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편할 틈이 없다 (2)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3년차들이 보이질 않았다. 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이 어색하기만 한 김지훈이 논문이 담긴 디스크를 찾았다.
컴퓨터를 켰다. 익숙한 286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딘가에 삼국지가 숨어 있을 것 같았다. 특유의 노랫가락이 귓가를 울리며, 단순하기만 한 전투 장면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했다.
확실하게 잊은 줄 알았는데 이토록 선명하다니, 정말 강력한 마약이었다.
‘에휴! 그놈의 삼국지는 왜 건드렸을까?’
머릿속이 삼국지로 도배가 됐는데 논문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턱을 괸 채 한동안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지훈의 고개가 까딱까딱 흔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국으로 들어오던 손일석과 이경석이 흠칫 놀랐다.
“세상이 변한 거야, 아니면 지훈이 이 자식이 변한 거야? 이렇게 한가할 때도 있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어린 노무 자식이 형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지훈이가 무슨 태권브이야? 쉴 때도 있어야지, 인마.”
“에이! 형, 그걸 누가 몰라요? 하도 신기해서 그러죠.”
잠결에도 귀는 열고 있는지 김지훈이 웅얼거렸다.
“일석아, 구시렁거리지 마라. 경석이 형 말대로 나도 좀 쉬자. 송동화 선생님 파트는 누구야? 그리고 현수가 누구하고 만나는지 알았어. 서연이다.”
“뭐? 서연이? 확실해?”
“오늘 수술 방에서 봤는데 감이 딱 왔어. 십중팔구야. 어떻게 니가 모를 수가 있을까? 하긴 진지한 만남하고는 관계가 없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손일석의 눈에서 가공할 안광이 번쩍였다. 그대로 책을 덮고는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이경석이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식도 참 희한해. 도대체 관심이 없는 분야가 뭘까?”
그걸 누가 알까?
입맛을 다시던 이경석이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송동화 선생님 파트는 왜 결정이 안 나지? 누가 맡든 일도 많아지고, 여러모로 골치 아프게 생겼다. 어이구! 그 파트 오더하고 드레싱 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하여간 일석이, 이 자식은 잘도 빠져나가.”
“형, 오늘은 내가 다 했어요.”
이경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알아서 척척 일을 하는 김지훈이 믿음직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과연 그런 마음이 다일지는 두고 볼 일이긴 했다.
그날 밤, 유석재가 모든 전공의들을 불렀다.
“그동안 백 일 당직 서느라 수고했어. 내일부터 1년차들도 주중 오프 가자. 단,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취소될 수 있으니까 긴장 풀면 안 돼. 박순용 선생님이 신경 좀 쓰세요.”
지옥 같은 100일 당직을 무사히 끝낸 1년차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김지훈과 박순용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즐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그날 밤 단 한 번도 응급실 콜을 받지 않았다. 환자야 있었겠지만 일이 년차 선에서 모두 끝난 것이다. 한가함까지 쭈욱 이어졌다.
***
서울 병원에서의 첫 월요일 근무가 시작됐다.
4년차까지 총 15명의 전공의들이 긴장된 얼굴로 회진을 기다렸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첫 근무를 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금경태 과장 때문이었다. 금경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삼사 년차들의 굳은 표정에 일이 년차들도 덩달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석아, 과장님이 누구랑 올라올까?”
“형, 답은 이미 나왔죠. 전종훈 선생님이 함께 올라오는지가 관심사 아니겠어요? 만일 과장님 라인이라고 해도 균형추는 이미 기울었잖아요.”
“하긴 차기 과장이 될 만한 교수님들은 다 반대쪽이네.”
지금까지 회진 때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곧 누가 누구 편에 섰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금경태 과장은 자신을 따르는 교수들과 함께 먼저 올라올 테고, 당연히 반대쪽은 시간 차이를 두고 회진을 돌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훈이 말없이 눈가만 좁혔다.
‘3년차가 되니까 별게 다 보이네. 다 해야 열 명인데,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다고.’
착잡한 일이었다. 스승과 송재덕 과장이 조금도 쓸모가 없는 이런 악습을 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 금경태 과장이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긴 했다.
땡! 땡!
엘리베이터 두 대가 동시에 멈췄다. 덜커덩!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교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경태 과장과 오상익 교수가 함께 내렸다. 그 옆에 구영선 교수까지 보였다. 평소 오상익 교수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유석재가 재빨리 눈짓을 했다. 4년차 3명을 포함한 9명의 전공의들이 자세를 똑바로 하며 회진을 준비했다.
