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고요하니까 도리어 불안하다 Ⅰ (1)
그때 유석재와 홍재순까지 들어왔다.
“다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재밌는 거라도 있어?”
“선생님, 저거 보이시죠? 건물들 가린 차단막. 저게 단순한 공사가 아닙니다. 아주 큰 의미가 있더라고요. 이거 극빈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네.”
손일석의 호들갑에 홍재순이 인상을 썼다.
“너 별거 아니면 죽는다. 빨리 말해 봐.”
“에이! 선생님, 별거면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정말 깜짝 놀랄 일이라니까요.”
“건물 공사하는데 부수지 않으면 새 건물처럼 만드는 거 말고 무슨 의미가 있어?”
“에헤! 선생님, 그럼 저렇게 동시다발로 공사를 하지는 않겠죠. 그리고 건물 위치가 병원하고 묘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보였다.
본관과 별관 뒤쪽, 혹은 모자보건센터에서 보면 옆쪽으로 사오 층 건물 5개가 있었다. 각기 다른 규모였지만 제법 큰 건물도 있었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모조리 공사용 차단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유석재가 뭔가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석아, 들은 대로 빨리 얘기해 봐.”
총치프의 말이다. 손일석이 즉각 반응했다.
“예, 선생님. 제가 듣기로는 저 건물들을 개조해서 내과 소화기와 신장 파트를 옮긴답니다. 일개 파트가 아니라 모자보건처럼 센터로 만든다네요.”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센터로? 그럼 규모를 크게 키운다는 소리 아냐?”
“그렇지. 최소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은 커진다는 소리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모자보건센터도 곧 리모델링을 한다는 소문까지 있어.”
“그래?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산부인과하고 소아과 간호사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었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아주 구체적이야. 몇몇 파트는 리모델링 때 어디로 옮길지 한참 상의하는 중이라는 소리도 있어.”
역시 하오문주다. 크게 교류할 일이 없는 산부인과와 소아과에도 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공의가 아닌 간호사들 중에 말이다.
어쨌든 소화기와 신장 파트를 센터로 만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변화였다. 이는 내과가 3개로 늘어난다는 의미와 같았다. 단순히 숫자나 외형적 규모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모자보건센터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끄러미 공사에 들어간 건물들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소화기하고 신장 파트를 센터로 만드는데 우리 과는 뭐야? 사실 우리 과도 센터를 만들 정도의 규모가 되잖아요.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하고요. 다른 과 환자들하고 뒤섞이지만 않아도 응급 수술이 훨씬 빨라지지 않겠어요? 정규 수술 준비도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고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투덜거렸다.
과를 막론하지 않고 환자들이 몰려드는 응급실은 언제나 살얼음판과 다름이 없었다. 때론 가장 시급한 검사가 뒤늦게 나오기도 하고, 인턴들 역시 정신이 없으면 위중한 환자를 놓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과 센터가 생긴다면 병원이나 환자들 모두에게 유리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문제는 막대하게 소요되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내과 파트 중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센터로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경석이 혀를 찼다.
“지훈이 니 말이 맞긴 하지. 근데 우리 과가 돈을 못 벌어 주잖아. 뼈 부러진 사람 수술비가 아무리 싸도 아뻬보다 세 배 이상 비싼데, 우리 과 위주로 센터를 만들겠어? 정말 쌩쌩 돌아가지 않는 한 적자다, 적자. 내가 이사장님이라도 안 만들겠다.”
다들 씁쓸함에 말을 잃었다.
