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집도의에겐 손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2)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작고 빨간 불꽃이 타닥 튀었다.
한 방울의 땀이 등에 맺혔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불길이 번진다. 급기야 진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논문이 온통 시뻘게졌다. 등짝이 후줄근하게 다 젖고 나서야 이혁민 교수의 손이 멈췄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식은땀까지 흘렀다. 박순용과 이혁원을 비롯한 수많은 후배들이 떠올랐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김지훈, 이렇게 쓰기로 세 놈이 작전이라도 짰나? 어떻게 다들 똑같이 쓸 수가 있어. 머리를 맞댔으면 결과라도 좋아야지.”
끝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가 원래 빨간 바탕에 글씨를 적은 건지, 아니면 까만 바탕에 빨간색으로 글을 쓴 건지 모를 지경인 논문을 집어 들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지도 않았다.
이준영 교수가 논문을 검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론은 이미 나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한 시간이었다.
김지훈의 입이 바싹 타들어 갔을 무렵, 가벼운 한숨과 함께 한마디가 툭 터져 나왔다.
“다시 써.”
아얏! 소리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단호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이혁민 교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 니 논문을 너무 성의 없이 쓰는 거 아니가? 내 생각도 같다. 처음부터 다시 써라.”
김지훈의 얼굴도 벌게졌다. 빨간 펜이 춤을 출 때 이미 예상은 했지만 의외로 충격이 컸다. 어렵게 쓴 논문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단 한마디로 퇴짜를 놓다니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유를 알아야 했다.
말만 던지고 그냥 지나갈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조곤조곤한 설명이 이어졌다.
“의학은 경험 학문이다. 논문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야. 따라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쓰면 안 돼. 그러려면 통계는 뭐하러 내나? 자기 생각에 꿰맞추는 것이 아니라, 케이스들이 주는 결과를 토대로 해서 객관적으로 써야지. 그게 의학 논문이다. 라파로가 좋다는 걸 왜 니가 강조해? 글과 통계로써 말을 해라.”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논문을 작성하며 찜찜했던 부분이었다. 참조한 논문들은 모두 라파로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김지훈 자신도 그 점을 강조했다. 통계도 유리한 데이터를 주로 이용해 도출해 냈다. 그런 방식이 쓰기 편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스승과 이혁민 교수는 그것을 단박에 간파한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스승님과 이혁민 선생님 앞에서는 편법은 통하지 않아. 통계 때문에 조금 더 골머리를 썩더라도 원칙적으로 작성해야 했어. 죄송합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 역시 누구나 그렇듯 선배나 교수들의 말이라고 무작정 잘못을 인정하진 않았다. 심지어 스승인 자신의 말도 이상하면 몇 번이고 곱씹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잘못을 인정하면 절대 변명하는 법이 없었다. 배우는 자세로서는 더없이 좋은 태도였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중요한 일들은 여러 번 강조하는 습관을 가진 이혁민 교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히 날아와야 할 것이 오지 않자 등짝이 도리어 더 서늘해졌다.
‘어후!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지? 이게 끝인가?’
침묵은 용건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때 이혁민 교수를 묘한 눈으로 힐끗 본 이준영 과장이 외래 차트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모레 이 환자 수술하자.”
수술하자는 말에 논문에 대한 걱정이 휙 사라졌다. 차트를 받아 든 김지훈의 손이 흥분으로 살짝 떨렸다.
드디어 담석증 환자 수술이 떴다. 스승의 첫 정규 수술이다. 간담도의 가장 기본적인 질환이었지만 라파로 적응증이 되는 환자였다.
“선생님, 라파로로 하실 겁니까?”
“이 교수가 어렵게 잡은 환자니까 준비 철저히 해.”
역시 이혁민 교수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파트가 다른데도 이준영 교수의 수술 케이스까지 신경을 쓴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를 한 김지훈이 외래에서 나오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승과 함께 수술을 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타도 좋았다.
우워워워!
이제 시작이다.