그때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 그리고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내렸다.
삼사 년차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임 교수급들이 한꺼번에 모두 올라오다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특히 대장 파트 4년차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열로는 송재덕 교수와 회진을 돌아야 하지만, 엄연히 구영선 교수 파트였기 때문이다.
송재덕 과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저었다.
“허허! 파트대로 하면 된다. 파트대로. 난 경석이랑 회진 돌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빨리 가서 회진 돌아. 천천히 돌아라, 천천히.”
다행히 가장 당혹스러운 상황이 해결됐다. 머뭇거리던 4년차가 구영선 교수 옆에 섰다. 남은 전공의들도 각자 맡은 파트의 교수들과 회진을 준비했다. 제법 넓은 스테이션이 하얀 가운으로 바글거렸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너무 소란스럽네.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분위기가 이게 뭐야? 쯧! 유석재, 환자 보자.”
몇몇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치프들이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자신이 존경하는 교수들이 금경태 과장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에 3년차들은 입이 찢어졌다. 그중에서도 김지훈이 유독 기뻐하고 있었다. 뺨까지 벌게지며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맞아. 여기가 바로 스승님이 계실 자리야.’
“김지훈, 환자들 별일 없지?”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금경태 과장이 옆에 있었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은커녕 도리어 여유까지 느껴졌다.
옆에 선 송재덕 과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입가에 걸린 느긋한 미소는 천안에서나 서울에서나 변함이 없었다.
“회진 돌자.”
김지훈이 기록한 차트다. 굳이 들춰 볼 이유가 없는지 이준영 교수가 곧바로 회진을 돌았다. 환자가 적은 송재덕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뒤를 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환자들과 인사를 나누며 회진을 돌았다. 중간에 금경태 과장과 마주쳤다. 찬바람이 휭 하고 불었지만 이준영 교수는 신경을 쓰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꿎은 전공의들의 표정만 어색해졌다.
회진이 끝나 가며 하나둘 스테이션으로 다시 돌아왔다.
“야! 좋다, 좋아. 이 교수, 신 교수, 좋지? 우리가 이렇게 다 모여서 환자를 본 게 얼마 만이야? 이십 년도 넘었네. 강산이 두 번도 넘게 변했어. 두 번이 뭐니? 두 번이! 우리도 나이 참 많이 먹었다. 그치? 이 교수, 그렇지?”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선생님하고 신 교수까지 함께 있으니까 정말 든든합니다.”
이준영 교수의 말에 신기동 교수도 마치 전공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나는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그럼, 당연하지. 말하면 입만 아파. 어! 지훈아, 니가 이 교수 파트지? 열심히 해라, 열심히. 간담도를 잘 알면 대장을 더 잘할 수 있어. 아암! 그렇지. 지훈아, 맞지? 내 말이 맞지?”
인사도 제대로 하기 전에 대장 타령이다. 이준영 교수가 슬며시 사이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무척 난처했을 것이다.
김지훈은 보지 못했지만 찌릿한 눈길에 송재덕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딴청을 피웠다.
“근데 이 교수는 왜 안 오니? 환자가 많구나, 많아. 근데 이 교수, 둘 다 이 교수라 헷갈린다. 헷갈려. 뭐라고 부를까? 그냥 이름 부를까? 어때? 괜찮을까?”
기분이 확 뜨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 사나운 송재덕 교수였다. 다들 그 사실을 알기에 웃기만 했다.
곧 이혁민 교수도 회진을 끝냈다.
“아이고! 이렇게 선생님들과 얼굴을 맞대니까 정말 좋네요. 잠깐 기다리시라고 한 건 다른 일이 아니라 송동화 과장 파트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3년차 중 한 명이 맡아야 할 것 같은데 누가 좋을까요? 수술은 당직들이 돌아가면서 들어간다고 해도 환자는 한 명이 관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헉’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3년차들이 일제히 실눈을 뜨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단순히 환자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재수 없으면 당직이 아닐 때도 응급 수술을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다들 하고 싶은 파트를 맡았기에 정신이 분산되는 것 역시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근데 말이야. 경석이 얘는 나이가 많잖아. 두 파트 일을 하기에는 힘이 달릴 거야. 빼자. 빼자. 나이 먹었는데 어린놈들보다 일이 많으면 그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다. 경석아, 서럽지? 맞지?”
나이 때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이경석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제 나이가 뭐가 많다고 그러세요?”
