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29화 (429/1,329)

제3화 가족, 그 그리운 이름 (1)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연습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김지훈입니다.”

힘차게 인사를 하고는 허리를 쭉 펴던 김지훈의 고개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김지훈의 위아래를 쓰윽 훑어보는 고성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떡이 진 채 착 달라붙은 머리.

자다 말고 허겁지겁 일어난 것 같은 옷 꼬락서니.

응급 수술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다고 해도, 첫인사에 이 모양 이 꼴로 나타났으니 그럴 것이다.

김지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흔들던 고성문이 끌끌 혀까지 찼다. 아주 웃긴 놈이라는 것 같았다.

“경아야, 3년차라고 하지 않았어?”

거의 울상이 된 고경아가 김지훈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아빠, 그게 응급 수술이 너무 늦게 끝나서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어요. 지금도 간신히 도착한 거예요.”

“너 벌써 편드는 거야? 됐다. 누군 저 생활 안 해 본 줄 알아? 1년차도 저 꼴보단 낫겠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가 꼬장꼬장했다. 원래 그런 것인지, 김지훈의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마치 지금 막 빤 것 같은 새하얀 가운, 그리고 새것처럼 반짝이는 금테 안경으로 보아 후자인 것 같긴 했다.

첫인상은 겉모습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두려움과 부담을 훨훨 떨치고 눈가에 힘을 주며 힘차게 말했다.

“아버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깨끗하게 씻고 오겠습니다.”

“뭐? 미리 깨끗하게 하고 왔어야지. 이제 와 씻으면 뭐가 달라지나? 됐으니까 나나 따라오게.”

고성문이 고개를 흔들며 응급실로 향했다.

“아버님,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됐다는데 뭘 그렇게 말이 많아? 그리고 누가 자네 아버님이야? 나 말고 누구 허락한 사람 있어?”

“예? 당연히 아버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네, 김칫국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 난 아직 우리 경아 준 적이 없어. 아니지. 사귀는 걸 허락한 적도 없어. 뭐해? 따라오지 않고.”

휙 응급실로 사라지는 고성문의 뒷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눈만 껌뻑거렸다.

홍재순과 이경석은 장인이든 장모든, 분명 반갑게 맞아 줄 것이라고 했다. 그게 백년손님인 사위를 맞는 처갓집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경아도 당황스러운지 얼굴이 빨개진 채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일단 입 꾹 다물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개인 병원이라고 해도 규모가 있어서인지 10여 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굼떠? 요새 트레이닝은 말로만 하나? 3년차도 전공의야.”

고성문이 혼자 중얼거리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 9시까지 퇴근 못하니까 여기서 알아서 해. 간호사, 아직 못 본 환자들 차트 좀 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많아?”

장인 될 양반이 응급실 환자를 보겠다는데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미 상당히 깎였을 점수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아버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보겠습니다.”

“자네가? 근데 왜 자꾸 아버님이라고 불러?”

“예?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김지훈이 겁도 없이 다소 볼멘소리를 했다.

“원장님이라고 불러, 원장님. 자네 이거 안 보이나?”

고성문이 가운에 적힌 원장이라는 글자를 탁탁 쳤다.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던 김지훈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환자는 제가 보겠습니다. 차트 이리 주시고 편히 쉬고 계십시오.”

동문서답에 끝까지 아버님이다. 고성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김지훈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 조금은 해결됐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구김살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면은 없네. 하긴 시집살이 안 하고 좋지, 뭐. 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벌써부터 경아를 줄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두고 볼 일이었다.

일하면 김지훈이다.

적응력 역시 김지훈이다.

꼼꼼하게 환자를 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대학 병원과는 상당히 다를 약제 이름들까지 꿰어 차고는 척척 오더를 냈다. 중간중간 환자 상태를 확인하며 필요한 조치를 했다.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고 했나? 환자 보는 자세나 태도가 상당히 좋은 것으로 봐서는 틀린 판단은 아닌 것 같네. 이럴 때 수술 환자 한 명 오면 재덕이나 준영이 말대로 실력도 뛰어난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아쉽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환자들에게 시선은 주던 고성문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근데 준영이 그놈이 많이 변한 거야, 아니면 저놈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야? 응급 수술 때문에 늦을 거라고 전화까지 다 하고 말이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에이! 그래도 그렇지. 이왕 전화까지 할 거면 닦을 시간이나 주지. 뭘 그렇게 꼭 확인할 게 있다고 인사하는 날까지 붙잡고 있어?’

