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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27화 (427/1,329)

제2화 첫인상이 중요하다 (1)

의아한 일이었다. 당연히 온갖 인상을 팍팍 쓰고 있어야 할 금경태 과장이 여느 때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눈가만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잔 것처럼 눈과 얼굴이 약간 벌게진 것 말고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유석재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도 나직하기만 했다.

‘스승님과 관련된 일은 감정을 못 감췄는데 정말 의외네.’

이준영 교수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무뚝뚝하기만 했다.

“김지훈, 환자들 별일 없지?”

“예. 특별한 환자는 없습니다. 박평자 환자도 무사히 잘 깨어났고, 아침에 시행한 검사 결과도 모두 좋습니다. 지금 상태면 내일쯤 병실로 올려도 될 것 같습니다.”

“벌써? 그 환자 대단하네.”

휘플을 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이번 역시 병실로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물론 괜찮겠냐는 말도 묻지 않았다. 이보다 강한 신뢰는 없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활짝 폈다. 스승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받는 것만큼 기쁘고 행복한 일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젠 수술에서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문득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고, 발걸음은 힘차기만 했다. 물론 회진 때까지만 말이다.

회진을 마치고 병동 일을 마무리한 김지훈이 참관을 하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수술을 보는 날이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거칠다는 말을 확인하기에 좋은 수술이다. 졸지 말자.’

고경아가 눈이 시뻘건 김지훈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12시간 동안 한 수술에 매달린 데다 꼬박 밤까지 새웠을 것이 뻔했다. 제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졸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술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던 김지훈의 무릎이 푹 꺾였다.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허둥거렸다. 송재덕 과장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지훈아, 너도 졸 때가 있구나. 가서 세수하고 와라. 세수. 아니다. 잠 좀 자고 와라. 오늘만 날이니? 수술은 또 있다. 또 있어. 자자. 푹 자자. 나 정신 사납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지만, 잠을 이기지 못한 김지훈이 휴게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수술을 끝내고 나온 전공의들의 부산함이 아니었으면 내처 잤을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던 김지훈이 크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어후! 이번에는 진짜 힘들다. 스승님은 괜찮으신가?’

이럴 땐 수술실에 또 들어가 봐야 의미가 없었다. 움직이는 게 최고다. 잠도 깰 겸 염성일 환자부터 찾았다.

“선생님, 저 언제 퇴원할 수 있습니까?”

염성일 환자의 물음에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이제 열이 떨어진 지 이틀째였다. 혈색도 좋고, 끼니때마다 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일렀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 줄은 언제 빼나요?”

배에 달린 T-tube가 불편하기는 할 것이다.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조금 더 갖고 계셔야 합니다. 앞으로 별문제가 없다면 삼 개월에서 육 개월 사이에 빼게 될 겁니다. 참으실 수 있죠?”

“참을 수야 있긴 한데, 뺄 때 또 수술을 해야 합니까?”

“아니요. 외래에 오셔서 바로 빼면 됩니다. 마취도 필요 없고, 아프지도 않습니다. 줄이 있던 자리는 저절로 잘 막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안도하는 모습에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환자가 자신의 몸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회복됐다는 소리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박평자 환자는 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과 온몸을 휘감는 무력함이 여전할 텐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나 많이 아프다는 티를 온몸으로 팍팍 내면서도 말이다.

김지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아이고! 환자분, 안 아프세요? 지금은 좀 편히 쉬세요.”

“선생님이 수술 후에 빨리 움직일수록 회복도 빠르다고 하셨잖아요. 걸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좋지 않나요? 흠흠! 나 우리 새끼들 때문이라도 빨리 일어나야 돼요.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거예요.”

자신의 건강에만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자식들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아주지 않을 뿐 엄마란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뭉클해진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며 그저 미소만 보였다.

“그런데 병실에는 언제 올라갈 수 있죠? 여기 있는 환자들 보면 불안해서 잠도 못 자겠어요. 흠흠! 기계 소리도 싫고요.”