“그래그래. 너 나이 많다, 많아. 나랑 대장만 열심히 하자. 열심히. 넌 나이가 많아서 더 열심히 해야 돼. 실력이 없으면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게 세상이야. 암! 그렇고말고. 지훈아, 내 말이 맞지? 그치? 대장이 좋다. 허허!”
무슨 이유인지 송재덕 과장은 이경석을 손안에 꼭 잡고 싶어 했다. 다른 교수들도 별반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2명 남았다. 빠져나갈 핑계도 없고, 송재덕 교수처럼 일을 빼 줄 이준영 교수나 신기동 교수가 아니었다.
결정권이 없는 김지훈과 손일석이 무의미한 신경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둘 다 전 텀에 고생을 무지하게 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혁민 교수가 무심코 송동화 과장 환자의 차트를 펼쳤다.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해결책을 찾은 것 같았다.
“이 환자 오늘 오더 누가 냈나?”
순간 너무 큰 실책을 범했다는 생각이 든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등짝에 한기가 돌고 있었다.
“제가 냈습니다.”
“그래? 그럼 드레싱은 누가 했나? 일석이 니가 했나?”
손일석이 애써 표정을 감추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힘이 없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한 김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책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했습니다.”
“지훈이 니 환자 참 열심히 보네. 마음에 든다. 이준영 선생님, 지훈이가 이렇게 열의를 보이는데 어떻게 하죠? 사실 일석이는 신 교수와 전 교수 파트를 맡아서 일이 많습니다.”
그럼 김지훈은 일이 적나?
이준영 과장이 본격적으로 수술을 하게 되면 응급실 업무까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실리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적어도 김지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하겠다는 놈 시켜야지. 김지훈, 송동화 과장 환자도 열심히 봐.”
이 한마디로 게임은 끝났다.
‘스승님! 왜 이러십니까?’
졸지에 두 파트를 맡게 된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편한 날은 단 며칠도 기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교수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가만히 보니 이미 답을 정하고 올라온 것 같은데, 굳이 확인 사살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대장을 하려면 많이 보고 배워야 한다. 지훈이 너 운 좋다. 운 좋아. 대장 하자, 대장. 경석이랑 둘이 하면 완벽하다. 완벽해. 그치? 경석아, 어때? 너도 좋지? 지훈이 싫어? 너 혹시 지훈이 싫어하니?”
“아닙니다, 선생님. 저 지훈이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선생님, 수술 안 들어가십니까?”
신 나서 입을 열려던 송재덕 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응? 수술 들어가야지. 가자. 경석아, 수술하러 가자. 지훈아, 할 일 없으면 수술 방에 와서 구경해. 많이 보면 그것도 실력이야, 실력. 이 교수 파트도 돌고, 송동화 과장 파트도 돌고, 구경도 하고 좋다. 좋아.”
말없이 웃기만 하던 신기동 교수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요. 수술을 많이 보는 것도 실력이죠. 손일석, 너도 할 일 없으면 놀지 말고 수술을 봐. 알았어?”
엄한 말에 손일석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신기동 교수의 눈길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여하튼 그 말이 씨가 된 걸까?
단둘이 남자 이준영 교수가 갑자기 수술 스케줄을 찾았다. 그러고는 빨간 볼펜으로 수술 3개를 체크했다. 라파로 하나에 대장암과 위암 수술이었다.
“오늘은 이 수술 들어가서 참관해.”
“예? 참관이요?”
“송재덕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 이것도 실력을 쌓는 방법 중 하나야. 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수술을 많이 봐야 해. 일 있으면 외래로 연락하고.”
분명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보다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합니까? 혹시 손이 거칠다는 것 때문입니까?”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를 보는 마음은 어떨까?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고 기쁠 것이다.
이준영 교수는 김지훈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문제도 있지. 하지만 넌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때야. 배워야 할 것을 정해 준다면 그것만 보게 되는 게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수술을 보면서 무엇을 얼마나 많이 배울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야. 구체적인 것도 배워야 하지만, 이제는 전체적인 시야를 가졌으면 한다. 넌 우리 모두를 넘어서야 해.’
제자를 향한 스승의 희망이자 확신이었다. 속마음은 길어도 말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짧은 이준영 교수였다. 예외는 없었다.
“그건 네 몫이야.”
정말 난해한 과제였다. 단 하루도 안 돼 세상이 변했다. 한가롭기만 했던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홱 돌아서는 이준영 교수를 보며 김지훈이 멍하니 입만 벌렸다.
도대체 왜 쉴 틈이 없는 걸까?
운명일지도 몰랐다. 타고난 팔자가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