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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15화 (415/1,329)

제7화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Ⅰ (2)

교수들 중 가장 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신기동 교수였다. 사실 금경태 과장의 독단과 전횡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교수들 간의 일이었고, 나이가 먹은 탓인지 그동안 무던히도 잘 참아 왔다.

김지훈이 항상 마음에 걸렸지만 금경태 과장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대놓고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부임한 전종훈 교수까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동년배라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었다. 힐난을 받을 이혁민 교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것은 김지훈과 손일석을 대하는 태도였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공의는 교수들에게 제자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송재덕 교수는 사석에서 자식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만큼 아끼며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막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배우러 들어온 놈에게 나가라는 말까지 했어? 게다가 이 교수한테까지 못할 말을 했단 말이지. 과장이라는 사람이 그따위로 행동을 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내 이 자식부터 그냥…….’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려던 신기동 교수가 갑자기 이를 악물며 눈가를 찌푸렸다. 금경태 과장이 김지훈을 쫓아낸 날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치려고 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이혁민 교수가 어깨를 잡으며 했던 간곡한 당부가 생각난 것이다.

“신 교수, 정말 화가 나고 못 참을 것 같으면 심호흡 세 번만 하고 나한테 연락해라. 지금 분위기에서 우리가 실수라도 하면 금경태 과장에게 꼬투리만 잡힌데이. 냉정해야 한다. 잘못하면 송재덕 선생님하고 이준영 선생님께도 불똥이 튈 수 있어. 그렇게 할 수 있제. 내 진심으로 부탁한다.”

“그럼 이대로 두고 보자고? 지훈이는 무슨 죄가 있어?”

“섣불리 건드리면 지훈이가 더 힘들어진다. 금경태 과장이 그냥 놔둘 것 같나? 정말 지훈이를 위한다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노마 애 아니다. 생각도 깊고 멘탈 하나는 누구보다 강하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맞았다. 당장이라도 전종훈 교수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금경태 과장이 건재하다면 분풀이에 불과할 것이다.

후우! 후우! 후우!

난데없이 깊은 숨을 내쉰 신기동 교수가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을 한 것처럼 단호한 표정으로 수술실을 나갔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에 연락을 했다.

‘제길! 이런 일을 보고도 참다니, 나도 늙었나 보네. 하여튼 이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후우! 일단 진정하고 지금은 수술에 집중하자. 그나저나 일석아, 지훈이 멘탈 좀 배워라. 그깟 일에 얼굴 구기고 침울해하기는. 이럴 땐 아무리 익숙한 수술이라도 환자 몸에 손을 대는 게 아니야. 전문의가 되면 그것도 불가능하긴 하지만 말이야.’

수술실로 돌아온 신기동 교수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고 간호사, 일석이한테 들어올 필요 없다고 전해 줘요. 그리고 유석재하고 홍재순에게도 저녁 회진 끝난 후 의국에서 대기하라고 연락 좀 해 줘요. 일도 많은데 미안해요. 김지훈, 그때 3년차들도 다 모여. 오늘은 니가 퍼스트 서.”

졸지에 퍼스트를 서게 됐다. 반색을 해야 할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일이 무척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했다.

‘솔직히 이제는 스승님과 선생님들이 나서 줬으면 좋겠다. 금경태도 모자라 전종훈 교수까지 계속 이러면 정말 참기 어려울 것 같아.’

수술실에서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비참함과 당혹감은 누구도 모른다. 웃고 있다고,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그런 기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로 혼난 손일석과 고경아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신기동 교수와의 수술이 시작됐다.

정말 오래간만에 혈관 수술 퍼스트를 서는 탓에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별생각이 다 들어 머릿속까지 복잡했다.

슬며시 어깨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친 김지훈이 수술에 집중했다. 콧김을 내뿜으며 당장이라도 펄펄 뛸 것 같았던 신기동 교수 역시 어느새 본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술실에서는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수술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일석이 들어왔다.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힐끗 눈길만 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 같았다.

‘그래. 그래야 손일석이지. 멘탈 약하다는 소리는 취소다. 아주 조금이란 말이 빠졌네.’

퍼스트와 참관이 바뀌었다. 손일석이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고, 김지훈도 바짝 정신을 차렸다. 기분이 엉망일 텐데도 신기동 교수의 손은 역시 간결하면서도 정확했다. 혈관 수술에 최적화된 손일지도 몰랐다.

수술이 끝날 무렵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에휴! 내 수준에 무슨 교수님들 손을 평가한다고 난리야. 일단 열심히 보자. 그러다 보면 답이 나올 거야.’

첫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김지훈 딴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갈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교육을 시킨다면 1년에 며칠 가르치지도 못할 것이다.

“김지훈, 오래간만에 혈관 수술 들어온 티를 내는 거야? 필요할 때 딱딱 알아서 적절하게 들어와야지. 이러면 수술하기 정말 힘들어진다. 이 자식들이 3년차 되더니 손만 건방져졌네. 혹시 니 파트 아니라고 집중을 안 하는 거 아냐?”

수술이 끝날 때마다 던져지는 비수가 가슴을 후벼 팠다.

“야! 이거 봐라. 큰일 났네. 해부학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그새 다 까먹었어? 그리고 모든 환자들의 혈관이 항상 같은 주행 경로를 보여?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 다르잖아?”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신기동 교수의 말을 새겼다.

