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31화 (431/1,329)

제4화 허락만 해 주신다면 뭘 못하겠습니까? (1)

긴장해야 하는 놈은 딱 하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고성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결국 크게 웃고 말았다.

‘준영이가 오늘 인사 온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붙잡고 수술을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이 거칠다고 심각하게 지적을 했을까? 이제 3년차인 놈이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라니, 참 대단하고 대견하네. 재덕이가 애를 탈 수밖에 없겠어. 아암! 내 사윈데 당연하지. 가만? 그럼 금경태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야?’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눈썹까지 꿈틀거렸다.

서울과 원주라는 지리적 문제 때문에 잦은 교류는 없었지만, 학회에서 만나거나 간간이 전화를 한 덕에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금경태 역시 잠시나마 트레이닝을 함께한 후배였다. 비록 반년에 불과했지만 어떤 사람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준영이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내 사위에게 분풀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불안해. 그동안 하는 꼴을 봐서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언제 시간 내서 술도 살 겸 겸사겸사 다들 만나 봐야겠어. 금경태, 너 조심해라. 내 사위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

집으로 가는 내내 김지훈을 사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고성문은 깨닫지 못했다.

즐거움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시간, 김지훈은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미 11시가 넘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 직전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면 바로 잠이 들 것 같은데도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실까? 따뜻하게 맞아 주실까?’

고경희와 고경철을 봐서는 그럴 것 같았다.

꼭 그래야 했다.

최문옥이 묵묵히 옷을 갈아입는 고성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휴!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알아요? 김 서방을 집에 데리고 올 거면 미리 연락을 줘야죠. 된장찌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전화 한 통 달랑 하고 와요? 그것도 10분 전에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김 서방은 누가 김 서방이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경아가 마음에 든다고 아무나 데리고 올 애예요? 당신도 얘기 듣자마자 여기저기 뻔질나게 전화해 놓고, 막상 김 서방 오니까 얼굴은 또 왜 그래요?”

최문옥은 아예 김지훈을 사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넙죽 절을 하는 모습도 그랬지만, 꾸밈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단정한 머리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고경아에게 들은 대로였다.

“당신하고는 질적으로도 달라요. 생각 안 나요? 우리 집에 인사 올 때 꾀죄죄하게 하고 온 것 말이에요. 요새라고 편할까. 시간이 없을 텐데도 저렇게 말끔하게 하고 오니까 얼마나 예뻐요?”

고성문이 욱하려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위 될 놈 욕을 해 봐야 그게 결국 어디로 갈까?

‘어이구! 그 꼴을 봤어야 하는 건데.’

“여보, 부모님도 안 계신다는데 쌀쌀맞게 굴지 좀 말아요. 사람만 좋아 보이는데 뭐가 문제예요? 솔직히 당신이 데리고 사는 거 아니잖아요.”

고성문이 눈가를 찡그렸다.

고경아에게 김지훈과 깊게 사귄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날로 전화기를 들었다. 송재덕 교수는 물론 무뚝뚝함의 대명사인 이준영 교수까지 김지훈에 대해서만은 호의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딸이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 부모 입장에서는 고아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고경아의 마음과 눈을 철석처럼 믿었다. 무조건 허락을 할 수밖에 없는 사윗감을 데리고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때문인지 김지훈이 도리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식당은 아예 예약하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집에 데려와 따뜻한 밥 한 공기 먹일 생각이었다.

이 역시 고성문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 빨리 된장찌개나 따뜻하게 내와.”

“미안해 죽겠는데 그놈의 된장찌개는 왜 그렇게 찾아요?”

“십 년도 넘게 집밥을 못 먹었을 거 아냐. 식당에서 사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비싼 고기보다 당신 정성이 깃든 밥을 훨씬 더 맛있어할 거야. 사람은 집밥을 먹어야 힘을 쓰는 법이야.”

이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애초에 미리 준비를 하라고 얘기를 했어야죠. 하여간 평생을 그렇게 숨기고 살아요. 마음이 좋으면 뭐해. 당장 사위 먹일 게 없는데. 이 시간에 뭘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찌개 넘치겠네.”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풀렸는지 최문옥이 핀잔을 하면서도 미소를 머금었다.