고성문의 눈빛이 묘해지자, 지금까지 동동 발을 구르며 눈치만 보고 있던 고경아가 옆에 바짝 붙었다.

“아빠, 정말 좋은 사람이죠? 마음에 드시죠?”

“경아야, 환자 잘 보는 거 하고 사람 좋은 거는 달라. 좋은 의사가 좋은 남편은 아니라는 말이야. 아직은 한참 더 봐야 돼. 이 아빠가 우리 딸을 그렇게 쉽게 줄 거 같아?”

꼬장꼬장했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부드러워졌다.

“아빠! 인사까지 왔는데 왜 그러세요. 제 눈을 못 믿으세요? 저 아빠가 제일 믿는 둘째 딸 경아예요.”

“눈에 콩깍지가 꼈는데 네 눈을 어떻게 믿어? 아빠가 오케이 할 때까지는 손도 잡으면 안 돼. 알았지? 설마 너 벌써 진도 나간 건 아니지?”

“아휴! 아빠도 정말.”

갑자기 고경아의 얼굴이 빨개지자 고성문의 눈이 쫙 찢어졌다. 손만 잡았다고 해도 당장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태세였다. 김지훈에겐 환자를 보고 있다는 것이 천운이었다.

고성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순간, 응급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간호사들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경철아, 여긴 웬일이야?”

“아버지가 오라고 하셔서요.”

고경철이 한숨을 쉬며 고성문에게 다가갔다. 뭐가 마음에 그렇게 안 드는지 시무룩하던 고경철이 고경아를 보고서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왔냐?”

고성문의 목소리가 다시 꼬장꼬장해졌다.

“예, 아버지. 근데 왜 부르셨어요?”

“환자 어떻게 보는지 미리 보라고 불렀어.”

“어후! 아버지, 저 이제 예과 1학년이에요. 교양 배운다고요. 어후! 정말 죽겠네. 근데 누나는 혼자 여기서 뭐해? 오늘 매형 될 선생님 온다고 하지 않았어? 본과 삼사 학년 형들이 그러는데, 김지훈 선생님 되게 무섭대. 나한테도 그러실까?”

큰일 날 소리다.

고경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경철의 입을 막았다.

“경철아, 일할 때는 누구든지 다 그래. 사람은 정말 좋으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그런가? 김지훈 선생님은 어디 계셔? 아직 안 오셨어?”

고경아가 환자를 보고 있는 김지훈을 가리켰다. 막 병력 청취를 끝낸 김지훈과 고경철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고경철이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팍 굽혔다. 군대와 체대 다음으로 군기가 세다는 의대생다웠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성문이 투덜거렸다.

“에이! 실수했네.”

반면 김지훈에게는 복이었다.

‘니가 경철이구나. 반갑다.’

이것이 바로 물고 물리는 관계일까?

장인에게는 기가 죽고, 처남에게는 기를 펴고.

잠시 후, 응급실 환자가 모두 정리됐다. 환자들은 만족한 표정이었고, 간호사들 역시 눈을 반짝이며 김지훈을 보았다. 마치 과장들이 당직일 때보다 더 편하다는 눈치였다.

“특별한 환자는 없어?”

“예. 모두 경증 질환입니다. 한두 시간 정도 지켜보고 괜찮으면 집에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9시까지 제가 환자를 보겠습니다. 아버님은 들어가 쉬시죠.”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의외로 김지훈은 뻔뻔한 놈이었다.

혀를 차며 차트를 집어 든 고성문이 다시 한 번 환자들을 살폈다. 김지훈 말대로 감기에 단순 장염 등 경증 질환뿐이었지만, 참 세심하게도 환자를 보았다.