수술의 기본인 해부학 지식이 부족하다는 말도 혈관에 관한 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손이 건방지다는 말은 거칠다는 말만큼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스승님과 신기동 선생님의 말씀이 같은 걸까? 다른 걸까? 어쨌든 내 손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정말 비디오로 내 손이라도 찍고 싶네.’

타는 것은 타는 것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일단 새카맣게 탄 후 신기동 교수에게 양해를 구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병동을 다녀왔다.

“무슨 환잔데 그렇게 신경을 써?”

“어제 간 내 담석으로 응급 수술을 한 환잔데 열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담즙 배출도 잘되고, 고열이 날 만한 요인도 없는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준영 선생님은 뭐라고 하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이제 만 하루 정도밖에 안 지났고, 수술 부위에 이상이 없다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신기동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간에 손을 댔다고 해도 대부분은 별일 아니야. 걱정할 거 없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런 경우 원인을 못 찾는다면 대개는 수술 부위에 문제가 있어. 뭔가 놓쳤거나, 아니면 발견하지 못한 병이 더 있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이준영 선생님하고 니가 함께 수술을 했는데 쓸데없는 말을 했네.”

수술 결과를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김지훈도 이준영 교수의 실력을 철석처럼 믿었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었지만 최소한 염성일 환자의 경우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다만 신경이 바짝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손일석도 다른 이유로 애가 바짝 탔다. 벌써 세 번째 수술인데 여전히 퍼스트는 김지훈이었다.

참관도 좋지만 퍼스트는 더 좋다. 더구나 혈관 파트 전공의는 김지훈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데 신기동 교수는 빤히 얼굴을 보면서도 수술에 들어오라는 말을 안 했다. 보다 못한 손일석이 김지훈에게 슬쩍 눈짓을 하며 자연스럽게 퍼스트 자리에 서려고 했다.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일석, 참관도 배우는 거야. 오늘 수술을 보고 배울 것과 버릴 것을 찾아. 큰 도움이 될 거다.”

에둘러 말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말 그대로 참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동기인 김지훈의 손을 보고 강한 자극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손일석이 눈가를 좁혔다.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야. 스승님 말씀대로 지훈이가 어떻게 퍼스트를 서는지 보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스승님!

손일석도 어느새 신기동 교수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신기동 교수 역시 손일석을 자신의 제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기에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말들을 부담 없이 꺼냈을 것이다.

어쨌든 김지훈에게는 미안한 일인 동시에 기회였다.

‘일석아, 미안하다.’

‘퍼스트나 잘 서, 인마. 에휴! 전종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확 박아 버릴까 보다.’

그렇게 남은 수술이 이어졌다.

새까맣게 타며 염성일 환자를 보는 사이, 어느 틈엔가 수술이 모두 끝났다. 간만에 본 혈관 수술이었고, 신기동 교수에게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탔지만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재가 돼 버린 김지훈을 보는 고경아의 표정도 무척 밝았다. 신기동 교수의 말속에서 김지훈을 아끼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손일석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힘찬 목소리에 힐끗 김지훈을 째려본 신기동 교수가 투덜거렸다.

“목소리만 크면 다야? 내 수술에 들어올 기회가 또 생기면 각오 단단히 해. 오늘처럼 부드러운 말은 기대하지도 마.”

부드러웠단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이건 절대 아니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다른 교수들에게는 탔다고 표현하지만, 신기동 교수에게만은 비수를 던진다고 말하는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절대 날카로운 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거 수술 방에서 쫓겨난 놈 맞아? 하여간 저놈의 멘탈은 알아줘야 해. 자식! 그래서 이렇게 빨리 발전하나? 너무 자신만만한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확실히 3년차 손이 아니야. 일석이도 조금만 더 좋아지면 저 수준에 올라갈 텐데, 그놈의 군대가 문제네. 에이! 지금도 신경 쓸 게 많은데, 왜 벌써 내년 일을 걱정하고 있어?’

신기동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수술실을 나가다 말고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고민에 빠져 있던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후다닥 뒤를 따랐다.

‘스승님 앞에서는 나도 저렇게 보일까?’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모든 수술이 끝난 수술실은 썰렁하기만 했다.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는 고경아를 본 김지훈이 슬며시 다가갔다. 초짜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할 말이 있다는 말이었다.

“경아 씨, 이번 주말 나 오픈데 시간 되죠?”

“나 내일부터 일주일간 야간 당직이에요. 이번 주말은 풀로 근무해야 한다는 거 알죠? 혼자 있다고 애먼 짓 하지 말고 그동안 못 잔 잠이나 주무세요.”

이럴 수가!

다가오는 주말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다음 주말은 김지훈이 당직이었기에 2주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참 상황이 잘도 꼬였다.

“그럼 다다음 주에나 주말 데이트를 할 수 있겠네.”

“새로 산 양복 입어야 할 날이에요. 잊지 말아요.”

잠깐 의아한 표정을 보였던 김지훈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드디어 고경아의 아버지를 만나야 할 시간이 정해졌다. 아직 보름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만으로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어후! 이 주 후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드디어 올 게 왔네. 왜 이렇게 떨리지?’

“옙! 명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르르 몸을 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수술실을 나갔다. 엉뚱한 말을 내뱉은 모습에 고경아가 고개를 흔들며 웃고 말았다. 우습기도 했지만 긴장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아빠 그렇게 무서운 분 아니에요. 평소처럼 행동하면 분명히 마음에 쏙 들어 하실 거예요.’

병동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다 말고 입을 삐죽거렸다. 인사도 인사였지만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전종훈 교수의 일은 교수들끼리 해결할 일이지, 전공의들의 의견을 구할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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