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때론 폭풍처럼 말이다 (2)
김지훈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누가 스승 아니랄까 봐 밤새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겼건만, 보자마자 어려운 문제 하나를 툭 던졌다. 스승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빠름과 거침은 다르다? 당연히 다르겠지. 하지만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수술에 임한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내 손 어디가 거칠다는 말씀이지?’
한동안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갑자기 씨익 웃었다. 어차피 좀 더 확실하게 타야 알 일이었지만, 불현듯 예전보다 타는 수준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세한 문제라고 지나칠 스승님이 아니신데 지적을 안 하시네. 그만큼 내가 많이 발전했다는 말이겠지?’
의국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피식피식 웃어 댔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었지만 1년차들은 물론 손일석과 이경석까지 있었다. 눈알이 까칠할 정도로 피곤했지만 간만에 얼굴을 보니 반갑기만 했다.
“주말인데 다들 안 자고 뭐해? 경석이 형, 잘 지내셨죠? 일석아, 너도 잘 지냈지? 나는 잘 지냈으니까 구미 생활은 묻지 마라.”
강기웅 과장에 대한 말이 나올까 봐 사전에 입을 막았다. 아무리 이상하고 밉게 보여도 불과 일주일이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지도 못한다. 당장 부딪쳐야 할 신현수는 반드시 상황을 알아야 하기에 예외일 뿐이었다.
“궁금하지도 않아, 인마.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오자마자 수술을 들어가니? 하여간 저 자식 때문에 이번 삼 개월은 더 뺑이 치게 생겼어. 경석이 형, 가급적이면 멀리하는 게 좋으실 겁니다.”
“일석아, 오자마자 적시에 날 딱 구해 줬는데 왜 멀리해? 지훈이 때문에 난 마음이 편해진다. 이준영 선생님 수술은 안 들어가도 되잖아. 거기다 신기동 선생님 수술까지 피했으니까 이건 완전히 복 터진 거야.”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왜 이래요? 신기동 선생님은 양반이십니다.”
“양반? 니 눈에만 그렇지, 인마.”
언제나 즐거운 동기들이었다. 그런데 말이 좀 이상했다. 당직은 돌아가면서 하는데 스승의 수술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응급 수술 때문인지 스승이 어떻게 근무하는지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후! 피곤하다. 일석아, 이준영 선생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 주고, 내가 알아야 할 거는 요점만 빨리 말해.”
“희한한 놈일세. 니가 아무리 이준영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순서가 바뀐 거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손일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지훈아, 지난 일주일 동안 나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울 병원의 정세가 급변했어.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전체적인 판세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해. 하긴 너야 서울에 있었어도 장님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형이 하는 말이나 잘 들으면 되겠다.”
“뭔 서론이 그렇게 길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장 과장님과 변 과장님이 서울로 오셨으니까 일단 어느 정도 눈치는 챘을 거야. 서울 병원 외과 계열이 발칵 뒤집혔다. 과를 막론하고 교수님들이 갑자기 충원된 것도 모자라, 때 아닌 오월 말에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는 거 아니냐. 나의 예리한 직감으로 판단할 때 이건 뭔가 대단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리야.”
김지훈이 하품을 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일석아, 니 말은 잘 알겠는데 천천히 알아도 될 일은 나중에 듣자. 우리 과가 어떻게 변하는 건지만 설명해.”
“어휴! 넌 그래서 문제야, 인마. 전체적인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우리 과 문제도 확실하게 보이는 거야.”
짜릿한 눈빛이 손일석의 이마에 꽂혔다.
“알았어, 인마. 째려보기는. 자, 그럼 시작합니다. 다음 주부터 일반 외과가 확 바뀝니다. 일단 송재덕 과장님께서 과감히 천안 병원장 자리를 차 버리시고 서울 병원 대장 파트를 맡으셨습니다. 경석이 형이 대장 파트야. 그리고 신기동 선생님도 별개 파트로 독립하셨습니다. 나 손일석이 가장 어렵다는 혈관 파트를 맡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음하하하!”
혈관 파트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정말 최고다.
“파트가 늘어났네. 그럼 일이 년차가 모자라잖아.”
“너까지 우리 세 파트는 4년차 선생님들이 관여를 안 해. 따라서 2년차는 아예 없고, 1년차도 수술만 들어오게 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잘된 거 아냐? 사실상 치프잖아. 하하하! 1인 치프. 어딘가 고독해 보이지만 멋지지 않아? 하여튼 넌 그 덕에 간담도와 응급실을 함께 맡은 이준영 선생님 파트를 맡게 됐어. 그 밑에서 조용히, 혼자, 소리 없이 활활 타 죽으면 되는 거야.”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외래 진료를 하게 된 것이 마냥 잘된 일만은 아니었다.