이경석의 말대로 일반 외과 수술은 적자다.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일반 외과 수가는 흉부외과 및 산부인과와 더불어 지나치게 쌌다. 내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환자 수와 각종 검사가 많기 때문에 약간은 만회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는 환자에게도 크게 불리한 일이었다. 병원은 비용을 보전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 비보험 항목들을 늘리게 된다. 결국 낮은 수가에도 불구하고 환자 개개인의 부담은 결코 줄지 않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경악스러운 의료보험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의료보험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의료보험 재정을 모두 국민 개개인의 부담으로 돌렸다. 엉뚱한 곳에 쓰일 예산을 아껴 애초 약속한 대로 재정의 일부를 투입한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병원이나 의사 개개인의 지나친 욕심까지 개입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반 외과는 저수가 체계의 중심에 있는 과이기 때문에 외과, 혹은 외상 센터는 꿈도 꾸지 못했다.
홍재순이 눈가를 찌푸렸다.
“솔직히 우리 아버님이 하는 병원도 수술 건수가 많지 않으면 얼마 못 버틸 거야. 지금은 무조건 환자 많이 보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하시더라. 특실이나 1인실 팍팍 늘리고 말이야.”
간간이 느껴 왔던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유석재가 뜻밖의 말을 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과 센터를 만든다는 말도 있어. 우리야 팔월까지 근무하고 끝이니까 해당 사항 없지만 3년차들은 볼 수도 있겠지. 기다려 봐.”
“어? 선생님, 정말이에요?”
“나도 확실하지는 않아. 전에 얼핏 이혁민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 희망인지는 몰라도 번듯하게 센터 하나 만들지 혹시 알아?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잖아.”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스쳤다.
신현수!
손일석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네요. 현수를 키우려면 외과를 키워야 하는데 돈이 문제겠어요? 과장보다는 센터장인 게 훨씬 유리하지. 거기에 나중 일이지만 친한 동기나 후배들을 다른 센터의 책임자로 앉히면 완벽하네.”
불합리한 일인지 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외과 센터가 생기면 나쁠 일은 없었다. 센터장이 금경태 과장처럼 진료 이외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만 쏟지 않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가만! 금경태가 가만히 있을까?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재수 없으면 스승과 교수들까지 다치는 거 아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유석재 선생님, 선생님 말대로 외과 센터가 만들어지면 이거 또 분란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분란?”
“일석아, 생각을 해 봐. 만일 외과 센터를 만들면 누군가 센터장을 해야 할 거 아냐. 근데 과장보다 힘이 좋은 자리를 금경태 과장이 보고만 있겠어? 내년에 소문대로 병원장이 되어서 센터장에 애먼 사람을 앉히면 우리 과로서는 도리어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혹시 교수님들한테 피해라도 가는 거 아냐?”
“그렇게 되나? 어멈! 그럴 수도 있겠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거 재수 없으면 우리 다 쫄딱 망하겠네.”
홍재순이 고개를 저으며 손일석의 머리를 한 대 쳤다.
“야, 인마, 망하긴 뭘 망해? 이렇게 큰 병원 이사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여기까지 유지해 왔으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능력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선생님들이 지금 손 놓고 마냥 보고만 있겠어? 믿어. 정 아니다 싶으면 나하고 지훈이하고 확 까발릴 거니까 두고 보자.”
“그 정도 갖고 될까요?”
“망하게는 못해도 발목은 잡을 수 있어. 전공의 논문 훔치고, 장례식장 이권에 관여한 사람이 병원장이 될 수가 있겠어? 그건 아니다. 지훈이 음성 보낸 게 의도적이었다는 증거만 있어도 인사 전횡까지 걸 수 있는데, 그게 안타까울 뿐이야.”
김지훈으로서는 내심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아쉬움과 함께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센터가 만들어지면 좋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공사 중인 건물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과 센터를 만들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응급실과는 물론 CT 등이 있는 방사선실과도 동선이 맞지 않았다. 도리어 시간만 더 걸릴 수 있었다.
제일 좋은 자리가 있긴 있다. 바로 학교 다닐 때부터 항상 어떤 환자를 보는지 의아해해 왔던 병원, 바로 백제 병원이 입지나 규모상으로 최적의 자리였다.
