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처음인 것처럼 (2)
환자가 무사히 깨어나 병실로 올라갔다. 아직도 은근한 감격에 젖어 수술 수첩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톡톡 쳤다. 주말인 탓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교수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응급실로 향했다. 당직실 불을 환하게 밝힌 채 논문을 읽고 있던 이준영 교수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환자 있어?”
“아닙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김지훈이 신현수가 한 말을 차근차근 빠짐없이 그대로 전했다. 신동석 이사장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말에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알았다. 올라가 봐.”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지훈도 별말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당직실에서 나왔다. 이제는 굳이 구구절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떻게 보든 희한한 일이기는 했다.
‘금경태 과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 같으면 창피해서 먼저 그만둘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었으면 애초부터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겠지? 어쨌든 교수님들도 다들 아시게 될 텐데, 내일이 기대되네.’
왠지 싱숭생숭해진 김지훈이 밤새 뒤척였다.
날 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지만, 최소한 자신이 한 일에는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의사로서의 실력을 떠나 금경태 과장은 옷을 벗는 것이 당연했다.
***
월요일 아침,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일과가 이어졌지만 역시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이경석이 달라졌다. 동기들과 후배들을 보는 눈에서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치프들이 축하의 말을 건넬 때는 강한 책임감마저 보였다.
“지훈아, 경석이 형이 확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온몸에서 총치프다운 포스가 풀풀 풍기는 게 내공이 장난이 아니야. 역시 잘 뽑았어.”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 눈은 분명 이경석을 보고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입을 헤벌리고 있어? 뭐야?”
병원 내에서 김지훈이 좋아 죽을 만한 일은 십중팔구 환자 아니면 수술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손일석의 눈길이 차트 위에 놓인 환자 리스트로 향했다. 스으윽 훑어보는 순간, 수술명 하나와 날짜가 눈에 딱 들어왔다.
“어젯밤에 응급 수술 있었어? 상행 결장을 잘랐네. 이준영 선생님 당직이었으니까 고생 좀 했겠다. 불쌍한 놈. 어라? 근데 지금 이 웃음의 의미는 뭐지? 너 혹시?”
분명히 이준영 교수와 수술을 했을 텐데 웃고 있었다. 그럴 때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다. 손일석이 부리나케 환자 차트를 펼치고는 수술 기록지를 찾았다. 집도의란에 김지훈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김지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석아, 수술 수첩에 하나 올렸다. 메이저라고 표시까지 했어. 역시 수술은 행복이자 보람이야. 안 그래?”
손일석의 고개가 팍 떨어졌다. 김지훈이 가증스러워 보이는지, 급기야 입을 벙긋거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으! 이럴 수는 없어. 경석이 형은 총치프에, 넌 메이저 수술을? 말도 안 돼. 강호가 내게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하지?”
“손을 보긴 뭘 봐? 넌 이 형한테…….”
김지훈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금경태 과장이 올라온 것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거만하면서도 못마땅한 얼굴로 전공의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조금도 변한 모습이 없었다. 그동안 저질렀던 일이 신동석 이사장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반면 상황을 아는 삼사 년차들의 시선은 묘했다. 끝까지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였던 금경태 과장이 이제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다니, 참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었다.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차트를 보던 금경태 과장이 힐끔 김지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유석재, 3년차 총치프는 누가 됐어?”
“이경석 선생이 됐습니다.”
“이경석?”
꽤나 놀란 눈치였다.
‘김지훈도 아니고 이경석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가만, 이렇게 되면 내겐 잘된 일인가? 그래. 신현수의 입지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외과 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질 거야. 오히려 잘된 일이 분명해. 후후! 신동석과 신현수가 밤새 끙끙 앓았겠군.’
그동안 답답하기만 했던 상황이 하나둘 풀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과 다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못마땅해하던 정한득이 이제야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정한득이 백제 병원에 대한 심사 평가원의 실사와 세무조사를 기획할 것이다. 물론 건물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업자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세무조사를 빌미로 적절한 회유와 협박을 가한다면 병원장이나 건물주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자신들을 대리해 병원을 인수할 확실한 사람까지 확보했다. 이제 남은 일은 신동석이 건물을 반드시 인수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70억으로 후려친 후, 120억 정도에 팔면 최소 20억은 떨어지겠지. 그때까지는 꼼짝없이 신동석의 발을 핥는 시늉까지 해야 되겠군. 신현수는 적절하게 구석으로 몰면 되고 말이야. 그래야 내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절감하지.’
