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집도의에겐 손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1)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누구보다 부산하게 움직였다.
새벽에 수술이 또 하나 뜬 탓에 머릿속이 멍했지만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년차들이 드레싱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로 드레싱을 하고는 차트를 확인했다. 그래도 회진 시간을 맞추기가 정말 빠듯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형, 내 말이 맞죠? 저 자식이 일을 몰고 다닌다니까요. 3년차가 1년차처럼 드레싱을 하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렇게 복이 넘치는 놈하고는 가까이하면 안 되는데, 우리도 큰일이네요.”
“에휴! 솔직히 미안하다. 사실 내가 제일 일이 없잖아.”
“아이고! 나이를 생각하세요. 지훈이처럼 일하다가는 바로 쓰러져요.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내가 뱁새냐?”
“그렇다고 황새도 아니잖아요.”
실없는 농담이 오고 갔다.
“그래. 나 뱁새다, 이 자식아. 근데 이준영 선생님은 왜 송동화 선생님 수술까지 들어가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되면 일주일 내내 당직 서는 꼴이 되잖아.”
“그것도 다 지 팔자죠, 뭐. 그래도 저 자식은 이준영 선생님 뒤만 졸졸 따라다닐 놈이에요. 신기동 선생님이 훨씬 멋있구만.”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며 한숨만 쉬었다.
‘내 팔자라고? 어휴! 오늘 수술만 여섯 개를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참는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경석이 형 말대로 매일 당직인데 어떻게 버티지?’
이준영 교수는 새벽에 응급 수술이 또 있었다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오늘 참관해야 할 수술을 지정해 주었다.
유방 종물 수술 두 건과 혈관 수술 네 건이었다. 그나마 항문 쪽 수술을 빼 주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어쨌든 요즘 들어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손일석과 하루 종일 수술 방에서 살아야 할 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빠르고 부드럽다는 것은 분명히 답이 아니야. 섣불리 대답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면 신 나게 탔겠지? 일단은 다행이지만 빨리 답을 찾아야 하는데, 거칠다는 말이 도대체 뭘까? 그건 그렇고, 스승님이 빨리 정규 수술을 잡아야 할 텐데.’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지만, 단 한 건의 수술 예약도 없었다. 누구보다도 환자를 생각하고, 수술 실력까지 최고인 스승을 환자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과는 그 흔한 컨설트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응급 수술이긴 하지만 꾸준히 수술을 해 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구기던 김지훈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김지훈, 할 만하나?”
이혁민 교수였다.
“예, 선생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근데 니 논문 어떻게 됐나? 설마 예전처럼 쓰진 않았겠지. 내 오늘 오전 진료니까 오후에 외래로 갖고 와라.”
하루 만에 눈이 뻘게진 김지훈을 본 이혁민 교수가 알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손일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지훈아, 논문 가지고 오라시지?”
정말 귀신같은 놈이다.
“거기서 어떻게 들었어? 너 소머즈야? 그냥 막 들려?”
“니 얼굴만 봐도 답이 딱 나와, 인마. 하오문을 이끌려면 이 정도 능력은 기본이지. 하여튼 그건 그거고, 홍재순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잘 썼지? 그러면 한 이삼십 군데 정도 지적받고, 이삼십 분 정도 타면 돼.”
“뭐? 이삼십 군데? 그건 다시 쓰라는 거잖아?”
“그렇지. 이런 말은 딱 한 번에 잘 알아듣네. 역시 김지훈이야. 홍재순 선생님의 이론 실력도 소용없더라. 현수도 징징 짜면서 구미 내려갔는데, 혹시 눈물 못 봤어?”
항상 약간은 과장된 것 같은 손일석 말이지만, 신현수까지 울었다니 십중팔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김지훈이 눈에 힘을 주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용쓰지 마라. 그런다고 운명이 바뀌겠니?”
“내가 삼… 아니다. 하여간 논문 무지하게 열심히 썼으니까 두고 봐, 인마.”
“뭐? 삼? 그 뒷말이 뭐야?”
이런! 하마터면 삼국지라고 할 뻔했다. 이런 건 여러 사람이 알아야 하등의 득이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요런 말은 놓치지도 않아요.’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근데 너 수술 안 들어가?”
“헉! 전종훈 선생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으아아!”
