섭은 이런 합병증이 모두 발생한 상태였다. 복강 내 농양을 제거하기 위해 우측 옆구리에 꽂은 배액 관에 소량의 고름이 걸려 있었다.
송재덕 과장이 신중한 표정으로 진찰을 했다.
우하복부에서 압통과 반사통이 강하게 나타났고, 항문 주위 농양까지 겹쳐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항생제를 강하게 투여하고 있었지만 고열은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지난 병력까지 자세하게 물은 송재덕 과장이 갑갑한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있던 보호자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환자분 어머니 되시나요?”
“네, 선생님. 우리 아들 수술까지 받아야 하나요?”
자식의 오랜 투병에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크론은 증상이 심하다고 해도 함부로 수술을 하는 질환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부 소견이 심상치가 않네요. 일단 외과 교수들과 함께 상의한 후 수술을 해야 할지, 한다고 하면 어디까지 건드려야 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식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다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복강 내 우하부에 농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피부를 통해 삽입된 배액 관 끝이 정확하게 농양 속에 위치해 있었다. 소장의 말단부인 회장의 일부는 상당히 좁아진 상황이었다.
“지훈아, 치프야, 이거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배액 관이 제 구실을 할까? 안 되겠지? 고름이 너무 지저분하다. 그치?”
미간을 좁히며 복부 CT를 뚫어지게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예. 배액 관으로는 제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치. 그렇지. 그럼 소장 좁아진 건 어떻게 하지? 저거 잘못 자르면 안 붙는다. 안 붙어. 이어 준 자리에 궤양이 생기면 더 크게 터질 거야.”
김지훈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내과 치료가 원칙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해도 결과가 극히 나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문 주위 농양은 또 어떻게 하지? 어렵다. 어려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큰일이다, 큰일. 지훈아, 치프야, 공부 열심히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줘. 그게 좋겠다. 그게.”
그러고는 컨설트 용지에 외과 소견을 적었다. 어렵다는 말과는 달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항생제 요법 강화하고, 일단 보존 치료 시행할 것. 외과적 치료 여부는 이틀 후 환자 다시 진찰한 후 결정할 예정임. 단, 증상 악화 시 응급으로 수술할 수 있음.>
“가자. 가자. 대장이 이래서 어렵고 재밌다. 크론이야. 크론. 이거 정말 경험하기 힘든 질환이다. 치프야, 지훈아, 신중해야 돼. 이런 환자 욕심내면 큰일 난다. 명심해라, 명심. 알았지?”
“예,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병동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지도 못했던 환자였다. 물론 수술 결정은 송재덕 교수가 한다. 하지만 치프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다면, 맞든 틀리든 간에 그 역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이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인턴 선생.”
“예, 선생님.”
“미안한데, 크론에 대한 논문 좀 찾아다 줘. 수술한 케이스만 있으면 되고, 최근 3년 안에 발표된 걸로. 부탁한다.”
“지금 당장이요?”
“그럼, 당연하지. 오프면 당직 선생한테 말하고 가.”
부지런히 사라지는 인턴을 보며 김지훈도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크론에 관한 부분들을 모두 복사한 후 숙소로 올라갔다. 얼마 후, 인턴이 논문 10부 정도를 복사해 왔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질환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많은 자료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 어깨가 무거워졌다. 크론이란 병의 특징 때문이겠지만 의학의 한계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생명이 그만큼 귀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크론이라.’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