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인과응보 (2)
무럭무럭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묻는다고 속 시원하게 대답할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일이 년차들을 식당으로 보낸 치프들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다시 의국이다.
무슨 일인지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퇴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신상민 원장까지 보였다.
“이 교수, 어서 와. 여기 앉아. 치프들도 앉지.”
희끗희끗한 머리에 까만 뿔테를 쓴 모습이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와 딱 어울렸다.
“송 교수,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설명했지?”
“예.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사죄는 드렸고, 전종훈과는 개별적인 보상을 협의해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물론 병원 역시 일정 부분 책임을 진다는 말도 빼놓진 않았습니다.”
신상민 원장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돈을 다 줄 수도 없는데 벌써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사람하고는. 이런 일에는 말투까지 달라지는 사람이 왜 이렇게 급해지는지 몰라.”
“환자가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정직하고 신뢰를 줄 수 있어야 원만하게 해결될 겁니다.”
“알았네, 알았어. 하지만 신상민이 아닌 원장 입장도 생각 좀 해 줘. 이 교수, 확실한 결론이 날 때까지 송 교수 좀 붙잡고 있으라니까 뭐했어?”
이혁민 교수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원장님.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말한 그대로야. 전종훈이 사직을 하게 된 이유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아직 말할 수가 없으니까 양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럼 다들 모였으니까 환자분과 보호자 부르지.”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말에 김지훈과 이경석이 힐끗 신현수를 보았다. 신현수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이번 일만이 아니었어. 요새 아버님과 장인어른이 갑자기 자주 만나시는 것 같던데, 혹시 관계가 있을까?’
교수들도 더 이상 묻지 않는 상황에서 전공의가 입을 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다른 얘기들이 오가는 사이, 노윤미와 노상훈이 들어왔다. 의사들이 바글바글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하십니까? 원장을 맡고 있는 소아과 신상민입니다. 그동안 심려가 크셨죠? 죄송합니다.”
신상민 원장이 차근차근한 말투로 거듭 사죄를 하고, 최선을 다해 보상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노상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든 과실이든, 동료였던 사람의 실수를 거론하는 것은 거북한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다들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것처럼 진지하면서도 차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역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들이시다. 당장은 힘들지만 이렇게 처리해야 올바른 거겠지? 그런데 왜 우리까지 부르셨을까?’
어느 틈엔가 신상민 원장의 말이 끝났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을 안 하셨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일인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노상훈의 얼굴이 편해 보였다. 다행히도 병원과 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치프들과 눈을 마주친 노윤미는 여전히 웃어 주었다. 내심 미안하면서도 일이 잘 마무리돼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송 교수, 시간이 늦어서 난 먼저 가 봐야겠어. 치프들도 이번 일을 통해서 좋은 교훈을 얻길 바라.”
의국을 나서던 신상민 교수가 고개를 까딱이며 돌아섰다.
“아! 김지훈 선생, 내 말이 틀리지 않았지? 그동안 잘해 줘서 고맙다. 이번 일도 자네 덕을 좀 봤다지? 복강경 그거 참 좋네.”
난데없는 말에 모두들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지? 설마 그때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 맞다. 내가 신상민 선생님을 뵌 건 면접 봤을 때를 빼면 그때뿐이잖아.’
음성으로의 파견이 결정된 날.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리운 이들에게 한탄을 하던 날.
스승에 대해 처음 들었던 날.
바로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을 신상민 원장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묘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급히 달려 나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신상민 원장이 씨익 웃으며 손을 들었다.
김지훈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먼저 손을 내밀며 따뜻하게 격려해 준 신상민 원장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다시 의국으로 들어선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준영 교수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김지훈을 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신상민 선생님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네.’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죠.”
“아니야. 이 교수가 해.”
송재덕 교수의 말에 이혁민 교수가 치프들을 보았다.
“다들 이번 일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거다. 환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생각이 많을 거야. 어떤 교훈을 얻었든 간에 평생 동안 잊지 말고 가슴 깊이 간직해라. 알았나?”
“예, 선생님.”
“의사에게 과실이나 사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사고까지 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모르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환자를 완벽하게 치료하거나 모두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론 나쁜 마음을 품고 억지를 부리는 환자를 만날 수도 있다.”
이혁민 교수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땐 당당하게 행동해라. 도망가고 회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고, 누구에게나 떳떳할 수 있다면 동료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거다. 환자가 약자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마라. 우리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그게 현실이다. 이것 역시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혁민 교수의 말처럼 이번 일로 느낀 점이 많았다.
전종훈은 과실을 과실로 끝낼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스스로 차 버렸다. 평소 신망을 얻기는커녕 불신만 키웠다.
돌이켜 보면 스승인 이준영 교수도 치명적인 의료사고를 냈다. 과실과 사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한 사람은 병원을 나가야 했고, 더 큰 문제에 직면했던 사람은 숱한 고난을 이겨 내고 다시 우뚝 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의사이자 집도의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책임이었다.
‘항상 환자와 동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해. 만일 실수를 하게 된다고 해도 집도의로서 책임을 잊지 않아야만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전종훈의 일은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
언젠가는 비슷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만일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며 고개를 흔들고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전종훈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상념에 잠겼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래. 이 교수 말이 맞다. 맞아. 치프들아, 명심해라. 우리도 아차 하면 똑같은 놈 된다. 실수가 두려운 게 아니라 덮으려고 하는 것이 무서운 거다. 그걸 잊으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게 된다. 경석아, 지훈아, 나쁜 놈아, 알았지? 내 말이 맞지? 그치?”
드디어 송재덕 교수가 돌아왔다. 이렇게 반가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힘찬 목소리가 터졌다.
