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54화 (454/1,329)

제4화 휴가다?

스승과 장인이 될 사람의 말을 무슨 수로 거부한단 말인가!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아예 폭탄을 던졌다.

“진상미 환자 검사 다시 다 했으니까 확인해 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해 보고.”

“그래. 그 환자 희한하더라. 희한해.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해. 니가 만든 환자니까 잘 봐라. 잘 봐. 고성문 선생님, 바쁘시지 않으면 그 환자 진단하는 것까지 보고 가시죠. 지훈이 저놈이 그래도 제법 실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이 교수, 신 교수, 내 말이 맞지? 지훈아, 이참에 대장 하자, 대장. 고성문 선생님이 되게 좋아하실 거다.”

고성문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중한 휴가 중 하루가 또 날아갔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우워워워워!

‘대장이고 뭐고, 전 휴가란 말입니다.’

김지훈이 우거지상을 했지만 고경아를 빼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만에 만났다고 고성문과 교수들이 함께 우르르 사라졌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꼭 다문 고경아의 입술에서도 똑같은 기운이 물씬물씬 풍겼다.

단둘이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머릿속에 담아 봐야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이것저것 다 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일이다.

숟가락을 들다 말고 한숨만 쉬던 고경아가 그래도 밥은 먹어야 산다는 것처럼 열심히 수저를 놀리는 김지훈을 보며 눈을 흘겼다.

“지훈 씨, 지금 밥이 들어가요?”

“경아 씨, 진상미 환자 문제는 하루 이틀 내에 끝날 일이 아니에요. 내일 점심때까지는 아이 수술도 끝날 테니까 아버님께 환자 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끼리 휴가 가죠. 토요일 오전까지면 아직도 시간 많네.”

김지훈이 너스레를 떨자 고경아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어휴! 생각이 참 깊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 보면 정말 단세포야. 아빠는 그렇다고 쳐도 차는요? 차 열쇠가 원주 집에 있잖아요? 그러게, 갖고 나오라니까 왜 고집은 부려요? 집에 다시 가면 분명히 붙잡힐 텐데 바다는 언제 가요?”

따다다 속사포가 터졌다.

막 숟갈을 입에 가져가던 김지훈이 멍한 표정으로 고경아를 보다 힘없이 손을 내렸다.

오늘 아침, 차 열쇠가 왜 필요하냐며 두고 온 것이 이런 화근을 부를지 몰랐다. 그래서 마누라 될 여자 말은 꼭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차는 나중에 가져오고, 그냥 버스 타고 바다 갈까요?”

“아빠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맞는 말이다. 이래저래 장인어른의 손바닥을 못 벗어날 판이었다. 휴가 사라지는 소리가 마구 들렸다.

식욕이 싹 사라졌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한숨만 푹푹 나왔다.

힘없이 고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터벅터벅 병원으로 향했다. 한참 휴가를 즐겨야 할 시점에 의료봉사도 모자라 병원에서 자야 한다니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

의국으로 들어가는 순간 난리가 났다.

“지훈아, 너 가라는 휴가는 안 가고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일복이 하늘을 찌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너 정말 대단한 놈이다.”

“일석아, 말 시키지 마. 죽고 싶다.”

“내일 그 애 수술하게 되면 정말 니가 들어갈 거야?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릴 텐데, 그렇게 되면 휴가는 오늘로 끝이네.”

김지훈이 두 팔을 포개며 머리를 묻었다. 손일석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근데 제수씨하고 같이 온 분이 설마 제수씨 아버님이야? 도진이 말로는 둘이 똑 닮았다는데 맞지? 너 혹시 제수씨 집에 인사 간 거야?”

“몰라도 돼, 인마.”

눈치가 백단인 손일석이다.

“이 자식이 벌써 장가갈 준비를 다 하고 있었네. 여자만 있으면 바로 장가갈 수 있는 나는 왜 여자가 안 생기지? 하늘은 정말 불공평해. 아 참! 제수씨 아버님하고 교수님들이 서로 아는 것 같다는 소리는 또 뭐야?”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시끄러워, 인마. 가뜩이나 성질 나 죽겠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조용히 하고 일이나 해. 도진이 이 자식은 환자는 안 보고 나만 본 거야?”

김지훈이 짜증을 부리며 휙 의국을 나갔다.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을 거다. 휴가 중에 환자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수술까지 들어가야 한다면 난 벌써 목매달았다. 불쌍한 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숙소로 향하려던 김지훈이 갑자기 스테이션 앞에서 멈췄다. 남은 휴가라도 확실하게 가려면 한시라도 빨리 진상미 환자를 파악해야 했다.

훅훅 숨을 내쉬며 가슴을 진정시킨 김지훈이 차트와 검사 결과를 찾았다.

