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52화 (452/1,329)

제3화 휴가다! (1)

휴가다!

전종훈 교수와의 일은 스승의 말 한마디로 모두 날려 버렸다. 후끈한 더위도, 꽉 막힌 길도 휴가가 주는 즐거움과 설렘을 막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가요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운전을 핑계로 먹을 것을 달라는 새끼 새처럼 입만 벌리고는 김밥을 받아먹었다.

그간 아껴 두었던 세로토닌이 마구 쏟아져 나오며 입안 가득 행복이 퍼졌다.

장장 4시간 만에야 원주에 도착했지만, 1시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깔끔한 모습으로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 절을 하고,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어서 와. 우리야 잘 지냈지. 잠깐만 기다려. 경순아, 경희야, 뭐해? 상 차리자. 김 서방 배고프겠다.”

최문옥이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저녁부터 차렸다.

고성문이 힐끗 김지훈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경아의 모습에 입맛만 다셨다. 반색을 하는 최문옥이나 식구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해. 뭐 대단한 놈 왔다고 이 난리야?”

“당신은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더니 왜 그래요? 하여간 사위들만 오면 왜 이러는지 몰라. 경아야, 김 서방 더운가 보다. 에어컨 좀 틀자.”

잠시 시끌벅적한 시간이 흐르고, 고성문과 김지훈만 달랑 남았다. 나직한 TV 소리만 흐르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경철이 이 자식은 집에 좀 있지, 어딜 간 거야?’

“아버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셨네요.”

“왜, 더 일하라고? 오늘 토요일이잖아? 나도 쉬어야지, 자네만 휴가 가라는 법 있어?”

민망한 말이었지만 물러날 때가 아니었다. 장인어른에게 점수를 따려면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터야 했다.

“아버님, 의료봉사는 어디로 갑니까?”

“따라오면 알아.”

“예, 알겠습니다.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럼 일요일은 쉬어야지. 그리고 왜 자꾸 아버님이라고 불러? 아직 허락한 적 없으니까 원장님이라고 해.”

“예, 아버님.”

고성문이 혀를 차며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지훈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자 슬며시 곁눈질을 하는 것 같긴 했다.

‘뻔뻔한 줄 알았더니, 이 정도에 아무 말도 못해? 에이!’

“그동안 수술은 뭐 했어? 간단한 거 말고.”

김지훈의 눈에 생기가 팍 돌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지만, 그동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이제 두 번째 인사를 하는 자린데 처음부터 조짐이 좋았다.

“예. 대장암 수술 하나 했습니다. 아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상행 결장 암이었습니다. 우측 대장 절제술을 했습니다.”

“대장암? 집도의가 누군데 그걸 자네한테 줬어?”

“이준영 교수님이라고 계십니다.”

“이준영?”

‘재덕이도 아니고, 깐깐하기론 둘도 없을 준영이가 대장암 수술을 줬어? 하긴 이제 곧 치픈데 받을 때도 됐지.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도 확실히 실력이 있는 건 맞는 모양이네.’

입을 삐죽거리던 고성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를 놓칠 김지훈이 아니었다.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려는 찰나 고경철이 들어왔다.

“어? 선생님, 아니 형, 언제 오셨어요?”

“응. 온 지 얼마 안 됐어. 잘 지냈지?”

“그럼요. 방학인데 신 나게 놀아야죠.”

고성문이 눈을 부라렸다.

“너 공부는 언제 할 거야? 자식이, 뼈 빠지게 일해서 대학 보내 놨더니 허구한 날 놀기만 하네. 넌 엄마 보기 미안하지도 않아?”

“아버지, 교양이라니까요. 방학 때까지 국영수 공부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년부터 열심히 할게요.”

“에라! 이놈아! 지금 안 하는 놈이 내년에는 퍽도 열심히 하겠다. 어이구! 내가 저놈을 왜 낳아서 속을 썩고 있나.”

아버지와 아들이 티격태격했다. 어느 집이나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무뚝뚝하고 엄하기만 한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느끼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리운 이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아버지의 엄한 말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잊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허해지면 몸도 허해진다더니, 부엌에서 솔솔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갑자기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딱 때맞춰 고경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철아, 상 펴.”

김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콤한 갈비찜, 시금치와 버섯이 어우러진 잡채, 시뻘건 국물에 보기만 해도 침이 도는 동태 탕, 달달하고 고소한 불고기, 잘 익은 김치, 싱싱한 쌈과 온갖 나물들, 김이 모락모락 나며 윤기가 좔좔 흐르는 갓 지은 밥.

잔칫집이 따로 없었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배 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정성이 깃든 음식 앞에서는 말이 필요 없는 법이다. 맛있게 잘 먹는 것만이 음식을 차린 사람에 대한 예의다.

김지훈은 그런 면에서 예의를 아주 잘 지키는 사윗감이었다.

“자네, 숨 좀 쉬면서 먹으면 안 되나? 걸신들린 것도 아니고, 요새 병원에서 밥 안 줘?”

