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06화 (406/1,329)

제3화 편할 틈이 없다 (1)

총치프라고 해도 전공의인 유석재가 이런 생각까지 한다는 것을 금경태 과장은 알까?

혹시 유석재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르치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엄격해야 하지만 아랫사람, 혹은 제자들을 편하게 만들어야 할 사람이 교수들이다. 그런 교수들 중에서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이 바로 과장이다. 그런데 마음을 참 무겁게도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만 줘도 모두 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준영 과장과 송재덕 과장에 새로 온 전종훈 교수까지 크게 확대된 일반 외과를 잘 이끈다면 정말 대단한 이력이 될 것이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 굴러 들어온 복을 왜 스스로 걷어차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휴! 나 같으면 만세를 부르며 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텐데. 그러면 저절로 존경까지 받을 거 아냐.’

알 수 없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하긴 제자의 논문까지 빼앗는 사람에게 이런 기대는 금물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유석재가 묘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마침 홍재순이 들어왔다. 김지훈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반색을 했다.

“야! 지훈이 왔구나. 잘 지냈지?”

“예. 선생님도 잘 지내셨죠? 전 죽을 뻔했어요.”

비슷한 일을 당해서인지 유난히도 서로를 반가워했다. 두런두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던 홍재순이 서울 병원에 대한 말이 나오자 얼굴을 굳혔다.

“지훈이가 금경태 파트 일까지 하기로 했다고? 하긴 그게 우리한테는 편할지도 모르겠다. 각자 자신이 맡은 파트에만 전념하게 하고, 다른 파트는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금경태는 분명히 자기 파트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에휴! 지훈이 이 자식은 어디를 가나 참 힘들게 일하네. 그래도 잘할 수 있지?”

“그럼요.”

김지훈이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웃으면서도 유석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경태라고 했는데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덤덤했다.

“그게 꼭 줄 잘 서라는 말처럼 들리니까 문제죠. 송재덕 과장님, 이준영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 신기동 선생님을 콕 집어서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에이! 나도 모르겠습니다. 형이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겠어요?”

“말이라도 고맙다. 근데 지훈아, 강기웅 과장은 어때? 들리는 말로는 금경태 과장 라인이라던데.”

금경태 과장 라인이라는 말에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리고 있는 홍재순은 눈과 귀를 활짝 열고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훨씬 더 병원 사정에 밝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손일석의 말대로 혼자만 장님이었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을 했다.

“현수가 고생 좀 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엄청 편하게 일을 할지도 모르긴 하겠네요.”

다들 당연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신동석 이사장과 금경태 과장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홍재순이 혀를 찼다.

“앞으로 전종훈 선생님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 대충 답이 나오겠지. 석재야, 넌 금경태가 전공의들에게 또 애먼 짓 하는지 잘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훈아, 석재도 너하고 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어.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그래서 석재 형의 말투가 전과는 달랐구나.’

금경태 과장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선배였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며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갑갑하고 찜찜하기만 했다.

금경태 과장의 환자를 파악하던 김지훈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구미에서 세 과를 전담했던 김지훈이었다. 더구나 위로는 유석재가 있고, 아래에는 서도진과 박순용이 있다. 핵심만 정확하게 파악하면 힘들 것이 없었다.

‘금경태가 어떻게 나오든,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돼. 환자도 이 정도는 가뿐하네. 그나저나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월요일부터 뭘 하고 사나? 수술 참관이나 할까? 에이! 고민하지 않게 스승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본격적으로 수술을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응급 수술과 정규 수술은 다르다. 스승과 함께하는 수술은 더욱 그럴 것이다. 살짝 흥분되는 기분으로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던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할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단 1분이라도 빨리 연락하는 게 살길이었다. 고경아의 하해와 같은 마음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공중전화를 찾았다. 서울로 복귀했음을 알리고, 오프는 주중 월수금이며, 주말은 2주에 한 번이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또한 당분간은 스승의 수술이 적을 것으로 예상돼 데이트할 시간이 충분할 것이란 의견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고경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지훈 씨, 나 어떻게 하죠?)

