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보는 것 역시 배우는 과정이다 (1)
슬며시 다가온 손일석이 상당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 채였다.
“지훈아, 미안하다. 내가 정말 도와주고 싶었는데 교수님들 뜻이 그러니 어쩌겠어. 따라야지. 우린 전공의야.”
“도와주고 싶었다고? 그게 미안한 놈 얼굴이냐? 입에 침이나 발라, 인마.”
“에이! 넌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니. 그런데 말이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드레싱 시간 잘 조절해라. 저녁에는 몰라도 아침에 1년차들 드레싱 카를 니가 쓸 수는 없잖아. 자칫 드레싱 빵꾸 나면 1년차들 다 죽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고 불쑥 뛰쳐나가려는 주먹을 간신히 말렸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본 손일석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워워! 왜 이러시나. 폭력은 나쁜 겁니다. 아 참! 지훈아! 서연이하고 현수, 오케이다. 자식! 눈이 많이 예리해졌어.”
이 와중에도 할 말은 하는 손일석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말 쓸데없는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휴! 너부터 제대로 봤어야 하는 건데. 이걸 확 그냥!”
소리를 지르던 김지훈이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정말 아침 드레싱은 언제 하지? 송동화 선생님 파트도 모자라서 다른 파트 수술 참관까지 하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가만! 시간 많다고 참관을 하라고 하지는 않으실 분이잖아. 뭐지?’
진정한 이유가 뭘까? 정말 손이 거칠기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까지 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스승도 곧 해야 할 라파로를 준비하라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다른 수술까지 볼 이유가 없었다. 각기 다른 세 건의 수술이 갖는 공통점은 하나였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국은 손이야. 보고 느끼라고 하시는 거야. 이놈의 손에 뭔가 문제가 있어.”
“이 자식이 미쳤나. 갑자기 손은 왜 찾아. 뭐야?”
“안 가르쳐 줘, 인마.”
“어? 이 자식이 물음표만 던지고 어딜 가?”
김지훈이 급히 병동 일을 마무리 짓고 후다닥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수술 방 간호사들이 유난히도 반가워했다. 심지어 수간호사까지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말속에 친근함까지 배어 있었다.
‘왜들 이래? 너무 반가워하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수술실로 향하다 멈칫거렸다.
어느 수술부터 참관을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송재덕 교수의 수술부터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첫날인데 간담도부터 보자. 금경태가 아무리 싫어도 배워야 할 것이 있잖아. 스승님과의 수술을 대비해서 라파로도 다시 점검해야지. 에휴! 그래도 마음에는 안 든다.’
눈가에 힘을 준 김지훈이 힘차게 수술실 문을 열었다.
언제나 바삐 움직이는 곳이다. 오늘은 급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술 방의 풍경이 낯익으면서도 새로웠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구석에 조용히 섰다.
간호사와 함께 마취 준비를 하는 김진호.
환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유석재.
앗! 눈이 예쁜 간호사까지!
김지훈이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분주하기만 한 고경아.
‘경아 씨도 참 열심히 하네. 이런 모습도 정말 아름답다. 그나저나 참관한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싸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넌 뭐야? 무슨 일 있어?”
목소리에서 찬바람이 뚝뚝 묻어났다.
“아닙니다. 수술을 보고 싶어 들어왔습니다.”
“내 수술을?”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심하게 굳었다. 가뜩이나 심난하고 초조하기만 한 형국에 마음에 안 드는 놈까지 나타나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자식은 눈치도 없나? 아니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거야? 하긴 그러니 장례식장 문제를 떠벌리고 다녔겠지. 이걸 어떻게 한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끼며 조용히 김지훈을 보았다. 감정을 드러낼 일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라파로 수술을 배우겠다고 들어온 전공의를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준영을 따르는 놈인데 내 수술을 보게 해? 아니면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게 더 좋을까? 이준영이 내 수술을 보라고 했을 리는 없을 거야. 수술에 욕심이 많은 놈이니까, 제 딴에 배우겠다고 하는 소리가 분명해.’
김지훈이 세부 전공으로 간담도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준영 교수가 무척이나 아낀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무리 무뚝뚝해도 사람인 이상 가장 아끼는 놈을 손안에 꼭 쥔 채 가르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보다 전공의에겐 더 무서운 행동이 있다. 애초에 쥐뿔도 없는 김지훈에겐 관심이 없었다. 아예 없는 것처럼 무관심으로 대응하면 김지훈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이준영 교수의 속도 꽤나 쓰릴 것이다. 어쨌든 웃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하든 내게 나쁠 일은 없겠지.’