‘걸음아, 나 살려라’ 손일석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천천히 그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다시 의국으로 들어갔다. 유방 수술을 본 지 상당히 오래된 데다 준비도 제대로 못했다. 솔직히 참관을 위해 날밤을 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방 수술에 관한 책을 찾았다.
‘아무리 양성 종물이라도 그렇지, 큰일 날 뻔했네. 최소한 수술 방법은 정확하게 알고 들어가야 참관의 의미가 있지.’
첫 수술은 유방 종물 절제술이었다. 책을 펼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갈피 속에 한 장의 메모지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던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손일석의 글씨가 분명했다. 깨알처럼 유방 종물 수술의 핵심 부분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오늘 수술을 준비하며 작성한 메모일 것이다.
‘일석이, 이 자식도 정말 방심을 못하게 하네. 만날 덜렁거리는 것 같은데 언제 또 이런 걸 만들었을까? 역시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하는 놈이야.’
그 덕에 시간을 벌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메모지를 머릿속에 박은 김지훈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오늘도 눈이 예쁜 간호사가 초짜 간호사와 함께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아 씨, 파이팅! 동료를 믿어요.’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경아가 힐끗 쳐다보고는 모른 척을 했지만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웃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작이 좋았다. 저마다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하나의 과정이 끝나면 다음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완벽한 수술 준비가 이뤄졌다. 잘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곧 전종훈 교수가 손을 씻고 들어왔다. 은색 안경테가 무영등 불빛에 반짝였다.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3년차 김지훈입니다. 선생님 수술을 참관하고 싶어 들어왔습니다. 인사를 늦게 드려 죄송합니다.”
“네가 김지훈이야? 수술 방해하지 마라.”
목소리며 말투가 어째 서늘했다. 간단하다고 해도 발령 후 첫 수술이라 긴장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제저녁 유석재가 했던 말을 떠올린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긴장되시나? 다른 대학 병원에서도 유방 파트를 맡아서 수술 경력이 꽤 되신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우리 병원에서는 처음 하는 수술이라 긴장이 될 수도 있겠지.’
수술이 시작됐다. 상당히 많은 수술을 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너무 거침이 없었다. 유방암 수술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유방 종물은 미용적인 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수술이었다. 그 점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작부터 뭔가 꺼림칙했다. 이럴 때는 예감이 틀려도 좋건만,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손일석의 말까지 현실이 됐다. 전종훈 교수는 까칠한 정도가 아니었다. 구미의 강기웅 교수와도 사뭇 달랐다.
“손일석, 똑바로 좀 해.”
“간호사, 여기서 이걸 주면 어떻게 해? 예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맞춰. 모르면 물어보든지. 둘이 들어오면 뭐해?”
“어휴! 너 정말 문제다. 손일석, 제대로 좀 하자.”
“간호사, 둘이 손 바꿔. 초짜한테 메인을 주면 어떻게 해?”
말까지 거칠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았다. 간호사에겐 아예 반말이었다. 웬만하면 얼굴을 붉히지 않는 손일석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자리를 바꾼 고경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눈가를 찌푸렸다.
‘이젠 나이 많은 선생님들도 간호사들한테는 거의 반말을 안 하는데 뭐야? 그리고 일석이만큼 퍼스트 서는 전공의가 어디 있다고 저래? 학교 선배도 아니고, 새로 왔으면 일단 친해지는 게 먼저 아닌가?’
사실 집도의들이 모두 신사적인 것은 아니다.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것도 모자라 어시스트를 쫓아내는 교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종훈 교수의 경우는 너무 심했다.
분위기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가운데 2개의 수술이 끝났다. 그 탓인지 김지훈의 눈에 전종훈 교수의 수술은 너무 거칠게만 보였다.
수술 모자가 푹 젖은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경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초짜 간호사를 먼저 내보내고는 혼자 수술실을 정리했다.
“어후! 폭탄이네. 지훈아, 내가 그렇게 욕먹을 정도로 퍼스트를 못 섰냐? 수술이나 잘하면 몰라. 첫날부터 무슨 욕을 바가지로 하고 앉았어. 씨펄!”
꽤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너만 한 퍼스트가 어디 있어? 구미에서 강기웅 선생님이 저랬는데 앞날이 험하다.”
눈가를 잔뜩 찌푸린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경아를 보았다. 나름 비밀스럽게 연애를 한다고 해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더구나 손일석에겐 공개적으로 알렸다.
