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이제 다들 치프다 (1)
한두 푼이 걸린 문제가 아니다.
물경 150억이다. 더구나 두 달이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세무조사 무마 등을 내밀고 백제 병원 건물주와 적정선에서 타협을 한다면 80억과 100억 사이에서 결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밀이 샌 이상 중간에 어떤 놈이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건물주가 150억이라는 예산을 책정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물 건너갈 것이다.
반면 한 발이라도 먼저 움직여 계획대로만 된다면 최소 50억에 달하는 돈이 굴러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확실한 정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공하면 내 손에만 최소 25억 정도 떨어진다. 이걸 놓칠 수는 없지. 하지만 만일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은행 이자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질 게 뻔해. 어떻게든 이 문서의 신빙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해.’
대박 아니면 쪽박이었다. 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외과 센터를 실제로 추진한다면 여기저기서 그에 합당한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구축한 모든 인맥을 동원해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정황을 파악한 후 결정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그럴 시간은 불과 보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25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디서 조달하는지 몰라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수록 신동석 이사장의 몰락은 빨라진다.
이후 진평호가 재단을 접수한다고 해도 자신이 가진 병원 내 인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틈만 보이지 않는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시간은 충분히 얻을 것이다. 아울러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까지 모두 제거할 수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어수선하기만 한 8월의 마지막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금요일 저녁, 조촐한 식사 자리로 4년차들 환송식을 대신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치프다. 4년차들이 했던 역할을 모조리 3년차들이 해야 한다.
의국에 둘러앉은 3년차들이 제각각 생각에 잠겼다. 눈앞에 빨간 줄이 좍좍 쳐진 논문을 펼쳐 놓고 말이다.
‘이번 주까지 최종 논문 제출해라. 그래야 전문의 논문 쓸 거 아니가. 시간 없다. 빨리 내라.’
‘에휴! 이 정도 수정했으면 통과 좀 시켜 주시지. 끝까지 다시 쓰라고 하시는 건 뭐야? 이혁민 선생님만큼 깐깐한 분이 또 계실까?’
논문을 끄적이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구미 3개월과는 차원이 다른 부담감이 다가왔다. 4년차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엄청날 것이다.
담당해야 할 교수만 넷이다.
송재덕 교수, 오상익 교수, 구영선 교수, 임동완 교수.
다들 경력이 있기 때문에 2년차에게 수술을 맡길 교수도 없었다. 정말 시간이 없지 않는 한 모든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 자잘한 업무에 응급실 근무는 물론 전문의 논문까지 써야 한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지훈아, 강기웅 과장님과 괜찮게 살 수 있을까?”
가장 넉살이 좋은 손일석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강기웅 과장이 일이 년차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대충은 들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넌 모르지. 내 꼴만 나지 마라. 일주일이 지옥 같더라.”
“에이! 기대가 되면서도 너무 불안하네. 나의 이 화려한 말발과 뛰어난 실력으로도 정말 커버가 안 될까?”
피식 웃음만 나왔다.
“말로 잘 구워삶아 봐. 혹시 알아? 신세 펼지.”
“오케이! 내가 그쪽은 전문이니까 잘될 거야. 그나저나 너도 응급실 근무 신경 써라. 다음 달부터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니까, 재수 없으면 금경태나 전종훈에게 걸릴 수도 있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응급실 근무도 예전 방식으로 전환됐다. 송동화 과장이 이틀에 한 번을 서고, 다른 날은 교수들이 차례대로 번갈아 가며 당직을 서는 방식이었다.
사실 김지훈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많았다. 일단 내내 걱정거리였던 이준영 교수의 체력적인 부담이 확 줄어들 것이다. 또한 여러 교수들과 수술을 하다 보면 다양한 방식을 접하게 되는 만큼 배우는 것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손일석이 말한 문제만 빼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걱정이지만, 4년차 선생님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3년차 치프 때 이 많은 수술을 어떻게 다 감당을 했을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경석이 웃었다.
“야, 김지훈, 안 어울린다. 그런 걱정은 나나 일석이가 해야 하는 거야. 도리어 넌 조금 살살 좀 일해야 돼. 안 그러면 일 못한다고 우리가 욕먹어요.”
