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Ⅰ (3)
유석재와 홍재순, 그리고 3년차 3명이 의국에 모였다.
손일석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수술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다들 인상을 쓰면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건 확실하게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맞긴 한데, 우린 왜 모이라고 하신 거야? 지훈아, 더 하신 말씀은 없었어?”
“예. 수술 전에 잠깐 나갔다 오신 일 이외에는 특별한 일도 없었어요.”
김지훈의 대답에 유석재가 입맛만 다셨다.
시간이 가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무료함에 크게 하품을 하던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야! 옛날에는 한 성질 하셨다는데 누구는 정말 운 좋네. 지훈아, 그냥 이단 옆차기를 파박 날리셨으면 끝내줬을 것 같지 않아? 신기동 선생님도 나이가 드셨나 봐.”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당장이야 속은 후련하겠지만, 그 뒤에는? 엉뚱한 곳에서 말만 나와도 무조건 신기동 선생님이 손해잖아. 꾹 참길 정말 잘하신 거야.”
“하긴 니 말이 맞다.”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
전종훈 교수가 한순간에 똥으로 변하자 다들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홍재순이 갑자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석 선생,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못할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내가 얼마 전까지 비슷한 놈이었잖아. 내 얘기 하는 것 같아서 창피하네.”
순간 더 큰 웃음이 터졌다. 예전과는 180도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신임까지 얻고 있는 홍재순이었다. 3년차들이 감히 치프를 보며 대놓고 웃어도 뒤탈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홍재순의 말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만 좀 웃어라. 감히 치프를 보고 웃어? 이 자식들을 확 그냥!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오늘 모이라고 한 이유가 금경태 때문인 것 같아. 전종훈은 금경태 라인이 분명하고, 금경태가 그동안 어떤 짓을 했는지도 다들 알잖아. 전종훈한테 뭐라고 해 봐야 금경태가 버티고 있으면 만날 제자리를 돌 게 분명해. 과연 신기동 선생님이나 이혁민 선생님이 그 점을 간과할까?”
다들 안다고?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홍재순이 슬쩍 눈길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자리에서 말을 해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심 찜찜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손일석과 이경석의 눈빛에 담긴 마음이면 족했다.
‘우린 끝까지 네 편이야, 인마.’
도리어 그동안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내 금경태 과장이 도마에 올랐다.
“교수님들도 그렇고 우리에게도 큰 문제 없이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가능할까요?”
“지훈아, 인간 변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모르게 돼. 특히 윗자리에 있으면 더 하겠지.”
홍재순의 말에 손일석이 이죽거렸다.
“변하려면 벌써 변했겠죠. 아마 우리는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예요. 전 한 방에 확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솔직히 같은 심정이었다. 한참 동안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 탓에 금경태 과장만 신 나게 씹혔다. 가장 할 말이 많은 김지훈이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고소함이 가득했다.
강기웅 과장과 전종훈 교수도 입에 올랐다.
결국 똥 덩어리가 3개로 늘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그 시간, 하루를 정리한 교수들이 하나둘 응급실로 향했다. 외래에서는 보는 눈 때문에 곤란한지 응급실에 딸린 당직실에 모였다. 여기에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고 있었지만 구석에 앉아야 하는 송동화 과장까지 함께했다.
모두들 얼굴이 어둡기만 했다.
“신 교수,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중요한 일이지? 중요한 일 맞지? 나 밥도 못 먹었다. 아니면 알아서 해. 아니다. 아니다. 그냥 밥 사라. 밥 사.”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을 송재덕 과장이었다.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 볼 요량일 뿐이었다.
“예. 얘기 끝나고 제가 밥 사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결정을 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니까요. 선생님, 아무래도 제동을 걸어야겠습니다. 최근에 우리를 대하는 과장님의 행동이 도를 넘는 데다 전 교수도 심각합니다. 실력을 떠나서 그런 사람을 교수로 추천하다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분란만 생길 겁니다.”
신기동 교수가 수술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개인적인 성격 탓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전공의에게 소리를 지르는 교수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들도 겹치고, 또 겹치면 큰일이 되는 법이다. 더구나 그런 일들이 특정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난다면 두고 볼 일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많이 참아 왔다.