“제수씨 마음 좀 달래 줘라. 반말로 그게 뭐냐? 자기 얼굴 깎아 먹는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드나 봐. 에이! 난 신기동 선생님 환자나 기다려야겠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경아 옆에 섰다.
“경아 씨,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곧 좋아지겠죠.”
“난 괜찮아요. 미경이가 문제죠.”
고경아가 웃었다. 햇수로만 5년을 근무한 경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아 씨! 파이팅!”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태우는 것과 혼내는 것, 그리고 짜증을 부리는 것은 정말 다르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역시 스승님과 선생님들은 뭔가 달라도 달라. 집도의가 저러면 수술이 제대로 될까? 더 크고 어려운 수술을 할 때는 어쩌려고 저럴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전종훈 교수는 금경태 과장의 라인일 것 같았다. 강기웅 과장을 포함해 다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의들과 간호사들 역시 수술 팀의 일원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아예 그런 생각이 없든지 말이다.
신기동 교수의 수술이 이어졌다. 첫 번째 수술이 끝나자마자 비수를 빼 들었다.
“일석아, 똑바로 좀 하자. 너 이 수술 퍼스트 선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요즘 해부학 공부는 하고 있어? 안 하지? 너 정말 혼나 볼래?”
오전에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그런데 느낌은 정말 달랐다. 손일석을 보는 눈 속에 담긴 애정과 더 잘해야 한다는 질책과 격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 간호사가 알아서 척척 도와주지 않았으면 수술 힘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 말을 3년째 듣는다. 너 이 정도로 혼나고 끝나는 건 고 간호사 덕분이니까 고맙다고나 해, 인마.”
“고맙습니다, 고 간호사님.”
손일석이 고경아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예쁜 초짜 간호사, 성미경 씨 맞죠? 고 간호사한테 잘 배워요. 그러면 수술이 재밌을 겁니다. 일석이 이놈한테는 뭘 하면 안 되는지 배우고 말이야.”
칼처럼 날카로웠던 신기동 교수였다. 날이 무뎌진 것 같지는 않은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손일석의 이마에 맺힌 땀이 흥건해지면 해질수록 더 좋아졌다.
고경아와 성미경 간호사의 눈가에도 밝은 미소가 진하게 걸렸다. 그 덕에 수술도 완벽하게 잘 끝났을 것이다.
김지훈이 가벼운 숨을 내쉬며 웃었다.
집도의의 자세와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무작정 웃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애정 없는 질책과 짜증은 수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이쿠! 내가 지금 분위기에 취할 때가 아니지.’
잠시 거칠다는 말을 잊었다.
김지훈이 눈을 부릅뜨고 이어진 수술에 집중하자 신기동 교수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구미에서도 끊어진 동맥을 잡았다고? 확실히 써전으로는 타고난 놈이야. 언제 기회 되면 퍼스트를 세워 봐야겠어. 아니, 수술을 하나 줘 볼까? 신장 이식 쪽을 맡기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야.’
손일석과 더불어 김지훈만 보면 욕심이 솟구쳤지만, 그때마다 무뚝뚝한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배만 아니었다면 싹 무시하고 당장 김지훈의 멱살이라도 잡아 신장 파트로 끌어왔을 것이다.
두 번째 수술이 끝나자 김지훈이 넙죽 인사를 했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혁민 선생님께서 논문을 보자고 하셔서요.”
“응. 나가 봐. 너도 혼내야 하는데 기회가 없네.”
“기회만 주십시오. 언제든 혼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김지훈도 많이 컸다. 능청스럽게 대답을 하며 고경아에게 슬쩍 눈짓을 하고는 부리나케 의국으로 향했다. 재빨리 논문을 검토하고 외래로 내려갔다. 슬쩍 훔쳐본 손일석의 논문보다 훨씬 알차면서도 잘 썼다고 확신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 내 건 무조건 통과한다. 파이팅!’
이혁민 교수의 진료실에 이준영 교수가 함께 있었다. 김지훈이 순간 살짝 콧등을 찌푸렸다. 오늘은 수술을 하는 날이니 원래는 수술실에 있어야 할 스승이었다.
손에는 메스 대신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진료실을 감도는 커피 냄새가 쓰기만 했다.
“딱 시간 맞춰 왔네. 논문부터 보자.”
논문을 받아 든 이혁민 교수가 빨간 볼펜을 척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