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43화 (443/1,329)

제10화 처음인 것처럼 (1)

밤이 깊었다.

의국에 남아 있던 김지훈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파란색 커버에 싸인 전공의 수술 수첩.

새로운 논문 제목이 적힌 백지 한 장.

앞으로 최소한 50개 이상의 수술을 집도하고, 1년 내에 논문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 요건이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하면 될 일이었지만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논문은 차치하고 수술 요건만 채우는데도 일주일에 하나씩은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이 주는 의미도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더구나 그중 열 케이스는 메이저 수술이어야 한다니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전공의 때 진짜 메이저 수술을 받을 수가 있나? 옛날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거 아냐?’

사실 4년차 치프가 돼도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수술은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암 수술이나 다발성 장기 손상을 동반한 혈복강, 혹은 위장관을 크게 제거하는 수술 등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난이도가 있으면서도 가장 흔하게 받는 빤뻬리는 대부분의 경우 메이저 수술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일반 외과 학회도 그런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도 안 해 보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전문의 면허를 따는 것이 목표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김지훈의 꿈은 최고의 써전이 되는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해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암 수술이라고 받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고 믿었다.

굳은 각오를 다질 때였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좋아. 이왕 하는 건데 꿈은 크게 갖자. 현수나 일석이도 분명 똑같은 생각을 할 거야. 파이팅! 가자!”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른 김지훈이 주먹을 휙휙 휘둘렀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어후! 깜짝이야. 꼭 이럴 때 전화가 와요.”

박순용이었다.

아뻬가 의심된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갔다.

전공의 수술 수첩을 받았다. 지금부터는 집도한 수술을 모두 인정받는다.

혹시 오늘이 그 첫 기록을 하게 되는 날은 아닐까?

66세 여자 환자였다. 복부 비만이 유난히도 심한데, 압통과 반사통이 상당히 심했다. 아뻬가 이미 터진 지 꽤 됐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국소적인, 혹은 생각보다 넓은 범위에서 복막염까지 발생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수술의 필요성 및 위험성을 설명하고 이준영 교수에게 노티를 했다.

커다랗고 굵은 손으로 환자의 배를 촉진하며 병력을 세심하게 확인한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분, 이미 들으셨겠지만 맹장염이 강력하게 의심됩니다. 이미 터졌을 가능성이 높고, 경우에 따라서는 복막염까지 동반됐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수술하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 해야 합니까?”

“예. 바로 해야 합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환자분에게는 여러모로 위험합니다.”

으레 오고 가는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 후, 환자와 보호자가 동의를 했다. 박순용이 수술 스케줄을 내러 간 사이, 환자를 다시 촉진하며 나름의 수술 계획을 세우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복부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질 때마다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지는 것 같았다. 가장 흔한 이유는 아뻬가 터져 고름집이 만들어진 경우였다. 또는 감별해야 할 질환 중 하나인 맹장에 발생한 암일 수도 있었다.

이미 암이 원인일 가능성은 설명을 했지만 예전처럼 간략하게 언급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워낙 드물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감이 안 좋았다.

김지훈이 보호자를 찾았다.

“아까 간단하게 말씀드린 문젠데, 아주 드물지만 맹장에 발생한 암 때문에 급성 충수돌기염이 유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수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에 하나 수술 중에 암이 발견된다면 우측 대장을 모두 잘라야 합니다. 하지만 워낙 드물게 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알고는 계셔야 할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극히 드문 경우라고 해도 말을 한 것과 안 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통상적인 방어 진료의 일환이었지만, 환자나 보호자의 권리상 당연히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빼먹은 것이 없는지 확인한 후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이준영 교수가 들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다. 수술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뜬 김지훈이 수술 계획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준영 교수가 불쑥 들어왔다.

“수술 어떻게 할 거야?”

1년차 때나 들었던 말이었다. 이 말을 시작으로 수술 전후에 걸쳐 무지막지하게 탔지만, 2년차가 된 이후에는 거의 듣지 못했다. 더구나 가장 많이 해 본 아뻬였다. 새삼 다시 말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수술을 준다는 소리였다. 전공의 수술 수첩에 올릴 첫 번째 수술을 스승에게 받는다면 훨씬 의미가 클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의 얼굴은 도리어 진지해졌다. 즐겁고 행복한 일이 분명했지만, 결코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예, 스승님. 첫 수술을 했을 때처럼 두려운 마음을 갖고 수술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수술 계획을 설명했다. 마치 다시 1년차가 된 것처럼 진지했다.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아는 김지훈이 대견하기만 했다.

‘녀석! 정말 1년차 때처럼 꼼꼼하게 설명하는구나. 그 마음을 평생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흐음! 근데 이 녀석이 왜 암일 경우까지 설명을 하지?’

가물에 콩 나듯 벌어지는 경우까지 언급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3년차인 만큼 갖가지 경우의 수에 모두 대비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거칠다는 말 절대 잊지 마.”

“예, 선생님.”

마취가 시작됐다.

퍼스트 자리에 서는 이준영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박순용이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1년차에게 이준영 교수는 누구보다도 무섭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마취가 끝났다. 메스를 들어야 할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문 채 환자를 보았다.

정말 처음 수술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렸다. 어쩌면 지금부터 하는 수술이야말로 진정한 일반 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하는 수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이 더없이 신중해졌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사선으로 길게 절개를 했다. 환자의 복부 비만이 심한 데다 복막염에 대비해 수술 시야를 넓게 확보할 목적이었다.

흔한 말로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박순용과 인턴이 가장 큰 리트랙터로 복벽을 끌어야 할 정도였다.