난데없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경아 씨, 무슨 일 있어요?”

(네. 나 내일부터 일반 외과 주임 간호사가 돼요.)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후! 좋은 일이네. 난 무슨 일 있는지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야! 경아 씨가 벌써 주임 간호사가 될 때가 됐나요? 축하해요.”

(원래는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선배들이 결혼이다 뭐다 해서 많이 그만뒀거든요. 아후! 가뜩이나 사람도 부족한데, 일반 외과 수술이 엄청 늘 수밖에 없다는 거 지훈 씨도 알잖아요. 당장 내일만 해도 과장님, 송재덕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이 모두 메이저 수술을 올리셨어요. 그나마 구영선 선생님 수술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고경아의 일이 엄청 늘었다. 화목은 더 힘들 수도 있었다. 이준영 과장, 아니 교수, 오상익 교수, 임동완 교수, 신기동 교수에 전종훈 교수까지 얼마나 많은 수술을 올릴지 모른다.

국소마취 수술이라고 해도 간호사들의 업무는 크게 줄지 않는다. 더욱이 주임 간호사라면 수술을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 감독까지 해야 한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힘들어서 어떻게 하죠?”

(밑에 두 명이 있긴 한데, 그나마 한 명은 초짜예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 지쳐서 쓰러지면 지훈 씨가 책임져야 돼요.)

“어휴! 당연하지. 그래도 세상은 어찌어찌 다 굴러가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파이팅해요. 설마 일하다 죽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뭐라고요? 죽지는 않는다고요?)

가뜩이나 심난한 고경아의 마음에 불을 지르다 못해 기름까지 부었다. 급히 말을 돌려 진화를 시도하던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삐삐가 울린 것이다.

“경아 씨, 응급실에서 호출이 왔네요.”

(정말이죠? 아후! 빨리 가 보세요.)

한걱정을 하는 고경아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것이 편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고생한 만큼 보람과 대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김지훈에게는 도리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는 고경아를 더욱 자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술 방에서 봐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아뻬였다.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하고 수술을 준비했다. 물론 손이 거칠다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한동안은 열심히 타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즐거운 마음으로 탈 준비까지 마쳤다.

‘혹시 수술을 주실지도 몰라. 집도를 하면서 타면 손이 거칠다는 말이 무엇인지 더 빨리 알 것 같은데.’

묘한 기대를 품고 수술 방에 올라간 김지훈이 반색을 하면서도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가운 사람과 내심 서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보였다. 올해 마취과 교수가 된 김진호와 3년차인 윤서연이었다.

“와! 김진호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주말에 웬일이세요? 아뻬라 서연이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요.”

“김지훈, 고맙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랬다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앞으로 나랑 서연이가 일반 외과를 전담하게 됐어. 그리고 이준영 선생님께서 정식으로 발령을 받으셨는데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 그게 사람 된 도리잖아.”

김진호는 음성에서의 인연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공연히 고마워진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서연아, 앞으로 잘 부탁해.”

“넌 잘 지냈냐고 묻지도 않아?”

“하하하! 잘 지냈지?”

윤서연이 피식 웃으며 마취 준비를 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일반 외과만이 확대 개편된 것이 아니었다. 수술 방 간호사와 마취과까지 모두 그에 맞춰 인력을 재조정했다. 그만큼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다들 무지하게 바빠지겠네. 나만 한가한 건가?’

좋은 일일까?

한편으로는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동안 고생은 할 만큼 했다. 더욱이 경험상 한가한 시간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잠시의 한가함을 즐겨도 될 것이다.

‘써전에게는 휴식도 중요하다고 하셨다. 이참에 떨어진 체력도 보충하고, 논문까지 확실하게 마무리 짓자.’

잠시 후, 이준영 과장이 올라와 아무 말도 없이 퍼스트 자리에 섰다. 입이 쫙 벌어진 김지훈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는 수술에 임했다.

눈 감고도 할 아뻬 수술이었다.