가족이 모두 상 앞에 뺑 둘러앉았다. 일이 바쁜 큰사위만을 빼고 모두 모였다.

최문옥은 차린 게 없어서 미안하다며 김지훈을 챙기기 바빴다. 고경희야 말할 것도 없었고, 고경철은 물론 고경순까지도 쾌활하게 웃으며 마음을 편하게 했다.

김지훈이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먹먹한 가슴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져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 옛날 그리운 이들과 함께했던 식사 자리 같았다. 더구나 이 늦은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자신을 기다렸다.

‘어머님, 아버님, 고맙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운 이들일까? 아니면 이제 그렇게 불러야 할 이들일까?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고성문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배고프다. 빨리 먹자. 자네도 들어.”

“예, 아버님.”

“왜 자꾸 아버님이야? 나 아직 허락 안 했어.”

그 순간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왠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아빠는 우리 남편 볼 때도 그러더니 왜 그래요? 지훈 씨, 원래 저러시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드세요. 우리 엄마 음식 솜씨가 최고거든요.”

그새 무슨 말이 오갔는지 고경순까지 엄지를 척 치켜들며 김지훈 편을 들었다.

고성문이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딸자식 키워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더니.”

“어머! 아빠는 우리 같은 딸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배고프실 텐데 빨리 식사부터 하세요. 참! 오늘 술 한잔해야죠.”

“술? 해야지. 우리 첫째 딸이 하자는데 해야지.”

어째 고성문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이 고경순에게는 쩔쩔매는 것 같았다.

식사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수저를 들다 말고 콧등을 찡그렸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된장찌개,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나는 하얀 쌀밥, 빨간 김치와 흔히 볼 수 있는 나물들, 그리고 이 밤에 급히 구운 것 같은 굴비 몇 마리.

한 집안의 평범한 식사였지만 장모와 가족들의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그 어떤 상보다 귀하게만 느껴졌다.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린 건 없지만, 배고플 텐데 많이 먹어.”

최문옥이 고성문을 살짝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왜 가슴이 찡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으며 된장찌개를 한 수저 떴다.

맛있다! 예술이다!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된장찌개와 밥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시장이 반찬인 탓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맛이었다. 순식간에 뚝딱 한 그릇을 비웠다.

사위 될 사람의 눈치를 모를 최문옥이 아니었다.

“김 서방, 밥 더 줄까?”

“예, 어머님. 꽉꽉 눌러 주세요. 너무 맛있습니다.”

“아이고! 이깟 된장찌개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우리 김 서방은 말도 예쁘게 하네.”

맛있게 밥 잘 먹는 사위를 좋아하지 않을 장모는 없었다. 최문옥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을 한가득 퍼 왔다.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다 비웠다.

고성문이 툭 불거져 나왔다.

“자넨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밥 먹으로 온 거야? 적당히 좀 먹어. 그러다 우리 집 쌀 다 축내겠어.”

“어머!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이렇게 맛있게 먹어 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알아요? 그냥 복이 굴러 들어오겠네. 김 서방, 밥 더 줄까?”

“엄마는. 지훈 씨가 돼지예요?”

“돼지면 어떠니? 우리 남편도 저렇게 잘 먹었으면 좋겠다. 엄마, 혹시 된장찌개를 다르게 끓인 거 아냐?”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들인 최문옥이 정색을 하자 웃음이 터졌다. 장모에게 사위란 자식 같으면서도 어려운 존재일 것이다. 김지훈도 덩달아 웃으며 슬며시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 고성문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을 식구로 대하고 있었다.

‘경아 씨, 이런 분들을 만나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사랑해요.’

무언가 따스한 것이 가슴을 꽉 채워 오는 것을 느낀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중한 것을 잃어 봐야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아는 존재가 사람인 모양이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식사가 끝났다. 이제 사내와 사내로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술자리가 남았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장인 될 양반의 눈치를 확실하게 판단한 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아야 할 때였다. 허락한다는 말을 반드시 들어야 했다.

“어머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버님, 좋아하시는 술 있으시면 제가 나가서 사 오겠습니다.”

“경순아, 뭐 마실래?”

“아빠, 항상 소주 마시면서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지훈 씨, 아빠는 딱 한 병만 마시시니까 1차는 경철이까지 각 1병씩 딱 5병만 비우죠. 경아야, 2차는 소양강?”