거칠다는 말을 잊지 않은 탓에 더욱 조심스러워진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어후! 정말 두껍네. 복막염까지 발생했으면 정말 만만치 않겠어. 그래도 더 열 필요는 없겠지?’

제법 씨름을 한 끝에 복막을 열었다. 아뻬가 있는 부위를 확인하는 순간 큼지막한 덩어리가 보였다. 예상대로 아뻬가 터져 고름집을 만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고름집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아뻬를 찾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선생님, 매스(Mass:종물)가 만져집니다.”

“그래? 확인해 봐.”

김지훈이 양손과 수술 기구를 모두 이용해 능숙하게 고름집을 박리했다. 누런 고름이 새어 나오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석션과 거즈로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 종물을 확인한 김지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생님, 아무래도 암인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말없이 종물을 확인했다. 딱딱한 덩어리가 맹장과 상행 결장 사이에서 만져졌다. 주변의 임파선 몇 개가 커져 있었고, 탄력을 심하게 잃은 대장의 상태로 보아 암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경우 수술 원칙은 암에 준해 상행 결장과 소장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이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 이젠 이런 수술을 해야 할 때가 됐어. 지훈이 넌 그만한 자격이 있다.’

아무리 교육을 겸해야 하는 대학 병원이라고 해도 일이 년 차 때는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3년차에 전문의 시험을 대비한 수술 수첩까지 받은 상태였다. 더구나 김지훈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전공의였다.

이준영 교수가 보호자를 만났다. 잠시 후에 돌아와 그대로 퍼스트 자리에 섰다.

“진행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모습에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스승의 믿음에 분명한 답을 할 차례였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긴장감이 퍼졌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측 상행 결장부터 박리하겠습니다.”

수술이 이어졌다. 이미 사선으로 길게 절개된 복벽을 놔두고 중앙 부분을 또 절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절개 창을 7~8센티미터 정도 확장했다. 만족할 만한 시야가 확보됐다.

후복막에 반쯤 묻힌 상행 결장을 박리했다. 수술용 가위로 조직을 자를 때마다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왔다. 전기 소작기에서 울리는 특유의 기계음을 따라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이준영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꼼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김지훈의 손에서 문득 여유가 엿보였다. 마치 여러 번 해 본 것처럼 능숙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새 터진 충수 돌기를 포함해 맹장과 상행 결장이 모두 박리됐다.

“소장 동맥과 상행 결장 동맥 잡겠습니다.”

혈관을 다룰 때는 더없이 신중했다. 부챗살 모양으로 장간막을 박리하고 타이를 할 때는 정확함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소장까지 제거해야 할 부분을 모두 박리한 김지훈이 장기를 배 밖으로 꺼냈다.

‘그래. 절개 창을 연장한 경우에는 시야가 상대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잘라야 할 장기를 밖으로 꺼낸 후 자르는 게 원칙이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구나.’

따르륵! 따르륵!

장 겸자가 맞물렸다.

상행 결장과 소장 말단부를 자른 김지훈이 연결을 시작했다. 두 개의 손이 오가며 수처와 타이를 하는 사이, 어느새 연결이 끝났다. 깔끔하기만 한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3년차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도 애지중지하는 제자의 손이다. 함께 수술을 한다는 것이 즐거울 지경이었다.

배 속을 깨끗이 닦고 심지를 박은 후 마무리를 시작했다. 차례차례 배를 닫는 과정에서도 김지훈은 거칠다는 말을 상기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드디어 수술이 모두 끝났다. 두 시간 반이 조금 더 넘게 걸렸다. 빨리 끝났다며 좋아하는 마취과 전공의를 보던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웃고 있었다.

‘이 녀석이 또 날 놀라게 하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발전한 거야?’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그동안 수술 경험이 상당히 쌓인 덕이었다. 여기에 최근 고도의 난이도를 가진 췌장암과 직장암 수술에서 퍼스트를 서며 배운 것이 무척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지훈이 가진 무서운 집중력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승인 자신과 교수들의 말을 잊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 단단히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슬며시 고개를 흔들며 장갑을 벗었다. 김지훈의 입이 자동적으로 열렸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힘차고 활기찬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이준영 교수가 말없이 수술실을 나갔다.

순간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무언가 생각을 하다 말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선생님, 오늘 해 주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점점 뻔뻔해지는 김지훈이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직은 거칠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네 스스로 알아 가야 해. 내가 모든 것을 일일이 알려 줄 수도 없지만, 이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구나.’

전공의로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스승의 생각은 달라야 했다. 제자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마땅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김지훈이 더욱 발전할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알아서 따라올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조용한 수술실 복도를 울렸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김지훈의 고개가 푹 꺾였다.

오늘은 정말 모든 신경을 손에 집중시켰다. 의욕이 넘쳐 팍팍 앞서 나가려는 가슴을 꽉 누르며, 전 과정을 신중하고도 꼼꼼하게 했다. 잡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승의 반응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했다.

‘얼마나 더 지나야 스승님께 만족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거칠다는 말이 지금까지 들은 말씀 중에 제일 배우기 힘드네.’

조금은 답답했다.

하지만 이내 입이 찢어졌다. 전공의 수술 수첩을 펼치고 첫 번째 칸을 채우는 순간 날아갈 것 같았다. 그것도 스승에게 받은 수술이다. 더구나 메이저 수술이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집도의 : 김지훈

진단명 : 충수돌기염을 동반한 대장암

수술명 : 상행 결장 제거 및 회장과 상행 결장 문합술

드디어 전문의가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날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오늘도 그중 하루겠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마치 생일날 차려진 밥상 위의 미역국이 그날만큼은 확실히 다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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