금경태 과장이 입을 쑤욱 내밀며 아무 말도 없이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가타부타 말이 없자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뭐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에이! 큰 스승님께서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까지 하셨는데,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긍정은 힘!’
어깨를 으쓱인 김지훈이 수술이 잘 보이는 자리로 향했다. 고경아가 조금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윙크를 하고는 태연하게 옆에 섰다.
이왕 들어온 거 하나라도 더 배울 일이었다. 유석재를 보며 라파로 수술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상기했다.
여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동안 환자와 수술에만 집중했었는데 오늘따라 마취를 시작하는 김진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환자분, 마취과 김진홉니다. 잠깐 주무셨다가 눈을 뜨면 수술은 끝나 있을 겁니다. 절 믿으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하나, 둘, 셋, 넷.
환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인투베이션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한 김진호가 수술을 시작해도 된다는 사인을 보냈다. 유석재와 박순용이 환부를 깨끗이 소독했다. 특별한 말이 없어도 고경아는 필요한 것들을 적시에 정확하게 건넸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고경아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마취과 간호사와 수술 방 보조 간호사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손을 씻고 온 금경태 과장이 수술 가운을 입는 것을 도우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언제나 보아 왔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은 확연하게 달랐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입술을 모았다.
‘수술은 써전들만 하는 게 아니었네. 마취과와 간호사들까지 모두 수술 팀이었어. 이 중 한 사람이라도 손발을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써전이라도 수술을 하기 힘들 거야. 결국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려면 수술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까지 한데 모아야 한다는 말이네.’
불현듯 든 생각이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하고 간직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모니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다. 인간성과는 달리 금경태 과장의 손은 정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빠른 스승의 손과는 달리 거의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지훈이 모니터와 금경태 과장의 손에만 집중했다. 금경태 과장의 라파로 실력이 전과는 또 달라져 있었다. 한 우물만 집중적으로 판 덕일 것이다.
‘수술은 정말 잘하는 사람이야. 두 손을 어떻게 저 정도로 쓸 수 있지? 대단해.’
수술이 끝날 무렵, 김지훈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인기척을 느낀 고경아에게 눈짓을 하고는 수술실을 나왔다.
다음 수술 참관은 송재덕 과장이었다. 발끝으로 소리 나지 않게 달리던 김지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구! 대장암 수술인데 설마 거의 다 끝나지는 않았겠지? 라파로는 또 있는데 먼저 볼 걸 그랬나?’
송재덕 과장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간과했다. 역시나 이미 상당 부분 수술이 진행된 상태였다. 정말 다시 보아도 번개처럼 손이 움직였다.
김지훈이 들어오자 슬쩍 고개를 돌렸던 송재덕 과장이 이내 무섭도록 수술에 집중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요 과정이 모두 끝났다. 송재덕 과장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경석아, 마무리하자. 마무리. 천천히 해라. 천천히. 지훈아, 넌 왜 들어왔어? 수술 보러 왔구나, 수술. 어때? 대장이 역시 재밌지? 그치?”
“예. 재밌습니다. 라파로도 상당히 재밌습니다.”
“그래. 지훈이 니가 이제야 뭘 좀 알아 가는구나. 대장이 제일 재밌다. 대장 하자, 대장. 이 교수 둘하고 금 과장한테는 손만 배워. 간담도 뭐 있니? 복잡하기만 하지. 대장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아암! 깨끗하지.”
역시 대장이라는 말만 했다. 그런데 가장 오염이 심한 대장 수술이 깨끗하단다. 하마터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물을 뻔했다. 간신히 목구멍을 막은 김지훈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는 이경석에게 눈을 돌렸다.
한참 배를 닫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과는 비교하기 힘들었지만 이경석도 손이 상당히 빨랐다. 처음 봐서 그런지 솔직히 조금은 놀라웠다.
‘경석이 형도 대단하네. 다들 정말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어.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자. 이런 면들을 보고 느끼라고 하신 건가? 어쨌든 다들 수술하는 모습이 달라서 보기만 하는 것도 꽤 재밌네.’