이혁민 교수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지훈이 저노마 너무 좋아하네요. 논문도 이젠 제법 궤도에 오른 것 같고, 3년차들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집니다.”
“근데 신현수보다 왜 덜 태운 거야?”
“하하! 제가 그랬습니까?”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이혁민 교수의 웃음소리가 상당히 어색했다.
“이 교수, 확실히 하자.”
이제는 어엿한 교수임에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선배는 선배인 모양이었다.
***
아직 환자가 입원을 하지도 않았는데 김지훈의 입이 귀밑에 걸렸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연거푸 수술이 잡히면 아주 생난리를 치겠네. 논문 다시 쓰라는 소리는 벌써 잊어 먹었어?”
“논문은 논문이고, 수술은 수술이지. 너도 신기동 선생님 수술이 많으면 무지 좋아하잖아?”
“얼씨구! 내가 언제 그랬어, 인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목소리는 작아져만 갔다. 환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왕 하는 수술, 자신이 스승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이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뭐라고 하든 말든 신이 난 김지훈이 휘파람까지 불었다.
‘철저히 준비하자. 그러려면 다시 복습을 해야겠지?’
그날 밤, 그동안 고이 보관해 왔던 라파로 수술 테이프를 튼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온 정신을 집중하다가도 툭하면 전화통을 노려보았다.
화목은 이준영 과장의 당직 날이다. 손이 거칠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스승의 수술을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런데 밤새 고요하기만 했다. 환자가 없을 리는 없지만 모두 다 일이 년차 선에서 해결됐다는 말이었다.
밤늦도록 테이프만 열심히 되돌린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스승님 당직 날인데 이렇게 조용해. 에휴! 몸은 개운해서 좋은데 마음이 편하질 않네. 찜찜해. 아니구나. 스승님이 편히 쉬는 게 더 중요하지.’
목요일인 내일 수술이 잡혔다는 것 말고는 똑같은 일상이었다. 내심 오늘은 더욱 집중을 해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첫 수술을 참관하기도 전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회진을 돌기 전부터 얼굴을 잔뜩 구겼던 금경태 과장이었다. 수술실에 들어온 김지훈을 보고는 아예 잡아먹을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 내과 컨설트는 물론 예약까지 단속을 했는데, 이혁민이 지 파트도 아닌 환자를 잡아 줘? 넌 어시스트를 확실히 서겠다, 이거야? 아주 쌍으로 노는구만. 재수 없는 놈들.’
“김지훈, 넌 니 파트 일에만 전념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진도 안 도는 놈이 무슨 참관이야? 나가.”
김지훈이 머뭇거리자 금경태 과장의 눈이 번들거렸다. 꼴도 보기 싫다는 눈빛이었다.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태도에 유석재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집도의의 말이었다.
‘지훈아, 안 되겠다. 나가는 게 좋겠어.’
유석재의 눈짓에 수술실을 나온 김지훈이 한동안 복도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너무 노골적인 말에 그나마 있지도 않은 정나미까지 뚝뚝 떨어졌다.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준영 과장의 파트를 도는 한, 혹은 자신의 딸랑이가 되지 않는 한 가르칠 생각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씨펄! 어쩐지 아침부터 날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 했어. 정말 과장도 아니네. 그럼 다른 수술을 참관해?’
금경태 과장에 관한 한 이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김지훈이었다. 피하면 간단한 문제였다. 회진 시간도 스승과 겹쳐 얼굴을 안 보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이준영 과장은 한 번도 라파로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승님도 만반의 준비를 하셨겠지만, 내가 퍼스트를 제대로 못 서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만에 하나라도 실패가 이어진다면 점점 라파로를 시도하기가 어려워질 거야.’