“뭐? 이 교수하고 일석이한테 막말을 하고, 지훈이는 오늘 또 쫓겨났다고? 뭐야?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정말 문제네, 문제. 에이! 병원장 자리까지 내놨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근데 제동을 어떻게 걸어. 그래도 명색이 과장이야, 과장. 좋은 방법이 있어? 나는 우리가 힘을 합치는 것 말고는 모르겠다. 몰라. 어떻게 하지? 응? 어떻게 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준영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사자 중의 한 명인 이혁민 교수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모이자고 했을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전공의들까지 대기하라고 했으면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일단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먼저 과장님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지금처럼 입 다물고 지나가서는 안 될 겁니다. 과장답게 행동을 하지 않으면 대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과장님이 추천을 한 전 교수 문제도 저절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
“지적을 하자, 이거지? 지적을. 근데 말이야. 지적할 거리가 한두 개야? 게다가 대놓고 하면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새끼들 분위기까지 나빠지지 않겠어? 윗사람들이 싸우면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내가 예전에 말한 것처럼 이건 개싸움이야, 개싸움. 안 좋다. 안 좋아.”
“그래서 일단 믿을 수 있는 삼사 년차들을 불렀습니다. 지금 상황을 확실하게 알리고, 의국이 동요하지 않도록 단속을 맡겨야 합니다. 다행히 유석재와 홍재순이 신임을 얻고 있는 데다 3년차들이 뒷받침을 하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송재덕 과장이 손사래를 쳤다.
“상황을 확실하게 알리자고? 어디까지 말할 건데. 자칫하면 엉뚱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교수들끼리 패싸움한다고 말이야. 아니다. 그건 신중해야 돼. 그럼 신중해야지. 공부하기도 바쁜 애들한테 짐을 잘못 얹으면 큰일 난다. 큰일 나. 새끼들은 무조건 잘돼야 돼. 그게 부모 마음이잖아. 병원에서 우리는 부모야, 부모.”
송재덕 과장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당연히 전공의들 때문이라도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전공의들에게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아니, 장례식장 문제가 터졌을 때 이미 그랬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혁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김지훈을 생각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제가 참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뒤 일도 모르고 멍청하게 입을 놀린 사람은 전데, 김지훈이 대신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전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크게 자책을 하자 이준영 교수가 툭 어깨를 쳤다. 좋은 일도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그 덕에 내가 지훈이를 만났어.”
참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재덕 선생님, 우리 눈에는 어려 보여도 사리 판단을 충분히 할 나이들이고,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더구나 우리 과를 제대로 키워 보자고 선생님은 병원장 자리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러고도 분위기를 바꾸지 못한다면 그게 더 문젭니다.”
누구보다도 신중한 사람인 이혁민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송재덕 교수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전공의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 교수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래도 불안하다. 불안해. 난 잘못돼도 좋지만 우리 새끼들은 그러면 안 되잖아. 금경태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알겠어? 고단수다. 금경태가 일 꾸미는 데는 정말 고단수다. 준영아, 너도 듣기만 하지 말고 얘기 좀 해라. 얘기 좀. 니가 제일 많이 당했잖아. 널 쫓아낸 놈도, 외래 교수 되는 걸 반대한 놈도 금경태야, 금경태. 다 알면서 왜 가만히 있어?”
교수들의 시선이 이준영 교수에게 향했다. 어느 틈엔가 은연중 교수들을 이끌고 있었다. 전면에 나서 일을 주도하는 이혁민 교수는 물론, 가장 연장자인 송재덕 교수까지도 이준영 교수의 말이라면 아무 말 없이 따르는 정도였다.
이준영 교수가 깍지를 낀 채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굳게 닫힌 입만 바라보았다.
심각한 고민이 이어졌다.
‘지훈이가 네게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참아 왔는데, 이번에는 전종훈이 쫓아냈다고? 금경태, 전종훈, 그건 선을 넘은 거야. 한 번은 지나갈 수 있지만 두 번은 안 돼. 우리는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야. 화를 내고 싶다면 내게 화를 내.’