게다가 환자를 어떻게 보는지 배우라고 부른 고경철이 김지훈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아주 차렷 자세를 한 채 그렇게 예의가 바를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뭐가 불만인지 고성문이 입맛만 다셨다. 어쨌든 김지훈에 대해 조금은 알았다. 지금까지 송재덕 교수나 이준영 교수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자를 보는 눈과 사위를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위는 어쨌든 애지중지 키워 온 딸자식을 훔치러 온 도둑놈이다. 가운을 단단히 여민 고성문이 더욱 눈가에 힘을 주었다.

9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고,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응급실이었다. 수술할 환자를 보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침착한지, 또 환자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간접적으로나마 가장 중요한 인간성까지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성문이 간절하게 수술이 뜨기를 기다렸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응급실 문 앞이 앰뷸런스 경광등 불빛으로 번쩍였다.

순간 벌떡 일어나려던 고성문이 묘한 콧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간간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고경철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두르르르르!

간이침대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교통사고로 내원한 환자의 배를 만지고 청진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오더를 냈다. 아무래도 빤뻬리 같았다. 혈액 검사와 흉부 및 복부 사진과 CT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당직 과장님이 9시까지 오신다고 했나?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늦으시면 어떻게 하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오늘 중에 정식으로 꼭 인사를 드려야 해.’

환자가 적기 때문에 개인 병원 응급실 검사는 대학 병원보다 훨씬 빠르게 나온다. 고민하는 사이,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CT에서 다른 손상은 관찰되지 않았지만 진찰상 빤뻬리는 분명했다.

노티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아버님, 빤뻬리 같습니다.”

“거, 원장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에이! 환자부터 보자.”

고성문의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상하게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재야의 고수라고 불릴 정도로 노련한 일반 외과 의사답게 고성문의 판단은 빠르고 정확했다.

상당히 신뢰를 얻고 있는 병원인지 보호자와도 말이 잘 통했다.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환자를 안심시키는 모습에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어디에 있든 환자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거겠지?’

“자네는 어디가 손상된 것으로 보여?”

“증상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소장 파열 같습니다.”

“그럼 수술해야겠네. 지금 몇 시야?”

“8시 반입니다.”

“8시 반? 간호사, 수술 허락 났으니까 바로 준비해서 환자 올리자. 나 먼저 올라가 있는다.”

김지훈과 고경아는 물론 고경철도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수술을 들어가면 도대체 언제 정식으로 인사를 한단 말인가? 고경아가 발소리를 죽이며 달려갔다.

“아빠, 인사는요? 당직 과장님 곧 오신다면서요?”

“9시에 시간 맞춰 딱 온다는 보장이 없잖아. 경아야, 인사도 중요하지만 환자는 더 중요해. 우리 경아가 이해를 좀 해 줘야겠다.”

툭툭 고경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린 고성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급실을 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김지훈의 귓가에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넨 뭐해? 애들하고 놀고 있을 거야?”

그 한마디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이 났다.

졸지에 수술까지 들어가게 생겼다. 첫날 인사도 정식으로 하기 전에 응급실도 모자라 장인이 될 양반과 수술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기만 할 일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한숨을 푹푹 내쉬며 급히 뒤를 따르려던 김지훈이 머리를 탁탁 치며 간호사에게 코 줄과 소변 줄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개인 병원은 인력 부족으로 화이트 가운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고득점을 노려야 할 때였다.

“경철아, 이리 와 봐.”

당연히 자신의 뒤를 따라올 줄 알았던 고성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김지훈은 조심스럽고도 세심하게 코 줄과 소변 줄을 끼우고 있었고, 고경철은 그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우리 경아한테도 잘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도둑놈은 도둑놈이지. 근데 경철이 저놈은 내가 말할 때는 농땡이만 부리더니, 아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우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툴툴거렸지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었다. 사실 꾀죄죄한 꼴도 보기 좋기만 했다. 환자와 수술에 몰두하며 시간에 쫓기다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같은 상황에서 외과 전공의가 말끔하면 도리어 그게 이상한 일일 수도 있었다.

문득 전공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깔끔하지만 그땐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을 보고 있자니 젊은 시절의 기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재덕이, 준영이, 혁민이, 기동이. 그땐 스승님께 그렇게 혼나면서도 세상 무서운 줄 몰랐는데,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먹었네. 에휴! 그건 그렇고, 어디 너희들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자. 제대로 키웠으면 내 술 한잔 거하게 산다.’

고성문의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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