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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18화 (418/1,329)

제8화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Ⅱ (2)

토요일 일과가 모두 끝났다. 금경태 과장 문제를 생각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오프 날 병원을 지키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날도 너무 화창한데 정훈철과의 약속은 아직 멀었다.

‘에휴! 염성일 환자도 있는데 차라리 잘됐지, 뭐. 근데 왜 열이 안 떨어지지? 금경태는 아무리 스승님이 싫어도 그렇지. 환자가 안 좋다는데 눈은 웃고 있는 게 말이나 돼?’

오늘 있었던 주말 집담회 때 보인 금경태 과장의 얼굴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렸다.

무슨 생각인지 염성일 환자 상태를 물었다. 고열이 나는데 원인을 못 찾고 있다는 말에 분명히 웃고 있었다. 환자에 대한 걱정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갈수록 금경태 과장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한 번 미워하기 시작하면 아무라 예쁜 짓을 해도 다 밉게 보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아니야. 이건 미워서가 아니라, 금경태 그 인간이 원래 그런 거야. 난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돼. 정말 손끝 하나라도 닮으면 안 돼. 근데 전종훈 교수는 또 뭐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이었다. 수술 후 이삼 일에 고열이 발생할 수 있는 원인을 줄줄이 나열하는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었다.

‘김지훈, 일단 폐렴이나 기관지염이 있는지 확인하고, 요로감염도 유의해야 해. 드물게 시기는 맞지 않지만 상처나 수술 부위 감염으로도 발생할 수 있어. T-tube를 통해 나오는 담즙이 어떤 양상인지 잘 봐.’

맞는 말이었지만 교수가 할 말이 아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원론적인 말인 데다 1년차만 돼도 머릿속에 환히 꿰고 있을 사항들이었다. 그걸 조언이라고 하면서 거드름이나 피우지 않았다면 인사라도 했을 것이다.

교수들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만 저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늦게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염성일 환자를 수시로 찾고, 간만에 논문까지 다시 건드렸다.

목욕재계를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빈둥거리다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김지훈을 본 정훈철이 숨도 돌리기 전에 냅다 따발총을 갈겨 댔다. 통화를 하며 이미 깨졌는데 그건 서론에 불과했다. 한수임이 중간에 나서서 말릴 정도였다.

“앞으로는 똑바로 해, 인마. 정말 연 끊는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형님.”

“정말 반성하고 있으면 내 술부터 받아. 그런데 제수씨는 왜 안 나왔어?”

술잔을 비운 김지훈이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번 주는 야간 당직이에요. 근데 승희는요? 학교는 잘 다니죠?”

한수임이 눈을 흘기며 정훈철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휴! 나오긴 전에 경아 당직이라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도 아니고.”

표정이 싹 변했다.

“지훈 씨, 승희는 학교를 놀러 가는 곳으로 알아요. 커서 뭐가 되려는지 몰라. 지금은 피아노 학원 갔어요. 요샌 피아노에 미쳐서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친다니까요. 지훈 씨한테 정말 보고 싶은데 피아노 때문에 못 간다고 꼭 전해 달래요.”

승희도 많이 컸을 것이다. 우연한 일로 조그만 아이의 생명을 건졌고, 그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승희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식사 겸 술자리가 이어졌다.

슬슬 술기운이 돌 무렵, 김지훈이 슬며시 금경태 과장 얘기를 꺼냈다. 내심 조심스러웠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술이 더 들어가면 엉뚱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얘기를 듣던 정훈철의 얼굴에서 슬슬 술기운이 사라졌다.

“야! 세상에 나쁜 놈 참 많네. 장례식장 문제로 짐작은 했다만, 과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 과 선생님들도 곧 나서실 것 같아요.”