“외래와 응급실을 같이 맡으신다고?”
“응. 일주일에 두 번 화목하고, 주말도 이 주에 한 번은 서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 너는 그때 당직을 서면 돼. 어떻게 보면 송동화 선생님을 고려한 조치 같기는 한데, 이준영 선생님도 꽤 힘드실 거야.”
손일석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스승은 월수금에는 진료를 하고, 화목에는 정규 수술과 응급실로 24시간 근무를 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수술을 잡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일과가 될 것이다.
‘어휴! 이건 아닌데. 그럼 그렇지. 금경태 과장이 조용히 지나갈 사람이 아니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김지훈의 속마음도 모르고 손일석의 말이 쭈욱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더 있었다.
“유방하고 갑상선을 맡을 교수님이 새로 오셨어. 전종훈 선생님이라는데, 아무래도 금경태 과장님하고 뭔가 끈이 닿은 것 같아. 경석이 형, 그렇죠?”
“응. 나도 그런 말을 듣긴 했어.”
‘강기웅 과장님에 전종훈 교수님이라! 그럼 어쨌든 두 자리를 내주고 두 자리를 얻은 거네. 속사정이 뭔지는 몰라도 역시 금경태야. 아니네. 이혁민 선생님의 진료가 줄었잖아?’
“이혁민 선생님이 유방 파트에 꽤 신경을 쓰셨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경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혁민 선생님 문제는 어떻게 된 건지 일석이나 나나 궁금해 죽겠다. 힘드시기는 했겠지만 그동안 한 번도 새로운 교수를 뽑아야 하겠다는 말씀도 없으셨거든. 아무튼 이번 개편으로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받은 분이 이혁민 선생님인 것만은 확실해.”
진료 영역이 줄면 그만큼 환자나 수술이 준다. 그것은 곧 발언권이 준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진료를 세분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 유방 파트는 몇 년차가 맡아?”
“일이 제일 적은 놈이 누구겠어?”
이경석의 눈길이 손일석에게 향했다. 업무 부담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임 교수와 손발을 맞춘다는 것은 아무리 성격 좋은 손일석이라도 한동안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만일 강기웅 과장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난리 좀 날 것이다.
“일석아, 긴장 좀 해야겠다.”
“지훈아, 내가 누구니. 신기동 선생님 파트 치프야. 그 정도는 가뿐하지 않겠어?”
손일석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말대로 될지 두고 볼 일이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간담도 파트는 금경태 과장과 이준영 교수.
위장관 파트는 이혁민 교수.
갑상선 및 유방 파트는 전종훈 교수.
대장 파트는 송재덕 과장과 구영선 교수.
항문 파트는 오상익 교수와 임동완 교수.
혈관 및 신장 파트는 신기동 교수.
응급실은 이준영 교수와 송동화 과장.
그중 4년차가 없는 파트는 모두 3년차들이 전담한다는 말이었다. 송재덕 과장에게 4년차 치프가 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응급실 과장은 뜻밖에도 송동화 교수였다. 하긴 스승이나 송재덕 과장은 자리나 형식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긴 했다.
‘교수님 세 분이 충원돼서 모두 열 분이네. 그리고 난 스승님 파트만 맡으면 된다, 이거지?’
모르긴 몰라도 대대적이고 확실한 개편이었다. 앞으로의 일과는 예전과 확실히 다를 것이다.
문득 스승과 단독으로 3개월 동안 일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경석이 실눈을 떴다.
“어째 너 무지하게 좋아하는 것 같다. 희한한 놈이야. 불길에 타 죽는 게 그렇게 좋아? 일석아, 이 자식 변태 아냐?”
“그런 끼가 있긴 하죠. 타면 탈수록 좋아하는 놈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요? 아니면 이준영 선생님이 좋아서 죽겠든지. 어째 내가 신기동 선생님을 바라보는 눈빛하고 좀 다르지 않아요?”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랐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일석아, 그럼 내가 볼 환자는 기존의 이준영 선생님 환자하고 오늘 수술한 환자뿐이네.”
“우린 이미 어떻게 일을 할지 결정이 됐지만, 넌 유석재 선생님의 뜻에 달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있잖아.”
손일석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머리 3개가 모였다.