금경태 과장의 입가가 말렸다.
회진을 올라온 이준영 교수 일파를 보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코웃음을 칠 수 있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자신은 돈과 명예를 얻고, 밉보인 놈들은 1년 안에 모조리 옷을 벗게 될 것이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금경태 과장이 웃음을 흘리다 말고 갑자기 눈가를 찌푸렸다. 젊어서부터 들어왔건만, 그놈의 송재덕 교수의 말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경석아, 니가 대장이지? 대장. 그래, 대장을 하니까 대장이 된 거야. 암! 당연하지. 대장도 하고, 대장도 되고 좋다. 좋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에이! 교수 체통이 있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금경태 과장의 뒤통수에 송재덕 교수의 말이 끊임없이 박혔다.
“지훈아, 너 어제 수술 받았다며? 대장 받았지? 대장.”
“예. 아뻬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대장암이었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수술 수첩에 첫 번째로 올린 수술 아니니? 맞지? 내 말이 맞지? 그거 봐라. 넌 대장 해야 돼. 대장.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다. 지훈아, 대장 하자. 대장. 그리고 4년차 때 니가 대장 해라. 대장.”
송재덕 교수는 신이 나 하는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교수들 모두 웃고는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짓을 했다.
‘지훈아, 대장 소리 몇 번 했게?’
‘몇 번인데?’
손일석이 두 손을 활짝 펴고도 다시 손가락 4개를 더 폈다. 그새 같은 단어를 무려 열네 번이나 했다니 정말 대단한 반복이었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기쁘다는 표현인 데다, 대놓고 말을 했다가는 야야야!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교수, 경석이가 내 파트야. 내 파트. 알지? 거참, 잘 키웠네. 잘 키웠어. 이 교수,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화자찬을 해도 밉지 않은 송재덕 교수였다. 이혁민 교수가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이경석 선생, 열심히 해라. 그러면 좋은 결과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도 축하한다. 잘할 거야. 손일석, 너는 정신 좀 차려.”
“예? 저요?”
“그래, 인마. 수술 들어가서 만날 타는데 총치프가 될 수나 있겠어? 내가 잘못 키웠나.”
신기동 교수가 혀를 끌끌 차자 손일석이 정색을 했다.
“선생님, 저는 양보한 건데요. 정식으로 붙었으면 결과는 확실히 달라졌을 겁니다.”
“뭐가 달라져? 달라진다고 해도 지훈이나 현수가 됐겠지? 넌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죽는다. 알아서 해.”
“선생님, 그게…….”
“쯧! 이 자식이 늘라는 수술은 그대로고, 말만 늘었네.”
더 이상 버티면 피를 본다. 도망갈 때였다. 손일석이 목을 움츠리며 입을 꽉 닫았다.
이준영 교수 옆에 서서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 정말 즐겁다. 분위기가 만날 이랬으면 좋겠다.’
헛된 바람이 아니었다.
월요일 수술 참관은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만 했다. 거칠다는 의미를 되새길수록 조금씩 보지 못했던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요일은 이준영 교수가 수술을 하는 날이다.
예정된 라파로가 진행되는 내내 무섭게 집중한 보람이 있었다. 스승의 손을 더욱 자세히 본 것은 물론, 비록 연습이지만 양손을 쓰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수술 수첩에 또 하나의 수술을 적었다.
급성 충수돌기염.
수없이 한 수술이었지만 가슴이 뿌듯하기만 했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이준영 교수는 별말이 없었다. 왠지 서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자신감으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환자들도 순조롭게 회복됐다. 그리고 그동안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박평자 환자가 드디어 내과로 가게 됐다.
“선생님,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요?”
“에이! 앞으로 절 보시면 안 되죠. 외과 병동에는 절대 오시면 안 됩니다.”
“놀러 오는 것도 안 되나요?”
“그것도 안 됩니다. 치료 잘 받으시고, 가급적이면 병원과는 멀리하세요.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음! 혹시 퇴원할 때 들르실 거면 아주 잠깐은 얼굴 보여 드릴게요. 길게는 안 됩니다. 환자가 의사한테 정 붙이면 안 되거든요.”