은근히 다음에 이어질 이혁민 교수의 수술과 손이 기대됐다. 수술 방의 한계로 양방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허허’ 웃으며 마무리를 기다리던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훈아, 우리 작은 이 교수 수술 보러 가자. 가자. 위를 어떻게 자르는지 잘 봐. 그것도 다 대장 수술에 도움이 된다는 거 알지? 응? 알지? 경석아, 너도 시간 있으면 건너와라. 같이 보자. 같이.”
“예, 선생님.”
이경석의 목소리에 힘이 팍팍 실려 있었다.
왜 아닐까?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3년차 중 가장 편한 상황이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이준영 교수에게 타며 몸서리를 쳤던 시간은 멀리 사라지고 이제는 행복만이 남은 것이다.
3명이 나란히 서서 세 번째 참관을 시작했다.
“선생님까지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힘드실 텐데 나가서 쉬세요. 시간이 좀 늦었지만 끼니는 꼭 챙기셔야죠. 그러다 체력 떨어지십니다.”
“뭐? 이 교수, 나 나이 많다고 그러는 거지? 에이! 서럽다, 서러워. 내가 어쩐지 서울 올라오고 싶지 않더라.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에이! 배고프다. 배고파.”
송재덕 교수가 투덜거리며 나가자 이혁민 교수가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끼니를 걸렀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 김지훈과 이경석이 배를 만지며 서로를 보았다.
“형, 빨리 밥 먹고 옵시다.”
슬쩍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수술실을 나가려는 순간, 이혁민 교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들 어디 가나? 밥 먹으러 가나. 배고프면 먹어야지. 수술 참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게 원칙인데, 밥부터 먹어야지 어떻게 하겠어. 이것도 다 묵고살자고 하는 짓이지.”
무언가 기대를 하는 눈빛이었다. 사투리까지 섞였다. 어깨가 축 늘어진 김지훈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 옆에 이경석이 멍한 눈으로 힘없이 섰다.
수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경아가 들어왔다. 라파로 수술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오늘 라파로 세 개였는데 벌써 끝났어?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네. 인간성하고 실력은 전혀 상관이 없구나. 좋아. 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다 뺏어 먹자.’
그런데 고경아가 수술 가운을 입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의 수술을 보조하는 간호사가 초짜였던 것이다. 소곤소곤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함께 수술을 보조했다.
점심은 먹었을까? 얼마 쉬지도 못했을 텐데 얼마나 힘들까?
김지훈이 안타까운 눈으로 고경아를 보았다. 나직한 한숨을 푹푹 내쉬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수술실은 개인적인 감정을 묻어야 할 장소였다.
하루 종일 수술 방에서 산 김지훈이 6시가 다 돼서야 병동으로 올라왔다. 점심은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내 서 있었지만 얼굴이 의외로 밝으면서도 어두웠다.
‘이혁민 선생님의 손은 역시 부드러워. 정확하고 빠르고 부드럽고. 다 같은 써전인데 수술하는 모습은 정말 다양하네. 에휴! 그나저나 경아 씨가 문제네. 그럭저럭 얼굴이 나쁘진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앞으로 힘들어서 어떻게 하지? 괜히 만나자고 했나? 히힛! 그래도 월요일부터 데이트를 하는 게 어디야. 9시면 좀 빠를까?’
곧 오후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부리나케 드레싱을 하고 환자들을 본 김지훈이 헉헉거렸다. 저녁 드레싱인데도 1년차들과 겹치지 않게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이준영 교수가 송동화 과장과 함께 올라왔다.
“지훈아, 서울에서도 신세 좀 져야겠다. 잘 부탁한다.”
“어휴! 선생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구미에서도 고생만 시켰는데 미안하다. 이준영 선생님, 회진 먼저 도시죠. 저는 혼자 천천히 봐도 됩니다.”
“혼자?”
“지훈이가 알아서 다 할 겁니다. 정말 믿을 만한 데다 구미에서 많이 친해졌거든요. 지훈아, 안 그래?”
슬쩍 김지훈을 보는 이준영 과장의 눈에 즐거움이 스쳤다. 김지훈 역시 자신을 철석처럼 믿어 주는 송동화 과장의 말에 쑥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기쁘기만 했다. 더구나 스승과 함께 정식으로 회진을 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나 세상은 정말 녹록지 않았다. 회진이 막 끝났을 때 응급실에서 오늘 당직인 이경석을 찾았다. 환자가 온 모양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이준영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경석과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빤히 보며 눈가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안 따라가고 뭐해?”
이건 또 무슨 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