어째 쓰는 단어는 물론 병 단위가 나오는 것이 수상쩍었다.

고경아가 눈을 흘겼다.

“언니, 오늘만 기다렸지? 많이 먹지 마. 지훈 씨 오늘 하루 종일 일만 한 사람이야. 아빠까지 수술 들어오라고 해서 쉬지도 못했어.”

“알았어. 살살 먹을게. 근데 너 벌써부터 챙기는 거야? 내가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아빠, 그쵸?”

고경순의 애교에 넘어간 것인지 고성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사람이라도 싫으면 나도 반대야.”

흠칫 놀라던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하다. 술자리까지 남자들을 다 제치고 고경순이 앞에 나섰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였지만 발언권이 가장 센 사람일지도 몰랐다. 첫째 딸인 데다 결혼까지 한 탓일 수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집에는 소주 한 병 없었다. 장인은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집중적으로 공략할 사람은 장인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버님 분위기가 병원에서 볼 때랑 많이 다르네. 경희하고 경철이는 문제없으니까, 결국 장모님하고 처형한테 점수를 따야 하나?’

밤이 늦어 한참을 헤맨 끝에 고경철과 함께 소주와 안주를 사 왔다. 소양강의 정체도 알아냈다. 손님만 있으면 아침까지 문을 여는 실내 포장마차였다.

2차를 외치던 고경순과 난감해하는 고경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경철아, 처형 술 잘 마셔?”

“어휴! 말도 마세요. 웬만한 남자는 상대도 안 돼요. 매형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 오늘은 심하게 피곤한데 큰일 났네. 그리고 매형이라고 하지 말고 형이라고 불러. 나도 남동생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어? 그래도 돼요?”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고경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한 명은 확실하게 통과!

아직도 배가 상당히 불러 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술 배와 밥 배는 따로 있었다. 고경아와 고경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제사를 지냈지만, 소주 5병은 순조롭게 사라지고 있었다. 각 1병이 아니라 김지훈과 고경순의 잔만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부딪쳤다.

고성문이 입을 다물고 있어 처음에는 분위기가 다소 딱딱했다. 그러나 술이 갖는 본연의 위대한 힘 때문인지, 아니면 집안 분위기가 워낙 좋은 탓인지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김지훈을 마치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식구처럼 대했다.

“김 서방, 자네 태어난 시가 어떻게 돼?”

“확실하지는 않은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오 뉴스할 때 절 낳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엄마, 그런 건 나중에 물어봐도 되잖아요. 제부, 경아 요게 콧대가 보통이 아닌데 어떻게 꼬셨어요?”

김 서방에 이어 제부다.

고성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툭 치니까 넘어오던데요.”

“응? 정말? 경아야, 너 정말 그랬어?”

고경아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술김에 가족 앞이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명백한 실수였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재빨리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팔에 멍이 들도록 꼬집히고 말았다.

아무도 그 사실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김지훈의 비명 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어머! 진짠가 봐. 경아야, 제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은 거야? 허우대는 멀쩡해도 우리 남편보다는 못한데.”

“에이! 큰 형부보다 낫지. 일단 키가 더 크잖아. 그리고 작은 형부가 더 위트가 있어.”

이번에는 고경희가 고경순은 물론 고성문까지 자극했다. 고성문이 제부에 형부라는 소리까지 들리자 발끈했지만, 최문옥이 지그시 팔을 누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김지훈의 외모가 도마에 올랐다. 최문옥까지 여자 4명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더 취하기 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늘 원주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하지만 감히 누나들의 대화에 끼지 못한 고경철이 말없이 내미는 술잔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혹시 몰라 몇 병 더 사 온 소주가 다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고경순은 술잔을 놓지 않았다.

“제부, 나 잔 비었는데.”

술기운이 급격하게 올라왔다. 고경아의 목소리가 붕붕 뜨고, 눈이 감겼다. 내가 흔들리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젊은 놈이 무슨 술이 이렇게 약해? 재워라.”

“제부, 소양강 가야죠.”

“경순아, 잘난 네 아빠 때문에 지금까지 잠시도 못 쉬었다는데 어딜 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엄마는, 이제 시작인데.”

“언니, 잠은 자야 되잖아.”

딱 거기까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