스승을 철석처럼 믿었지만 수술은 장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철저히 준비를 했던 백무용 교수도 낭패를 경험했다. 더욱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세세한 부분들까지 잡아내려면 당연히 퍼스트를 직접 서거나, 최소한 참관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이었으면 고민을 거듭하며 어떻게든 수술실에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재순을 통해 금경태란 인간은 과장이 아니라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수모라면 수모랄 상황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김지훈 역시 금경태 과장의 얼굴을 보기 싫었고, 자존심까지 너무 상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당신 수술을 못 봐서 안달을 낼 줄 알았어? 큰 스승님의 말씀도 있고 도강도 한다지만, 들어오지 말라는데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네요. 백무용 선생님하고 라파로를 준비한 게 신의 한 수네. 거기다 경아 씨까지 있잖아. 하하하! 지나가면서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내심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었지만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스승이 아니더라도 간담도를 전공하기로 한 이상 김지훈 자신을 위해서라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카르페 디엠! 피스!’
김지훈이 슬며시 유리창을 통해 수술을 지켜보았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술 과정이 잘도 보였다. 수술실 복도를 오가던 간호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사각지대를 잘 이용한 덕에 금경태 과장과 눈을 마주칠 일도 없었다.
어느새 금경태 과장의 첫 라파로가 끝났다.
‘이런 방법도 괜찮네. 엑기스만 빼먹으면 되지, 뭐.’
재빨리 송재덕 과장의 수술실로 가던 김지훈이 눈에 힘을 주었다. 순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한 만큼 참아야 했다.
그때 고경아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 씨, 이따 9시에 만날 수 있어요?”
“잘됐네. 송동화 선생님 수술 없으면 나갈게요. 만일 늦으면 수술 방에 확인해 봐요.”
“알았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파이팅!”
“경아 씨, 난 신경도 안 쓰니까 걱정 말아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경아의 의아한 표정에 그냥 웃음만 나왔다.
더구나 세상은 어두운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훈아, 아까 대장 자르는 거 봤지? 이런 케이스는 힘들다. 힘들어. 거기선 말이야. 생각보다 과감해야 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도리어 박리하기가 힘들다. 명심해라. 명심해. 대장이 재밌다. 재밌어.”
“김지훈, 참관할 때는 수술을 할 때보다 더 집중해야 해. 안 그러면 핵심을 놓친다. 위를 자를 때는 혈관들을 먼저 깔끔하게 잘 처리해야 한다. 그 부분 잘 봤나?”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마음이었다.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말에 답답했던 기분이 눈 녹듯 사라졌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 한 명 때문에 이 많은 교수들의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이혁민 선생님 말씀이 딱 맞아. 금경태, 그 인간한테는 원하는 것만 가져오면 돼. 핵심만 뺏어 먹자.’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며 마음까지 가벼워졌다.
그날 밤, 고경아에게도 금경태 과장과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얼굴까지 빨개지며 자신의 일보다 더 분해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마치 어머니나 큰누이처럼 꼭 안아 주며 전해 준 온기가 너무도 따뜻했다.
“경아 씨, 고마워요. 그리고 내일 스승님 라파로 있는 건 알죠? 천안에서 해 보긴 했는데 그래도 불안하네. 미리 연습 좀 해 보죠.”
“어떻게요?”
김지훈이 머리를 툭툭 치며 마치 실제로 수술을 준비하는 것처럼 손까지 움직였다.
고경아가 눈을 반짝이며 김지훈과 함께 수술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록 말만 주고받았지만, 준비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두 번째 데이트가 끝났다.
그런데 데이트를 한 것은 맞나?
목요일이다. 이준영 과장의 첫 정규 수술이 있는 날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세심하게 준비를 했다. 그 덕인지 수술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돌아가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변함없는 스승의 무뚝뚝함과 고경아의 반짝이는 눈은 커다란 힘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노련한 써전이라도 처음 하는 수술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지훈도 말없이 수술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막상 환자를 앞에 두자 걱정은 저 멀리 사라졌다. 스승은 과연 어떻게 라파로를 할지 기대만이 가득했다.
“시작하자.”
드디어 이준영 교수의 손이 움직였다. 신중하지만 자신감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