“어? 형, 내가 왜 걱정을 해야 돼요? 이런 망발을 하시다니, 혹시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이경석이 발끈하는 손일석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너 지금 노망이라고 한 거야? 음! 이 정도 화려한 언변이면 구미에서 살아 돌아오기는 글렀네. 넌 현수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항상 겸손하게 행동해. 이 형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까 잊지 마.”
“어후! 형, 겸손하면 나라는 거 잘 알면서 왜 이러세요? 차라리 악담이 낫겠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악담을 해 줄까?”
또 티격태격했다. 문득 나이 차가 꽤 나는데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같은 년차, 바로 동기의 모습이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김지훈이 논문에 집중했다. 영락없이 손일석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이때를 틈타 너 혼자 논문을 써? 치사한 놈! 으아아! 내일까지 제출하려면 꼼짝없이 밤새야 되네.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술 한잔 못하고 이게 뭐야.”
논문을 붙잡고 밤을 꼬박 새다시피 했다. 마지막 날 밤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어째 앞날이 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다음 날 모든 일과가 끝난 후, 이혁민 교수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하면서도 논문을 받아 주었다. 눈까지 시뻘게졌는데 안 그랬다면 미쳐 버렸을 것이다.
“오늘 근무를 끝으로 4년차들이 손을 놓으니까 이젠 니들이 치프다. 후반기에는 인원이 많이 부족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아랫년차들 잘 챙겨라.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니들이 일반 외과 치프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경석이 니는 총치프니까 특히 어깨가 무겁다. 내 기대한다.”
오늘따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래그래. 우리 치프들 다 잘할 거야. 경석아, 지훈아, 잘하자. 일석이는 구미 잘 갔다 오고. 지훈이 니가 내 파트지? 잘됐다. 잘됐어. 이참에 대장 하자, 대장. 이 교수 눈치 보지 말고 대장 하자. 대장 되려면 대장 해야 된다. 아 참! 오상익 선생님 수술 신경 써야 한다. 암! 그래야지. 신경 써야지.”
좋은 말인데 여전히 뭔가 어지럽다. 어쨌든 정식으로 치프가 된 3년차들을 격려하는 말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신기동 교수가 손일석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손일석, 너 구미 가서 제대로 일해. 내가 못 본다고 농땡이 치면 죽는다.”
“예? 선생님, 제가 언제 농땡이를 부렸다고.”
신기동 교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하여튼 죽기 살기로 배우고 일해. 알았어? 송재덕 선생님 말씀대로 대장 돼야 할 거 아냐?”
노골적이었다. 3년차 중 가장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직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손일석이 내 제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황했던 손일석의 입이 쭉 찢어졌다.
“손일석, 치프는 좀 무거워야 되지 않겠어? 쯧!”
그 순간 웃음이 싹 사라졌을까?
그렇긴 한데 좋아서 웃음을 참느라 주먹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김지훈도 슬며시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음성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준영 교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너무도 감사하기에 도리어 이번만은 한마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정식으로 치프가 됐는데 덕담이라도 안 해 주시려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스승이다. 그래도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건만 이준영 교수는 넓은 등짝만 보이고 사라졌다. 무뚝뚝함 속에 누구보다 뜨거운 감정을 가졌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은근히 서운했다.
‘이젠 청말 치픈데.’
드디어 토요일 근무가 끝났다.
유석재가 아쉬우면서도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홍재순은 지난 3년 반 동안 지내 온 의국을 감개무량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김지훈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훈아, 고맙다. 니 덕분이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한 일이 왜 없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누가 보면 어디 멀리 가시는 줄 알겠네요. 전문의 시험 볼 때까지 4년차 의국에 계실 거면서 왜 이러세요? 선생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손 놓았는데 무슨 심부름을 시켜? 너 막상 뭐 좀 부탁하면 욕하려고 그러지?”
“선생님, 그동안 쌓은 정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어요? 겸사겸사 그때 선생님들 얼굴도 보고 좋죠.”
“말이라도 고맙다. 석재야, 이제 가자. 시원섭섭하네. 다들 잘 지내.”
모두들 복도까지 따라 나와 배웅을 했다. 사실 건물만 다를 뿐, 4년차들 의국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그래도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그동안 꽤 의지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간다. 지훈아, 삼 개월 후에 보자. 니 이빨 악물을 거니까 조심해라. 경석이 형, 길 잘 닦아 놓을게요.”