“그래? 그런데 네 말을 들어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누군가 뒤에서 받쳐 주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행동을 못하거든. 장례식장 문제를 생각해 보면 모르긴 몰라도 이사장이 아닐까? 지훈아, 뭐든 좋으니까 하나만 더 물어 와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례식장하고 논문만으로는 약해. 온 동네가 다 표절을 하는 세상이야. 나머지는 다 너희 과 내부 문제고 말이야. 하지만 여기에 괜찮은 거 하나만 더 얹으면 기삿거리가 되겠어.”

직업의식이 발동했는지 정훈철이 도리어 궁금한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시간이 갈수록 흥분하는 김지훈과는 달리 정훈철은 점점 냉정해졌다. 술잔도 한쪽에서만 사라졌다.

“오케이! 정리가 됐다. 타이틀을 병원 내 부조리로 하면 꽤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겠는데? 가만, 근데 너 혹시 이 얘기 하려고 나 만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어요? 전 형하고 형수님 만나러 왔습니다.”

김지훈이 시치미를 뚝 떼자 정훈철이 씨익 웃었다.

“이럴 땐 그냥 겸사겸사 만났다고 하는 게 좋아. 이 자식이 누굴 속이려고 해? 나 이래 봬도 기자야, 인마.”

얼굴이 벌게진 김지훈이 허둥거리자 정훈철이 크게 웃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멀었네. 고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게 형이야, 인마. 이런 얘기를 안 했으면 도리어 서운했을 거야. 금경태는 이제 내 안테나에 딱 걸렸어. 넌 환자 열심히 보고 진정한 의사가 되면 돼.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항상 고맙기만 한 정훈철이었다. 그동안 못한 말들을 나누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중간에 한동안 정훈철이 자리를 비운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앞으로는 잘할게요.”

“넌 형 하나 정말 잘 둔 거다.”

“아이고! 당신이 동생을 정말 잘 뒀죠. 지훈 씨, 피곤할 텐데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 경아한테 오늘 몇 시에 들어갔는지 말할 거니까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면 안 돼요.”

윽! 감시망이다. 술 한 잔 더 하려고 했는데 딱 걸렸다.

그래도 정말 간만에 마신 술이다. 이모네 골뱅이가 무지무지 그리웠던 참이었다.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친 김지훈이 한발을 슬쩍 포장마차에 걸쳤다. 이모의 반가움을 넘어선 호들갑까지 더해지자 술이 정말 달았다.

‘선생님들과 형님까지. 정말 든든하네. 금경태, 넌 죽었어.’

속으로 욕을 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콧등을 찡그렸다. 문득 금경태 과장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지 알게 된 날들이었다.

가장 친한 놈은 빼고 말이다.

당직인 손일석이 수술이 뜰 때마다 김지훈을 찾았다.

(지훈아, 아직 술 안 깼지? 이번은 봐준다만, 니가 이러고 있다는 걸 이준영 선생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과연 오프라고 봐주실까? 아니면 화염방사기를 드실까?)

결국 술기운이 사라지자마자 수술 방으로 향해야 했다.

아무리 배우는 것이 좋다지만, 오프 날까지 참관을 하다니 한숨만 나왔다. 그나마 고경아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위안이긴 했다.

“어제 언니하고 헤어진 후에 뭐 했어요?”

“뭐 하긴요? 그냥 병원에…….”

찌릿한 눈길이 심장을 찔렀다.

“이모네 갔을 거 같은데. 맞죠? 내가 없으면 너무 많이 마실까 봐 불안해 죽겠으니까 혼자 술 마시지 말아요.”

어째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장인 될 양반까지 떠올라 식은땀이 다 났다.

병동도 만만치 않았다. 염성일 환자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던 김지훈의 입에서 한숨이 떠나질 않았다. 담즙은 점점 맑아지는데 도대체 고열이 왜 나는지, 간수치는 왜 떨어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환자 아이스 백(Ice Bag) 대 주고, 해열제 하나 주세요.”

답답하고 무력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고열에 시달려 손 하나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환자.

불안에 사로잡혀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보호자.

그들의 근심과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아침 회진이 시작되기 전, 슬며시 다가온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난데없이 어깨를 두드렸다.