“예, 선생님.”
“어이쿠! 살살 좀 대답해라. 나 나이 먹었어도 아직 잘 들려. 이놈들이 노인네 취급을 하네. 지훈아, 치프야, 그러면 안 된다. 안 돼. 알았지? 왜 대답을 안 해? 치프야, 경석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거니?”
웃음이 터졌다. 표시는 별로 안 나지만 이준영 교수도 분명 웃고 있었다. 짐짓 화난 표정을 짓던 송재덕 교수가 동네 아저씨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아. 아! 살맛 난다. 살맛 나. 전종훈은 싹 잊고 그놈이 한 짓만 잘 기억하자. 앞으로 우리 잘해 보자. 지훈아, 그러니까 너 대장 하자. 대장. 좋지? 그치?”
어김없이 대장 소리가 나왔다. 다들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송재덕 교수의 말 덕분에 분위기까지 돌변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동료의 불행을 기뻐할 사람은 없다. 하기에 일종의 미안함과 거북함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젠 명확해졌다.
‘그래. 전종훈에게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질 필요 없어. 그 사람이 한 행동과 결과만 잘 기억하면 돼.’
은근히 가슴이 시원해졌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에 잊고 있었던 배고픔이 다가왔다.
그때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슬그머니 이준영 교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왜? 환자 있어?”
“예. 교통사고 환잔데 빤뻬리가 의심된답니다. 식사 못하셨으면 하고 오시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힐끗 시계를 본 이준영 교수가 별다른 표정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다. 너 안 먹어도 되면 바로 준비하자.”
이미 10시가 넘었다. 밥 먹고 할 거 다 하면 수술은 12시가 넘어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술부터 먼저 하고 끼니는 대충 때우는 것이 훨씬 속 편한 일이었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몸에 익은 것처럼 머릿속으로 수술을 그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그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수술 방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수술할 때의 마음가짐이야. 스승님도 집도를 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항상 강조해 오셨잖아.’
질환과 수술에 관한 제반 지식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를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술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숙지하고 갖췄다고 해도, 집도의의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결국 실수를 초래할 것이다.
곰곰이 지난 경험을 되살리던 김지훈이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수술 창을 가급적 작게 내려고 노력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끝내려고 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섬세한 손까지 결국은 환자를 안전하고도 확실하게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전종훈 교수는 자신의 손과 지식만 생각했는지도 몰라. 부족하든 넘치든, 그걸로 충분했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겠지. 정도만 다를 뿐 나도 그랬을 거야. 수술에 매몰돼 정작 가장 중요한 환자를 뒤로 미뤘는지도 몰라.’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환자가 들어오는 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마취가 진행되고, 복부 소독을 하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처음 수술을 할 때처럼 내 자신과 환자를 두려워하자. 차분하고 겸손하게 환자의 몸을 대하자.’
모든 수술 준비가 끝났다.
이준영 교수가 마치 김지훈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퍼스트 자리에 섰다.
공교로운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전종훈의 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보이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입을 꽉 다문 채 길게 숨을 내쉰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긴장이 다가왔다. 마취과와 간호사들의 모습마저 다르게 보였다. 그들의 눈에 강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살짝 어깨를 흔든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됩니까?”
“시작하셔도 됩니다.”
“메스.”
무영등 불빛에 반짝이는 은색 메스를 받아 든 김지훈이 숨을 가다듬었다.
전에는 좀처럼 하지 못했던 생각이 들었다. 서두른다고 해도 몇 분 정도 빠를 뿐이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수술이 아니라면 차분하게 하는 것이 도리어 좋은 결과를 만들 것이다.
과감할 때는 과감하게, 신중해야 할 때는 신중하게.
내 몸만큼 환자의 몸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김지훈이 메스에 적당한 힘을 가했다.
정중앙을 따라 피부가 절개되며 빨간 피가 흘렀다. 전기 소작을 할 때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복막이 열리고 파열된 소장이 보였다. 익숙한 손길로 봉합을 하고, 타이를 했다. 동반 손상을 확인하고, 심지를 넣은 후 배를 닫았다.
스승과 제자는 조용히 서로에게 손을 맞출 뿐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물 흐르듯 진행된 수술이 끝났다. 세컨을 선 서도진이 좋다고 웃었다.
‘역시 김지훈 선생님이야. 금방 끝났네. 어? 뭐야? 벌써 12시가 훌쩍 넘었네? 근데 왜 이런 느낌이 들지?’
희한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지 않았으면 고개만 갸웃거릴 뻔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술실을 나가던 이준영 교수가 웃고 말았다.
‘녀석, 거칠다는 말의 의미를 이젠 확실하게 아는 것 같네.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눈에 보였는데 오늘은 확 달라졌어. 그래.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네 손은 충분히 빨라. 서두를 필요 없어. 지금처럼만 하자.’
저 밑에서 낑낑대며 달려오던 제자의 가쁜 숨이 이제는 가슴 어림에서 느껴졌다.
앞으로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았다. 그때는 얼마나 발전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문득 어젯밤 이혁원이 전화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저 정식으로 일반 외과 지원하겠습니다.’
하필이면 왜 지금 그 말이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동안 대화할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는데, 먼저 전화까지 하다니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우리 혁원이도 지훈이만큼 열심히 노력하겠지?’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전종훈의 빈자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며칠 후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 세상 열심히 살아야겠다.’
사람이 들고 난 자리에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전종훈도 분명 흔적을 남겼다. 다만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사람도, 좋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도 없을 뿐이었다.
악어도 마찬가지였다. 정형외과 전공의들 대부분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말이다.
인과응보다.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결코 쉽지 않겠지만 어느 자리에 있든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평범하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