‘그 자리가 딱 좋은데 그대로인 거 보면 유석재 선생님도 잘못 아신 모양이네.’
가뜩이나 입이 쓴 상황이었다. 굳이 초를 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전공의들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나 때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홍재순 선생님,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그만 얘기하죠.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가 각오만 단단히 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지훈이 니 말이 맞다. 그만하자.”
“경석이 형, 근데 형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후! 하마터면 까맣게 잊을 뻔했다. 선생님, 마침 다 모였는데 시작할까요?”
유석재와 홍재순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석이 복사물 몇 장과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지훈아, 내일 수술 때문에 부탁할 게 있어. 내가 스테이플로 직장암 수술하는 걸 본 적이 없잖아. 비디오를 보긴 했는데 영 자신이 없네. 아무래도 경험자가 조언을 해 주면 좋겠지?”
“제가요?”
“그래. 선생님들도 퍼스트를 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설명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천안에서 함께 준비를 했던 홍재순과 손일석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약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우! 은근히 떨리네.’
하지만 3년차다. 치프들 앞이라고 해도 필요하다면 당당히 가진 지식을 말할 수 있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재빨리 복사물 내용을 확인했다.
“예. 그럼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술 영상을 보시면서 의문점이 있는 부분은 복사물을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스테이플을 이용해 항문을 보존하는 직장암 수술 과정이 담긴 테이프가 돌아갔다. 대장을 자르는 과정까지는 다른 수술과 다를 것이 없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앉아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스테이플을 사용하는 과정이 화면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이 부분부터가 중요합니다. 아시겠지만 직장을 제거한 부위가 상당히 좁은 상태에서 타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 경험상 다른 때와는 달리 내 쪽으로 당기는 방식이 아니라 항문 쪽으로 밀어낸다는 생각으로 타이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항문 쪽에 남은 직장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대장 파트를 전공하고 싶은 이경석의 눈이 번쩍였다. 단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서로에게 질문과 대답을 하며 이어 가던 수술 준비와 토론이 2시간이 다 돼서야 끝났다.
김지훈이 묘한 뿌듯함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경석도 같은 기분인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야! 지훈이 니 덕분에 부담을 한결 덜었다. 고맙다.”
“자식! 이제는 말도 청산유수네. 분명히 천안에서 같이 준비했는데 니 설명을 들으니까 왜 이렇게 낯설까? 내가 머리가 나쁜 거야, 아니면 뒷구멍에서 혼자 몰래 공부한 놈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공부를 하긴 뭘 해? 다 했던 얘기야, 인마.”
“그래. 그럼 내 머리 탓이구나. 제길!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큰일 났네. 경석이 형, 형은 내 말을 이해하죠? 우린 같은 과잖아요.”
손일석의 말에 이경석이 눈을 부라리자 다들 웃었다. 김지훈도 따라 웃다 말고 눈가를 찌푸렸다.
‘수술을 준비하고, 결과를 토론하는 과정이 즐거우니까 얼마나 좋아. 과장이라고 만날 얼굴만 구기고 있으니 집담회 분위기가 엉망이지.’
금경태 과장 생각이 나 잠시 갑갑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내일 역시 수술을 들어간다. 아주 드문 수술이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수술이었다.
더구나 비록 세컨이지만 송재덕 교수와 이경석의 손을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불행히도 라파로는 기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칠다는 말을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꽉 잡아야 했다. 이상하게도 최근에 와 이준영 교수가 당직인 날에는 응급 수술이 뜨지 않아 더욱 그랬다.
‘요새는 불안할 정도로 너무 조용하네. 근데 스승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지?’
‘오프 잘 갔다 왔어?’
3년차가 되도록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컨설트를 보고 난 후 갑자기 물어보는 바람에 지나쳤지만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무뚝뚝함 속에 숨어 있는 다정함을 드러낸 것일까?
‘어쨌든 좋은 일이야.’
김지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