“어제 정 PD하고 통화했다. 내가 말 안 해도 미리 신경을 써 줘서 고맙다. 내 너 때문에 힘이 난다.”

정훈철이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이유였다. 조금은 당황하는 김지훈을 본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금경태 과장의 뒷배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에 준하는 강력한 우군을 얻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정 PD도 이 교수하고 통화했으면 됐지. 뭘 나한테까지 전화를 해. 정 PD, 지훈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트를 보던 이준영 교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앞으로 금 과장과 전 교수 수술은 들어갈 필요 없어.”

일부러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에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많았지만, 배우는 길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김지훈도 내심 원하던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염성일 환자 검사 결과는 어때?”

“황달 수치는 내려가는데 아직도 열과 간수치가 떨어지질 않습니다. 다른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과 컨설트 보고 복부 CT와 초음파 시행하겠습니다.”

한동안 환자 상태에 대해 상의한 후 회진을 돌았다. 이준영 교수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염성일 환자에게 할애했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회진이 끝난 직후 외래로 내려가던 이준영 교수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잘 얘기했다.”

“선생님도 통화하신 겁니까?”

이준영 교수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석재가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손짓을 했다.

“과장님이 수술 아예 들어오지 말란다. 도리어 잘된 일이야. 그게 너한테도 편하잖아.”

금경태 과장은 아예 김지훈의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얼굴을 구겼을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역시 스승님은 한 수 앞을 먼저 내다보시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을 하며 할 일을 하는 김지훈을 본 유석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멘탈 하나는 갑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에게 금경태 과장의 행동과 말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염성일 환자 상태가 최우선이었다.

참관할 수술이 줄어든 덕에 시간이 남았다. 수시로 상태를 살피며 검사 결과들을 챙겼다. 복부 CT와 초음파에서는 물론 내과에서도 열이 나는 원인을 명확하게 찾지 못했다.

저녁 회진을 도는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안 좋은데 오늘도 외래 수술은 잡히지 않았다. 진료를 본 환자 수도 많지 않아 금경태 과장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나마 간담도 질환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까지 정규 수술로는 딱 라파로 하나만 했다. 염성일 환자도 응급 수술이었다. 외래 교수로 발령이 난 이후 일은 늘었지만, 이준영 교수는 여전히 응급실 과장 때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돌아서는 이준영 교수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김지훈의 기분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염성일 환자라도 좋아져야 기분이 풀릴 것이다.

답답한 마음으로 염성일 환자를 보러 가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간 금경태 과장의 말을 무시했지만, 생각해 보니 문득 수술 부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이준영 교수의 수술이 잘못됐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수술 중에 본 미세한 담석 가루들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 가루들이 아주 가느다란 간 내 담도를 지금도 막고 있다면 고열과 떨어지지 않는 간수치를 설명할 수 있었다.

‘초음파나 CT에서 돌로 의심되는 것은 하나도 안 보였는데 그럴 수가 있을까? 가루만 남아 있다고 해도 초음파에서는 분명히 보였을 텐데. 제길! 기분은 나쁘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굼벵이도 약으로 쓴다고 했다. 금경태 과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T-tube를 담도에 심은 목적은 담즙 배출만이 아니었다. 만일 담석이 남아 있다면 빠져나올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분, 많이 힘드시죠. 원인을 아직도 못 찾아서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간 속에 미세한 담석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런 방법이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지훈이 T-tube를 잡았다. 한 손으로 종잇장처럼 얇아질 때까지 꽉 누르고는 남은 손으로 쭉쭉 잡아당겼다. 이런 식으로 음압을 걸어 주면 담석이 끌려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젠 한여름 초입이다. 에어컨이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다인실은 덥다. 김지훈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동안 튜브를 잡고 씨름을 했다. 튜브를 따라 흘러나오는 담즙을 보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호자의 눈에 실망이 스쳤다.

무언가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이젠 미안해서 입도 열기 힘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죽겠네. 도대체 뭐야? 왜 잊을 만하면 이런 일이 생기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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