결론이 났다. 김지훈이 제자여서만은 아니었다. 눈 밖에 나면 미움을 받는 것도 모자라 배움의 기회까지 뺏길 수 있는 제2, 제3의 김지훈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었다. 그들이 김지훈처럼 버틸 수 있을 가능성은 너무도 희박했다.
“선생님, 금경태와 전종훈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나직한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것으로 결정이 났다.
송재덕 교수가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이 너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자. 금경태 혼내 주자. 바뀔 때까지 호되게 혼내자. 좋다, 좋아. 원래 애들도 금 밟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금경태는 왜 그걸 모를까. 선을 넘었으면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해도 싸다, 싸. 에이! 그놈은 전공의 때부터 삐딱하더니, 왜 점점 더 심해지는지 몰라. 안 좋다. 안 좋아.”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젠 신설되는 응급 의학과를 책임져야 하는 송동화 과장도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일반 외과는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각자 나름의 생각을 말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뾰족한 답은 없었지만 일종의 대안은 만들었다. 남은 일은 전공의들에게 어떻게 말을 하는지였다.
이혁민 교수가 전화기를 잡았다.
잠시 후, 당직실로 내려온 전공의들의 눈에 은근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앉아라. 밥은 먹었나?”
“얘들도 눈치가 있는데 먹었겠어? 이때는 숨만 쉬어도 배고플 때잖아. 니들 배고프지? 그치? 이 교수, 빨리빨리 하자. 뭐 좋은 말이라고 질질 끌어. 빨리빨리 하자.”
송재덕 교수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저 안타깝기만 한 표정이었다. 다들 조용히 자리만 지키자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니들한테까지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너희들도 금경태 과장님 문제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우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기로 했다. 이해를 할지, 못할지 모르지만 내 말을 듣고 판단했으면 한다.”
주관이 개입하면 선입관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옳은 말도 각자 다르게 해석하기 십상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최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말하려 애썼다. 더구나 다시는 거론하고 싶지 않은 이준영 과장의 개인적인 일까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준영 선생님, 음성에 가시게 된 경위까지 말해도 될까요? 내키지 않으시면 빼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지난 일들이 터져 나왔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야심 때문에 극한의 상황을 극복해 가던 이준영 교수를 음성으로 밀어냈다.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준영 교수 역시 한때나마 자신의 본분을 잊었기에 이해할 구석은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이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사설 구조대와 결탁해 의사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까지 벌였다. 이를 정훈철 PD에게 제보한 김지훈은 일정에도 없던 음성 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뿐인가? 정갑수의 일부터 줄 세우기, 그리고 강기웅과 전종훈으로 대변되는 이해하지 못할 인사 발령까지 끝도 없는 문제가 흘러나왔다. 그사이에 있었던 세세한 일들까지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입만 아플 뿐이었다.
전공의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일 정도로 놀라는 구석이 없었다. 김지훈만이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지난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당사자야 그렇다고 쳐도 교수들로서는 다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눈과 귀와 입이 있다면 그간 벌어졌던 일을 모르기도 힘들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유석재를 보았다. 총치프는 말로만 대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유석재, 니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석재의 눈길을 받은 홍재순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저희도 말씀하신 일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는 문제라 그간 말씀을 못 드렸지만, 과장님이 세계 학회에 제출한 논문은 표절한 논문입니다. 솔직히 표절이 아니라 빼앗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돕니다. 재순이 형,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홍재순이 자신이 당한 일을 말했다. 두 귀로 분명하게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충격에 빠진 교수들이 입도 열지 못했다. 전공의들을 설득하거나 이해해 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끝을 모르는 행동에 같은 교수로서 미안할 따름이었다.
답답한 한숨만이 터졌다.
“오늘 잘 모였다. 잘 모였어. 과장이라는 놈이 그게 뭐니? 과장이란 놈이 말이야. 이거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다. 당장 지금 찾아갈까? 이거 옷 벗겨야 돼. 의사도 아니다. 교수도 아니다. 미안하다. 지훈아, 재순아, 일석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얼굴이 시뻘게진 송재덕 교수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야야야!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신기동 교수는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눈초리는 냉정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