“지훈아, 금경태 과장님 조심해라. 이번 발령 발표가 나면서 얼굴이 완전히 변했어. 아직까지 구체적인 액션은 취하지 않았지만, 곧 터질 것 같아.”
“이준영 선생님 때문이지?”
이경석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송재덕 과장님도 마찬가지야. 들리는 소리로는 외래에서 이혁민 선생님하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대. 이번 개편을 주도하고 건의한 사람이 이혁민 선생님이라는 소문이 있거든. 그래서 파트가 분리됐는지도 몰라. 아무튼 난 파트가 다르니까 부딪칠 일이 없지만, 넌 조심해. 애먼 불똥에 타 죽는 수가 있어.”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금경태 과장 문제라면 면역이 됐는지도 몰랐다.
“걱정 마세요. 어차피 처음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어휴! 너도 이럴 때 보면 참 강심장이다.”
금경태 과장이 거론되자 자연스럽게 홍재순이 떠올랐다.
“홍재순 선생님도 서울이죠? 어느 파트예요?”
“오상익 선생님 파트. 사람이 확 변하더니 항문에 아주 제대로 꽂힌 것 같더라.”
“아버님이 항문 전문 병원 하시잖아요. 잘됐네.”
잠시 동안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었다. 주말은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보충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이내 하품 소리가 들리고 3년차들이 모두 사라졌다.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극심한 피곤 앞에 장사는 없었다. 함께 숙소로 올라간 김지훈이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금경태 파트는 유석재 선생님이 계시니까 거의 부담이 없을 테고, 스승님 파트만 맡으면 당장은 해야 할 일이 반의반도 안 되겠네. 일이 주 정도는 편하려나?’
불안한 것인지, 기쁜 것인지 김지훈이 내내 뒤척였다.
간만에 한가로운 주말 아침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와서 그런지 이준영 과장의 환자는 10명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꼼꼼하게 봐도 한 시간이 채 넘지 않았다. 응급실마저 조용했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모두 풀라고 환자들까지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다만 유석재와 파트 문제를 상의하며 골머리를 썩긴 했다.
“지훈아, 이준영 선생님 파트만 도는 게 원칙이긴 한데, 과장님 눈총을 견딜 수 있겠어? 이제는 우리도 과장님과 이준영 선생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확실하게 알고 있어. 게다가 별로 친하지 않은 송재덕 과장님까지 오셨으니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을 거야. 거기에 너까지 파트 구분을 하면 상황이 정말 안 좋을 것 같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파트 구분을 했는데 제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죠? 새삼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유석재의 얼굴에는 애먼 불똥 이상의 것이 있었다.
“과장님이 너한테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 들었어? 원래 3년차에서 한두 명 정도 찍어서 밑에 두는 사람이야. 솔직히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다들 확실하게 따랐어. 근데 지금 상황에서 니가 만일 과장님 말을 안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 전과는 아주 다를걸? 이젠 네가 이준영 선생님과 관계가 좀 깊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는데 과장님이 모를까?”
가뜩이나 이준영 과장과 관계가 좋지 못한 금경태 과장이었다. 이제 와 자신에게 왜 눈독을 들이는지는 몰라도 눈에 벗어나게 행동한다면 분위기는 엉망이 될 것이다.
결국 그 여파가 김지훈만이 아니라 파트 전체, 혹은 과 전체에 미칠지도 몰랐다.
총치프인 유석재는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눈가를 찌푸리며 고민하던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그럼 제가 과장님 파트를 같이 돌면 될까요?”
“힘들겠지만 아무래도 그게 좋지 않겠어? 회진은 어쩔 수 없이 따로 돌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그 외의 일은 그냥 예전처럼 과장님 파트 3년차라고 생각해. 그게 너나 우리한테 모두 좋을 것 같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총치프의 위세를 빌려 김지훈에게 과중한 일을 맡긴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럴 유석재도 아니었고, 그 마음을 모르는 김지훈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좋게, 마음 편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간담도를 더 배울 수 있다면 나쁜 일만은 아니네.’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저도 간담도를 더 배우고 싶은 참이었거든요. 이준영 선생님하고 과장님 환자까지 다 보면 많이 배우겠죠?”
유석재가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니가 내 후배란 사실이 정말 고맙다.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우리 열심히 해 보자. 어쩌면 의국 분위기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지도 몰라. 솔직히 과장님이 우리 인생을 모두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잖아.”
말속에 담긴 감정이 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석재의 묘한 표정과 말투가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