코 줄을 끼고 있는 데다 수술 부위 통증으로 입을 열기조차 힘들 텐데, 캑캑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오늘 하루만 참으세요. 지금처럼만 유지하시면 내일이면 올라가실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이렇게 빨리 이겨 내실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죠. 흠흠! 수술 잘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환자의 말만 전적으로 믿으면 자칫 착각을 할 수 있다. 지나친 통증은 심한 스트레스를 준다.

김지훈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데메롤 하나 주세요.”

하루에 네다섯 번은 투여할 줄 알았는데, 박평자는 이제 두 번째에 불과했다. 훨씬 작은 수술을 한 환자도 이삼 일간은 진통제를 입에 다는 경우가 꽤 있었다.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얼마나 강한 힘을 낼 수 있는지 새삼스러웠다.

그 덕인지 어느새 잠도 달아나 있었다.

잠깐씩 졸긴 했지만 무사히 참관을 다 했다.

이경석과 치프들, 그리고 교수들의 손을 보며 거칠다는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찾으려 애를 썼다.

조금씩,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이준영 교수와의 수술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경아 씨, 피곤하죠? 어제는 잘 잤어요? 오늘도 다른 일 하지 말고 집에 가자마자 푹 자요.”

“지훈 씨, 내 걱정하지 말고 지훈 씨부터 챙기세요. 눈이 토끼 눈이에요. 그리고 토요일에 늦어도 두 시에는 출발해야 하는 거 잊지 말아요.”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며 서둘러 수술실을 나갔다. 그놈의 부담감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오후 회진을 준비하며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김지훈이 급히 자세를 고쳤다.

오후에는 교수들이 함께 올라오는 일이 드문데 오늘은 이준영 교수에 송재덕 교수, 그리고 금경태 과장까지 한꺼번에 올라왔다.

분위기는 뭐,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 교수, 다음 주 수요일에 지훈이 좀 빌려줘. 호치키스 있다. 호치키스. 이번에도 7센티미터다. 7센티미터가 뭐니. 힘들다. 힘들어.”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직장암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스테이플을 써야 하는 케이스였다. 구영선 교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병원에서도 처음이었다.

“경석이가 있는데 지훈이까지 들어갈 필요가 있나요?”

어?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들어가라고 해야 할 이준영 교수가 튕긴다.

송재덕 교수가 눈을 쫙 찢었다.

“백무용이 없잖아. 백무용이. 경석이가 퍼스트 서고, 지훈이가 세컨을 서면 딱 좋잖아. 아니면 외래 안 보고 이 교수 니가 들어올래? 너 혹시 지훈이가 대장 할까 봐 견제하는 거야? 그렇구나. 너 불안하구나. 암! 그래야지. 지훈아, 대장 하자. 대장. 호치키스 하자. 좋지? 너도 좋지?”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살짝 말렸다. 그러고는 슥 김지훈을 보았다.

“결정이야 지훈이가 하는 거죠.”

김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예.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때 아닌 농담 속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김지훈은 무조건 간담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의사이자 인간 본연의 자신감이었다. 췌장암 수술은 이준영 교수에게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수술하자. 수술. 근데 어렵다. 어려워. 니들이 잘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수술을 할 수 있어. 지훈아, 이참에 경석이하고 함께 대장 하자. 대장.”

그놈의 대장 타령에 이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준영 교수는 고개를 흔들고, 이경석은 김지훈의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분위기가 정말 끝내줬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구영선, 넌 뭐하는 놈이야? 이 정도 끌어 줬으면 니가 수술을 해야지. 천안에서 올라온 송재덕한테 그런 환자를 뺏겨? 제길! 되는 일이 없네.’

이준영 교수는 자신은 엄두도 내지 못한 췌장암 환자를 수술했다. 여기에 송재덕 교수가 서울 병원 최초로 직장암 환자의 항문을 보존하는 수술을 성공한다면 여파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들의 이름에 가려 라파로의 대가라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은 서서히 사라질지도 몰랐다.