간만에 김지훈의 수술을 본 김진호가 감탄을 터트릴 정도로 깔끔하게 수술이 끝났다. 윤서연도 눈빛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현수가 초조해할 만도 하네. 구미 생활은 잘하고 있겠지? 휴대폰이 있으면 뭐해? 연락을 해야지.’

“선생님, 역시 지훈이네요.”

“김진호 선생, 아직 멀었어. 김지훈, 손이 거칠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쯧쯧!”

김진호가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다 말고 급히 다물었다. 원래 김지훈을 유독 더 태우는 이준영 과장이었지만 이번에는 혀까지 찼다. 일순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김진호가 재빨리 이준영 과장의 팔을 잡았다.

“잘하기만 하는데 왜 그러세요. 가시죠, 선생님. 제가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커피? 좋지.”

“예. 정식 발령이 나셨는데 인사는 드려야죠.”

이준영 과장과 김진호가 사이좋게 휴게실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고민에 찬 표정을 하자 윤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준영 선생님도 너무 대놓고 총애하시네.”

여자의 본능적인 감각은 무서웠다.

“무슨 소리야? 다 똑같이 대하셔.”

“너도 잘 알면서 시치미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현수가 되게 부러워해. 타는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몰라. 하여튼 현수도 예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으니까 너도 신경 좀 써.”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신현수가 변했다는 말도 그렇지만, 윤서연의 태도가 묘했다. 친구 이상의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입장이 묘하기는 했지만 환영할 일이었다.

“니들 둘이 사귀는구나? 잘됐다.”

대뜸 날아온 말에 윤서연의 볼이 빨개졌다.

“야, 김지훈! 너 지금 뭐라는 거야? 누구 혼삿길 망칠 일 있어? 친구끼리 이 정도 말도 못해? 현수하고는 얼굴 본 지 십 년이 넘었어.”

“그래, 알았어. 아니면 아니지, 민감하기는.”

운서연이 흥흥거리며 새침을 떨었다. 그 모습에 더욱 확신을 가진 김지훈이 남몰래 웃었다.

어인 일인지 어색한 마음이 싹 사라졌다. 손일석이 들으면 난리가 날 것이다.

피식피식 웃던 김지훈이 회복실에 들어서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손이 거칠다. 수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결국 이 말씀인데, 도대체 무엇을 보고 계시는 거지? 답을 알려면 스승님 수술을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곤란하네.’

유난히 한가한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고민만 깊어졌다.

묵묵히 의국으로 올라간 김지훈의 눈에 수술 스케줄이 들어왔다. 금경태 과장은 라파로만 3개를 올렸다. 송재덕 과장은 첫날부터 대장암 수술이 있었고, 이혁민 교수 역시 위암 수술이 예정돼 있었다.

차트를 뒤적이며 미리 수술 준비를 하는 이경석.

혈관과 유방 수술 책을 펼치고는 괴로워하는 손일석.

다들 바빠 보였다. 생각해 보니 가장 한가한 사람이 김지훈 자신이었다.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휴식 역시 소중한 시간이었다.

카르페 디엠!

언제부턴가 생활의 모토가 된 말을 중얼거린 김지훈이 오더를 내고는 드레싱을 하러 나갔다.

치료를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동화 과장 환자들의 드레싱이 전혀 돼 있질 않았다.

“간호사, 그동안 이 환자분들 치료는 누가 했어요?”

“어머! 3년차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텀이 바뀌어서 깜빡하신 모양이네요. 어떻게 하죠?”

왜 물었는지는 모르지만, 배시시 웃으며 당연한 것처럼 드레싱 준비를 했다. 김지훈도 3년차니 그럴 수 있었다.

‘우리 일이니까 일단 하긴 하는데, 송동화 선생님 파트가 누군지 아직 못 정했나?’

내친김에 양쪽 파트 환자를 모두 치료한 김지훈이 의국으로 들어오자마자 손일석을 찾았다. 다른 일이 있는지 3년차들은 아무도 없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의 파트 오더까지 냈다.

‘어떻게 되는 건지 듣고 낼 걸 그랬나?’

어째 스스로 뭔가 자초한 것 같았다. 가슴속을 떠도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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