“아이고! 맛있게 잘 먹는 사람한테 왜 그래요? 김 서방, 많이 먹어. 그동안 식사도 변변치 않았을 텐데, 갈비찜하고 불고기 좀 더 먹고.”

예뻐 죽겠다는 장모의 말에 기대, 끊임없는 장인의 눈치를 이겨 냈다.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말끔하게 발라 먹은 갈빗대가 수북하게 쌓였다.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향긋한 커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몇 마디 오가는 사이, 시계가 10시를 알리고 있었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전종훈 교수에게서 받은 스트레스에 무척 힘들었는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장모의 눈길을 뒤로하고 침대에 기어 들어갔다.

‘내일 일요일인데 뭐 하지? 경아 씨랑 근처에라도 놀러 가야 되는데, 분위기 좋은 곳이라도 있나?’

가족들과의 시간도 좋지만 둘만의 데이트는 더 좋았다.

잠깐 고민을 한다고 했는데, 마치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머릿속이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은 김지훈이 밤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죽은 듯 잠을 잤다.

휴가 이틀째,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부산한 소리에 눈을 뜬 김지훈이 더듬더듬 시계를 찾았다.

‘어? 10시가 넘었네.’

거의 12시간을 잤다.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간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 모두 바로 외출이라도 할 것처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경아가 쪼르르 달려왔다.

“지훈 씨, 잘 잤어요? 계곡 가기로 했으니까 빨리 씻고 나와요. 아침은 거기 가서 먹을 거예요.”

계곡?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휴가 때 말고는 갈 수가 없는 곳이 바로 계곡이다. 치악산 줄기가 사방으로 뻗은 원주니, 곳곳에 물 맑고 공기 좋은 계곡들이 즐비할 것이다.

달랑 돗자리 몇 개만 차에 싣고 출발했다.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달렸다. 아스팔트를 달구었던 후텁지근한 공기가 점점 시원하게 바뀌었다.

용수골!

계곡 이름인 모양이었다. 표지판을 보고도 20분쯤 더 달려서야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허름한 건물에 광택조차 없는 낡은 간판을 걸고 있는 식당이었다.

서곡 막국수!

빨간 양념에 약간의 육수를 더한 막국수의 매운 맛이 일품이었다. 강원도에서만, 그것도 정직한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감자로만 만든 감자전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곱빼기 한 그릇을 뚝딱 비운 후, 고경아가 남긴 것까지 먹었다.

고성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수술보다 먹는 데 더 소질이 있는 놈이었네.’

두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수라정!

계곡 물가에 설치된 평상에 앉아 닭백숙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시원한 맥주 한 캔씩 들고 계곡 물에 발을 담갔다. 발끝에서 전해지는 서늘함과 계곡을 따라 부는 바람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한 시간쯤 지나 시킨 음식이 나왔다. 곁들여 소주와 맥주를 비웠다. 음주에 능한 고경순 때문인지 고성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김지훈이 혼자 남은 틈을 타 재빨리 평상 구석에 누웠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렇게 잤는데 또 잠이 온다. 배는 부르고, 아직도 술기운은 코끝을 감돌았다.

내일도 휴가라는 사실에 즐거운 미소를 짓던 김지훈의 눈이 깜빡거렸다. 이내 나직하게 코를 골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소주 한 잔.

편안하게 누워서 쉴 수 있는 시원한 나무 그늘.

귓가를 간질이는 골바람과 물소리.

무엇을 더 바랄까?

이것이 바로 휴가다!

‘이놈이 이젠 아예 식구처럼 놀고 앉았네.’

“김 서방, 천천히 가도 되니까 더 자. 아이고!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으면 저리 피곤해할까? 여보! 우리도 맥주나 한잔해요. 이런 데 오면 술 한 잔은 해야죠.”

“운전은 누가 해?”

“술 깬 다음에 가면 되죠. 맥주 한 잔인데 어때요.”

이번에는 장인과 장모가 티격태격했다. 꿈결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정다웠다.

계곡에서 돌아와 이어진 평범한 식사는 더욱 좋았다.

어제 먹고 남은 음식을 싹 비우고 고경아와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속에 행복이 실려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휴가 3일째, 월요일 아침.

약속했던 4일간의 의료봉사를 시작하는 날이다.

하루쯤은 더 쉬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낼 말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고경아와 함께 고성문을 따라나섰다. 원주에서도 2시간은 달려가야 하는 동네였다.

해마다 찾아오는 곳인지 고성문과 마을 사람들이 반갑고도 친근한 인사를 나누었다.

간단하게 믹스 커피 한 봉을 마시고, 조그만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김지훈이 청진기를 꺼내며 눈빛을 굳혔다.

‘이왕 하는 일 즐겁게 하자. 경아 씨와 내게는 그래도 하루의 휴가가 더 있잖아.’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더운 열기가 쉬지 않고 땅바닥에서 올라왔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더위를 피할 겨를이 없었다.