손일석도 구미로 떠났다.
신현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경석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 경험은 훨씬 많았지만 병원에서는 같은 년차였다. 이경석도 걱정이 많았다.
“형, 형보다 총치프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순환 근무가 폐지됐어도 천안 일까지 다 관리해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어이구! 그래서 더 걱정이다.”
한숨 소리가 푹푹 울렸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전화를 받던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
(김지훈, 저녁 같이 먹자. 전에 밥 먹었던 식당으로 6시 반까지 경아하고 같이 와.)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힐끔 시계를 보니 벌써 4시 반이었다.
치프가 돼 스승과 하는 첫 식사 자리다. 더구나 고경아까지 함께한다.
“형, 나 저녁 때 잠시 나갔다 올게요.”
부랴부랴 숙소로 올라간 김지훈이 때 빼고 광을 냈다.
그날 저녁, 긴장되면서도 행복한 식사를 했다.
“치프는 단순히 최고 년차라는 소리가 아니야. 이젠 교수들을 대신해 환자를 책임져야 할 정도로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명심해. 그리고 언제 수술을 받을지 모르니까 매 수술마다 준비 철저히 해.”
“예,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딱 한마디를 끝으로 이준영 교수는 식사 내내 고경아와 대화를 이어 갔다.
“경아야, 수술실에서 힘든 점은 없어? 전 교수 때문에 힘들더라도 꾹 참아. 세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걸 이젠 잘 알지?”
“네, 선생님. 노력하고 있어요.”
“만에 하나 참기 힘든 일이 있으면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 언제든 말만 해. 부담 가질 거 없어.”
마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보는 것처럼 부드러운 눈빛에 목소리마저 따뜻하기만 했다. 게다가 얼마나 자상한지 팔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으으으! 이건 좀 심하신데.’
서운할 줄 알았는데 그게 더 행복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이준영 교수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눈가에 힘을 팍팍 주며 각오를 다졌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올 때쯤 신현수도 막 병원에 도착했다.
“차가 너무 밀리네. 별일 없었어?”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손이 바뀌는 주라 주말 오프가 없는 덕에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님에 현수까지, 오늘 희한한 모습 참 많이 보네.’
그동안 지낸 얘기를 나누던 도중 자연스럽게 금경태 과장에 관한 말이 나왔다.
“현수야, 금경태 과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이 꽤 지났는데 별말씀 없으셔? 요즘 행동이 이상하거든.”
이번 주 내내 금경태 과장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해야 할 일만 딱 하고서는 바로 사라졌고,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끔 마주쳤을 때도 평소와는 달리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음은 편했지만 의아하긴 했다.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는데 이상하네. 하긴 문제가 있는 일을 대충 넘기시는 분이 아니니까, 벌써 어떤 말이 오갔을지도 모르긴 해.”
특유의 차가움이 조금은 묻어 있었지만 말투까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표정에서부터 행동까지 의아할 정도로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그 차갑던 놈은 어디 가고 아주 정상적인 놈이 됐네. 정말 많이 변했어. 좋네.’
실실 웃는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갑자기 왜 웃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순간 옛날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 번에 자신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고친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왠지 그 모습이 더욱 정겨웠다.
“그냥.”
신현수의 등을 툭 친 김지훈이 교과서를 펼쳤다. 시간이 있을 때 월요일에 있을 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신현수도 곧 입을 다물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에 전종훈 교수까지 면면이 화려해 김지훈만큼 만만치 않을 것이다.
교과서를 읽던 김지훈이 힐끗 신현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입을 꾹 다문 채 환자 파악에 여념이 없었다.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차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야! 역시 현수 집중력은 알아줘야 돼. 좋았어. 지금부터 제대로 한번 가 보자. 한눈팔면 바로 치고 나갈 놈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돼.’
‘김지훈, 올해 안에 내 등을 보게 될 거다. 솔직히 너한테만은 정말 모든 면에서 이기고 싶다. 4년차 때 총치프는 내 거야.’
아마도 지금 이 시간 모든 3년차들이 흥분과 기대 속에서 각오를 다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훈과 신현수만큼 이를 악물고, 눈가에 힘을 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의 라이벌 두 명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정당한 경쟁을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빠지직! 보이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