금경태 과장이 이를 갈았다. 의사로서의 입지나 존재 가치가 떨어진다면 진평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과장님, 컨설트 하나 왔습니다.”

내과에서 온 컨설트였다. 당연히 라파로를 할 케이스였다. 그런데 간호사의 손에 두 장의 컨설트가 더 들려 있었다.

“그건 뭐야?”

“이거요? 이준영 선생님께 온 컨설트예요.”

힐끗 진단명과 의뢰한 교수의 이름을 확인한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양승철 교수와 원관식 교수가 이준영 교수에게 나란히 환자를 의뢰한 것이다.

그것도 라파로를 해야 할 담석증이었다. 애써 찾은 냉정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양승철 교수는 몰라도 원관식 교수가 벌써 이럴 수는 없었다. 믿었던 의사들에게 발등을 찍히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이를 악물어도 치미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원관식, 너까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깟 췌장암 환자 하나 수술했다고 내게서 등을 돌려? 너도 끝이야.’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돈과 출세만을 향한 유혹으로는 동료들의 진정한 믿음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금경태 과장 스스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둘 다 라파로 케이스네요?”

“그래? 역시 이 교수 실력을 알아주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간담도 쪽에서는 이 교수만 한 의사가 없지. 암! 없고말고.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그치? 지훈아, 내 말이 맞지?”

김지훈과 송재덕 과장의 목소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들으라고 한 말 같았다. 전공의에 불과한 김지훈까지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눈이 뒤집힌 금경태 과장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금경태 과장이 나직한 신음을 터트리며 돌아섰다. 회진이고 뭐고 당장 대책부터 고민할 일이었다.

“유석재, 내가 일이 있는 걸 깜빡했다. 회진은 너희들끼리 돌아.”

“과장님, 컨설트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수술 창에 염증이 생긴 환자가 과장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상처에 난 염증까지 신경을 써야 돼? 유석재, 너 치프야.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야지. 컨설트도 급할 거 없어. 내일 아침에 봐.”

외래로 향하는 금경태 과장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간담도 환자는 혼자 수술을 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저렇게 기분이 나쁠까? 상처에 염증이 생긴 게 아무리 별일 아니라고 해도 그건 의사 생각이지. 환자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걸 모르나? 환자만 열심히 보면 과장이 아니라 그 이상의 대우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눈에도 환자에 대한 정성이 없는데 교수님들이나 환자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장 최우선으로 두어야 할 환자가 안중에도 없었다. 점점 금경태 과장의 실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라파로 실력 빼고는 단 하나도 배울 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 타산지석(他山之石)!

옛말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을 보며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단, 결코 따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염성일 환자는 퇴원 날짜를 받았고, 박평자 환자는 무사히 병실로 올라왔다. 보행기에 의존한다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운동을 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만류를 해야 할 정도였다.

금경태 과장과 전종훈 교수의 수술을 안 들어간 덕에 참관이 더욱 즐겁기만 했다.

물론 고경아와 손일석이 고생을 하긴 했지만 스스로 이겨 낼 일이었다. 당연히 그럴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

다음 주로 예약된 라파로 두 개와 송재덕 교수의 스테이플을 이용한 직장암 수술까지, 이제야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홍재순과 이경석에게 첫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도 받았다. 여기저기 소문이 나겠지만 이젠 숨길 일이 아니었다. 인생 선배들답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들을 많이 해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첫인상이 상당히 중요하긴 해. 인사드릴 준비 다 했겠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하고 가라. 신경 써.”

여기에 여름휴가 스케줄을 잡아야 할 때까지 다가왔다.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세상 참 만만치 않았다.

‘이왕 뜰 거면 스승님 당직 날이나 아예 오전에 떠라. 제발 부탁이다.’

거칠다는 말의 의미를 하루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토요일 오전이 거의 다 지날 때까지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단 하나도 뜨지 않았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원주로 갈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지금까지 없었던 수술이 이제 와서?

역시나 박순용이었다.

위궤양 천공에 의한 빤뻬리가 의심된단다.

소원대로 오전에 응급 수술이 떴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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