환자는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골 노인들의 느릿느릿한 말에다 툭하면 옆길로 새는 통에 한 명을 보는 데도 꽤 긴 시간을 잡아먹었다.

돈을 벌 목적이 아니라 의료봉사이기에 그 긴 시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해가 머리 꼭대기를 지나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할 만하지?”

“예, 아버님. 어디나 아프신 분들은 참 많네요.”

“그래서 우리가 먹고사는 거야. 그러니까 농땡이 부리지 말고 한명 한명 정성을 다해서 봐.”

고경아가 눈을 흘겼다.

“아빠는 지훈 씨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오전 내내 한 번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환자만 봤어요. 지훈 씨, 빨리 밥 먹고 그늘에서 좀 쉬어요.”

“경아야, 너 아빠는 이제 안 보이는 모양이다.”

“보이죠. 왜 안 보이겠어요. 아빠도 쉬세요.”

은근한 신경전이다. 연인 입장에서 의료봉사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휴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니 말이다.

식사를 끝낸 김지훈이 고경아와 단둘이 그늘을 찾자 고성문의 눈이 번쩍였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딸이라지만, 다 큰 데다 보는 눈도 한둘이 아니다. 고성문이 왠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췄다. 별일 없을 것이다.

땀이 식자마자 오후 진료가 시작됐다.

하루 종일 본 환자는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청년 회장이라는 사람도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다.

1년차 때도 느낀 일이었지만, 젊은 사람에게 시골은 살기 어려운 동네인 모양이었다. 간간이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즐거웠다. 장모의 정성이 깃든 식사를 한 후, 고경아와 산책을 했다.

푹신하고 포근한 잠자리에 뒤척일 새도 없이 잠이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말이다.

“여보, 김 서방 어땠어요?”

“어떻긴 뭐가 어때? 성의는 좀 있는데, 의사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맡길 만한 정도야.”

최문옥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가며, 휴가도 이제 사흘밖에 안 남았다.

수요일 오전 진료가 끝난 후 고경아가 김지훈을 불렀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고경아와는 달리 김지훈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매일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다.

“휴가 때도 환자를 보는데,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냥 다 좋네요. 경아 씨랑 함께 있는 것도 좋고, 어머님이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려 주는 것도 좋아요. 경아 씨, 아버님하고 나하고 정드는 것 같지 않아요?”

“아빠는 걱정하지 말아요. 겉으로는 저러셔도, 속으로는 지훈 씨를 마음에 쏙 들어 하고 계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오늘까지만 고생하세요.”

“고생은 무슨. 근데 오늘까지라니요? 내일까지 의료봉사 기간이잖아요?”

“이제 휴가라고 오늘까지 수, 목, 금 사흘 남았어요. 이틀 정도는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야죠. 나 바다 보고 싶어요.”

전에 없이 적극적이다. 너무도 반갑고, 고경아보다 더 원하던 일이었지만 걱정이 앞섰다.

넘을 수 없는 벽, 고성문을 넘을 자신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님한테는 뭐라고 하고요?”

“그건 나한테 맡겨요.”

뭔가 작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해하는 김지훈의 입술을 살며시 막으며 슬쩍 주변을 둘러본 고경아가 어깨에 기댔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 순간, 늑대 본연의 본능이 살아났다. 김지훈이 과감하게 입술을 포갰다.

깜짝 놀란 고경아가 버둥거렸다. 그러나 이내 뜨겁고 달콤한 키스에 몸을 맡겼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어떻게든 바다로 가는 거야.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목, 금 이틀이면 충분해.’

김지훈이 결의에 찬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담고 오후 진료를 시작했다.

고경아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장인어른에게 무슨 말을 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짐짓 모른 척 뒷짐을 지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경아 씨! 파이팅!’

고경아에게 힘찬 응원을 보낸 후 마음을 진정시켰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앞에 두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명 한명 정성을 다해 진료했다. 아픈 곳을 치료하는 것만큼 환자들의 호소를 들어 주는 것도 중요했다.

때론 질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 이어졌지만 김지훈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시간상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노인들의 입가에 걸리는 환하고 즐거운 미소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점점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가 마침내 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슬슬 오늘 하루도 정리할 때가 됐다. 책상을 말끔하게 치우던 김지훈이 서둘러 청진기를 다시 꺼냈다.

30살쯤 돼 보이는 여인이 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포대기에 아이를 감싸 안은 채였다. 가물에 콩 나듯 띄엄띄엄 본 몇몇 아이들을 빼고는 지금까지 본 환자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시간 충분하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제가 아니라 우리 아기가 아파서 왔어요.”

이제 생후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된 갓난아이였다. 젊은 사람조차 보기 힘든 곳에서 정말 생각도 못한 환자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아이 엄마의 얼굴도 아직 퉁퉁 부어 있었다.

그때 갓난아이가 분수처럼 토하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이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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