농담인 듯 진담 어린 김지훈의 말에 활짝 웃던 박평자가 갑자기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럴 것이다. 목숨과 삶을 걸고 수술을 받았다. 항상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겨 냈다. 이제 한 고비를 넘긴 것뿐이라고 해도 지금보다 더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뜨거운 액체가 김지훈의 손을 적셨다. 그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한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박평자의 손을 꼭 잡았다.
‘혹시 다음에 보게 되면 이렇게 비쩍 마른 손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루 다섯 끼 이상 나눠서 골고루 드셔야 합니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요.’
박평자가 떠난 자리에 봉봉 한 박스가 남아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입도 열 수 없었다. 의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과 기쁨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 어느새 목요일 밤이 왔다.
걱정거리가 없는 덕인지 어느새 이혁민 교수가 준 논문을 거의 다 마무리했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 김지훈의 눈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훈아, 다 끝냈어?”
“응. 이번에는 반드시 통과한다. 이것도 퇴짜 맞으면 논문 쓰지 말라는 소리야.”
“언제 다 썼냐. 부럽다. 근데 너 요새 자신감이 너무 넘친다. 잘난 척하는 거면 욕이라도 해 줄 텐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우! 속 쓰려.”
자신도 모르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 붉히거나 찡그릴 일이 없었다. 수술실에서도 집도를 하든, 퍼스트를 서든 순조롭기만 했다. 간간이 시간을 내 고경아와 데이트를 즐기는 기쁨도 만끽했다. 매사가 이렇게 즐거운데 당연히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처럼만 가면 원이 없겠다.’
“그래? 난 옛날하고 똑같은 것 같은데 이상하네. 그건 그렇고, 금경태 과장은 아직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 같지 않아? 이사장님이 꽤 뜸을 들이시네.”
“지훈아, 조선시대도 아닌데 한순간에 사람 목을 치는 게 쉽겠냐? 그리고 아닌 말로 금경태 과장이 이사장님에게만 붙었겠어? 위아래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을 거다.”
예전이었으면 눈이 동그래져 궁금한 것을 물었을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우리 1년차 때 신장 이식 못한 환자를 생각하니까 니 말이 딱 맞네. 악어 큰아버지라고, 진 뭐라는 사람 있었잖아. 최소한 악어나 진상철 교수하고는 죽이 맞는다는 소리가 맞지?”
“야! 꼴에 3년차라고 김지훈 많이 발전했네. 여기까지 치고 나오면 도대체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강호에는 하오문밖에 없어?”
“많지. 그런데 정파는 고리타분하고, 마교나 사파는 기본적으로 나쁜 놈들인데 어딜 가겠니. 아! 결국 은거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나이에 김지훈이라는 시정잡배 한 놈을 못 이겨 은거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어이구! 맞춰 줬더니 아예 지랄을 해요.”
“어허! 지랄이라니, 말을 삼가시오.”
김지훈과 손일석이 오래간만에 시답잖은 소리를 해 대며 낄낄댔다.
한참 흥이 오를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박순용이 아니라 서도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 아니었다. 응급실이 도떼기시장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도진아, 무슨 환잔데 니가 노티를 해?”
(응급실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오늘은 천안보다 더합니다. 선생님, 그건 그렇고 윤서연 선생님 아버님 기억하시죠?)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그건 왜?”
(한 시간 전에 응급실로 오셨는데 사진이 좀 안 좋습니다. 장 폐쇄가 심하게 발생했습니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수술 후, 장 유착이나 밴드(Band)로 인한 장 폐쇄는 간간이 보는 질환이었다. 대부분 보존 치료로 회복되고, 일부에서만 수술을 요했다. 하지만 윤서연의 아버지인 윤재철은 경우가 달랐다.
위암으로 위를 모두 절제했다. 식도와 소장을 이을 수가 없어 평행 결장 일부를 잘라 식도와 연결했다. 그 탓에 소장과 대장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장 폐쇄가 발생했다면 많은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상태는?”
(바이탈은 괜찮은데 복통을 상당히 심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단 엘 튜브(코 줄)는 꼈고, 진경제 하나 투여했습니다.)
“잘했다. 바로 내려갈게.”
급히 응급실로 내려간 김지훈이 힐끗 주변을 살폈다.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윤서연에게도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의사를 떠나 딸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서연이는?”
“환자분과 같이 계십니다.”
“사진부터 보자.”
복부 사진을 확인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