의아해하는 간호사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몰라도 이준영 교수의 진료가 없는 월요일에 입원했다. 오늘까지 사흘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한 상태였고, 단 한 곳의 이상도 없었다. 정신과는 건강 염려증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진단을 내리고, 지속적인 투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정신과 진단부터 검사 결과까지 예전하고 다 똑같네. 그런데 왜 항상 같은 위치에서 반사통이 나타나지?’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만일 육체적 이상이 없는 건강 염려증과 우울증이 확실하다면 통증을 느끼는 한 평생 동안 쫓아다닐 환자였다. 전종훈 교수의 무성의에 너무 성급하게 접근했는지도 몰랐다.

눈가를 비비며 갑갑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진상미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이라도 해 볼 일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진상미가 새우등을 한 채 전화기를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자칫 침대에서 떨어질 것처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급히 다가갔다.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

진상미가 정신없이 소리쳤다.

“선생님, 저 많이 아파요. 진통제 좀 주세요. 빨리요.”

“알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전에 진찰부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전과 똑같은 위치에서 전형적인 반사통이 감지됐다. 진통제를 주고 난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다시 촉진을 했다. 반사통이 점점 약해지긴 했지만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확실히 배 속에 뭐가 있어. 도대체 뭐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잖아.’

이제야 정신이 든 진상미가 김지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휴가 중인 의사가 한밤에 나타나 자신을 진찰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요일에 입원을 하셨네요. 많이 아프셨어요?”

“네. 지난 주말부터 갑자기 증상이 심해졌어요. 이제는 서너 시간마다 통증이 오는 것 같아요. 선생님, 하자는 검사는 다 했는데 뭐가 좀 나왔나요?”

진상미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사 결과를 물어보았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이준영 교수와 먼저 의견을 나누어야 했다.

양해를 구하고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진상미가 전에 없이 강한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스테이션으로 가던 도중 윤재철까지 만났다.

재빨리 안부 인사를 한 후 돌아서려고 했지만, 윤재철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자신의 병에 대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김지훈 선생, 밤늦게 미안해. 뜬금없는 말이지만 혹시 외과 센터가 절실하게 필요한가? 자네 생각은 어때?”

의아한 질문이었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과 센터요? 저희 입장에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의사들이 편한 것을 떠나서 환자를 훨씬 빠르게 볼 수 있고, 그만큼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

“별일 아니야. 귀한 시간 내줘서 고맙네. 근데 방금 전에 환자를 보고 나온 것 같은데, 자네 휴가 아니었나?”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병실로 돌아가던 윤재철이 힐끗힐끗 뒤돌아보았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스테이션과 의국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응급실은 지금도 환자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정말 열심히들 일하네. 그나저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만 휴가 때까지 병원에 와서 환자를 보다니 대단하네. 저런 열정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나중에 현수하고 힘을 합치면 제대로 일을 내겠어. 외과 센터라! 백제 병원이 최적의 입지란 말이지.’

앙상해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던 윤재철이 눈빛을 굳혔다.

그 시간, 김지훈이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소장 결손(Small Intestinal Atresia).

선천성 기형이 으레 그렇듯 상당히 위험한 질환이었다. 수술도 어렵지만, 수술 후에도 장시간 치료를 요했다.

여러 가지 타입이 있지만 다발성 결손은 그중에서도 특히 예후가 나빴다. 신생아에겐 치명적인 단장(短腸) 증후군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발성 결손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차근차근 수술 방법을 확인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더구나 복통의 빈도와 정도가 심해진 진상미 환자도 고민거리였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난 뒤에야 숙소 불이 꺼졌다.

***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소아과 중환자실에 들른 김지훈이 다소 긴장된 표정을 보였다. 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작은 아기가 코 줄 때문인지 배냇짓을 하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생후 일주일 된 남자아이. 연철희

의심 진단 : 소장 결손

침대에 달린 환자 표를 보는 순간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주일이라는 단어가 눈에 박혔다.

잠시 연철희의 손을 잡아 주던 김지훈이 차트를 확인했다.

이미 소아과에서 수술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완벽하게 취한 상태였다. 일반 외과 의사에게 주어진 일은 수술을 통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는 것이다.

연철희의 상태를 확인한 후, 수술 방에 들어선 김지훈이 눈을 감은 채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그럴 일은 없지만 만일 어른이라면 수술 과정 자체는 간단했다. 결손된 부분을 확인하고, 남아 있는 장끼리 이어 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후 일주일이라는 사실 하나가 평범한 수술을 극도로 위험하게 만들었다.

어린아이들의 수술은 생후 6개월이 넘었거나, 혹은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이어야 한다. 그 이전에는 모든 면이 불안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마취까지 금해야 했다.

그러나 연철희는 불행히도 수술을 안 하면 살지 못하는 경우였다.

‘이번 수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동안 배운 모든 것이 다 핵심이겠지만, 특히 기술적인 면이 중요해. 그래야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안전하게 끝낼 수 있어.’

김지훈이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아이의 장은 볼펜보다 조금 클 것이다. 그렇게 가늘고 연약한 장을 손으로 이어 준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결손된 장만큼 소장의 길이도 짧아진다.

조그만 실수 하나가 소장을 더 잘라야 하는 상황을 야기할 수 있었다.

만일 소장의 길이가 지나치게 짧아진다면 아이의 인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성장이 더뎌지는 것은 물론 평생 동안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수술 후 회복 자체가 안 될 수도 있었다.

그게 바로 신생아 단장 증후군의 무서움이었다.

‘에이! 재수 없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자.’

강하게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적절한 긴장과 함께 손의 유연함을 유지하고자 애를 썼다.

곧 연철희가 도착했다.

고성문이 착잡한 얼굴로 보호자 뒤에 서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아이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가를 따라 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아이 아빠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 수술 잘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말도 위안이 될 수 없을 테지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고성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김지훈이 침대를 잡았다. 차마 아이의 손을 놓지 못하던 엄마가 수술 방으로 들어가는 자식을 보며 엉엉 울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고성문이 아이 엄마와 아빠를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 말고 미소를 지었다.

고경아가 성미경 간호사와 함께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반 외과 담당 간호사 중 가장 노련하기에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이 더 고마웠다.

‘경아 씨, 고마워요.’

‘지훈 씨, 수술 잘하세요.’

‘녀석들, 고맙다.’

어느 틈엔가 들어와 준비 상황을 보고 있던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지나치게 치솟았던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잠시 후, 김진호 교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마취를 시작했다.

조그만 아기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볼펜심처럼 가는 관이 기도에 삽입됐다. 너무도 여리고 작은 몸에는 인공호흡기조차 연결할 수 없다.

김진호 교수가 직접 조그만 공기 백을 잡고 조심스럽게 호흡을 유지시켰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김지훈과 시선을 마주친 이준영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어려운 수술일수록 서로를 믿지 못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김지훈은 이제 제자를 넘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동료 중의 한 명이 된지도 몰랐다.

“시작하자.”

정중앙을 수직으로 열었다. 7~8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손바닥으로도 가려질 조그만 배에는 너무도 큰 상처였다.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든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수술 중에는 절대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냉철해야 해. 그래야 수술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어.’

복막이 열렸다. 수술 전 코 줄을 꼽아 감압을 했지만, 아직도 상당히 확장된 소장이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재빨리 따뜻한 물을 적신 수술용 헝겊으로 소장을 감싸 한쪽으로 밀었다.

동반 기형의 유무도 중요했지만 이번 수술에서는 결손 부위부터 찾아야 했다. 장 결손으로 인한 폐쇄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어디부터 확인해야 돼?’

휴가 때라고 대충 준비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대장과 소장이 연결된 부분인 회맹판을 찾을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했다.

일반적으로 확장된 소장을 정리하며 막힌 부분을 찾지만, 장 결손에서는 회맹판부터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보다 쉽고 빠르게 결손 부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의 말단 부위인 회장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늘고 약한 소장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음식물은 물론 장 내 가스조차 없어 바짝 달라붙은 채였다.

20센티미터 정도 확인했을 때 소장이 결손된 부분이 보였다.

순간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여기보다는 더 위쪽에 결손이 있어야 남은 소장이 적당한 길이를 유지할 텐데 큰일이네.’

이준영 교수 역시 심각한 눈빛이었다. 아무 말 없이 결손 부위의 장간막을 잡아당겼다. 확장된 채 배 속에 남아 있던 상부 쪽의 소장이 밀려오며 시야를 가렸지만, 워낙 작은 몸이었다. 거즈 몇 장을 이용해 부풀어 오른 소장을 옆으로 밀었다.

결손 부위가 끝나며 공장으로 짐작되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전히 바짝 달라붙어 납작하게만 보였다.

만약 결손 부위가 한곳이라면 위쪽의 장은 당연히 확장돼 있어야 한다.

김지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제길! 다발성 결손이네. 그래도 두 군데까지는 괜찮아.’

이준영 교수가 나직하게 혀를 차며 눈가를 찡그린 채 계속 소장을 확인했다.

곧 확장된 소장이 보였다. 공장부터 회장까지 소장을 길게 늘어뜨리고 병변을 모두 확인했다.

답답한 신음 소리가 흘렀다. 모두들 병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한 줄로 연결된 비엔나소시지를 늘어놓은 것처럼 결손 부위가 무려 세 곳이었다.

최악의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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