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때론 폭풍처럼 말이다 (1)
간담도 진료 - 월수금 - 일반 외과 교수 이준영
간담도 진료 - 화목 - 일반 외과 과장 금경태
금경태 과장과 함께 당당하게 적혀 있는 스승의 이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실력이든 인품이든, 어느 면을 보아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눈에 티끌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가가 아리고 축축해졌다.
입술을 꽉 깨문 김지훈이 한동안 스승의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성 병원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아껴 주고 가르쳐 준 스승과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은 먹먹하기만 한데 심장은 달리는 열차처럼 쿵쾅거렸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때였다. 스승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제자인 자신은 최선을 다해 간담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스승이 큰 스승님에게 그랬듯 말이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석상처럼 서서 우두커니 상념에 젖었던 김지훈이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남은 진료 일정표를 보던 김지훈이 또 하나의 놀라운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 진료 - 화목 - 송재덕 교수
“과장님까지 서울로 올라오신 거야?”
끈덕지게 남아 있던 피곤까지 사라지며 잠이 확 깼다.
천안 병원 병원장이 된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송재덕 과장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장에서 갑자기 일개 교수로 발령이 났다면 분명 좌천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과실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랬다면 구미까지 소문이 허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게다가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니 좌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모호했다.
도대체 어떤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 일석이나 경석이 형을 만나 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겠지? 이거 나한테는 너무 좋은 일이지만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도리어 불안하네.’
일반 외과 전체에 무엇인가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쨌든 김지훈에게는 최고의 변화였다. 자신을 더없이 아껴 주는 스승과 송재덕 과장이 있다면 더 이상 힘들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바랄 것도 없었다.
‘우아아아! 빠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지훈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힘차게 어퍼컷을 먹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금경태 과장의 진료실 문에 정확하게 박혔다.
당장이라도 손일석을 찾아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승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도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가만, 이렇게 되면 송동화 선생님이 스승님께서 하시던 대로 응급실을 혼자 맡으신 건가? 그럼 스승님은 안 계시겠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병동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뒤돌아섰다. 아무리 피곤해도 응급실 근무를 하고 있을 송동화 교수에게 마땅히 인사는 해야 할 일이었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씨익 웃었다.
월수금에 진료를 한다면 화목이 수술하는 날이다. 일주일에 이틀이라 약간은 아쉬웠지만, 문득 바들바들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생각난 것이다.
‘스승님을 무척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데, 금경태 과장도 어쩔 수가 없었나 보지? 이유가 뭘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네. 이틀 진료면 수술은 삼 일, 삼 일 진료면 수술은 이틀. 하하하! 어느 쪽이 자기한테 유리한지 고민이 많았겠어. 송재덕 선생님하고는 또 어떨까?’
지금도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잠을 설치고 있을 것이 빤했다. 스승에 송재덕 과장까지 있다면 예전처럼 함부로 행동하지도 못할 것이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홍재순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당분간은 살얼음처럼 간당간당하고 불안한 분위기가 이어지겠지만 고소해 죽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등 뒤가 든든해지면서 불쑥 힘이 난 김지훈이 바람처럼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은 지역을 막론하고 응급실인 이유가 있다. 환자들이 버글거렸다.
급히 당직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송동화 과장이 아니라 스승이 환자를 보며 보호자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경석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슬며시 옆에 서자 이경석의 얼굴에 급격히 화색이 돌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이준영 과장이 힐끗 눈길만 주었다.
“왜 이제 와?”
마치 방금 전에 본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목소리나 말투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기대도 안 한 일이긴 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왜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걸까?
‘설마 응급실 근무를 병행하시는 건가? 이렇게 되면 밤낮으로 일을 하셔야 하는데 더 힘드시잖아.’
순간 걱정이 앞선 김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구미에서 일이 늦게 끝났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송동화 선생님은 어디 가시고 왜 응급실 근무를…….”
말이 중간에서 뚝 잘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지금 바로 수술 준비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준영 과장이 당직실로 들어가자마자 이경석이 활짝 웃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야! 지훈아! 니가 날 살렸다. 딱 때 맞춰 왔어. 오늘은 니가 당직이야. 아니구나. 앞으로 이준영 선생님 당직 때는 쭉 당직을 서면 돼.”
“형,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돌아가면서 당직 서는 거 아니에요? 오늘은 송동화 선생님이 쉬는 날이에요?”
“이따가 자세히 얘기해 줄게. 이준영 선생님을 제일 잘 아는 놈이 왜 이렇게 꾸물거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수술이나 준비해, 인마. 이 환자 탈장인데 장이 배 속으로 들어가질 않네. 시간이 꽤 지나서 일부는 잘라야 할 수도 있어. 수술 끝나고 의국에서 보자. 근데 넌 치프가 아니라 1년차 생활을 했니? 어떻게 순용이보다 몰골이 더 험악해?”
이경석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가운도 입지 못하고 환자를 보았다. 우측 서혜부에 주먹만 한 덩어리가 만져졌다. 증상이 꽤 오래됐는지 피부까지 퍼렇게 죽어 있었다.
수술 스케줄을 내야 할 1년차는 어디에 있는 걸까?
누군가 흉부 사진을 들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박순용이었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경석 선생님은 어디 가셨어요? 흉부 사진 확인하는 대로 스케줄 내자고 하셨거든요.”
김지훈이 흉부 사진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무슨 소린지는 몰라도 앞으로 이준영 선생님 당직 때는 내가 당직이라네요. 혈액 검사에 이상 없으면 스케줄 바로 내세요.”
구미에서 막판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이 시뻘겠다.
“어이구! 선생님도 정말 힘드시겠습니다.”
박순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케줄을 작성했다.
김지훈이 멍하니 박순용을 보다 말고 피식 웃었다. 3년차가 1년차한테 힘들겠다는 말을 듣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수술 방이다. 김지훈이 눈을 감고 수술 과정을 상기했다. 언제나 긴장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더욱더 바짝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은 정식으로 일반 외과 교수로 근무한다는 사실에 절대 흥분하거나 동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지난 3개월 동안 제대로 배웠는지 더욱 꼼꼼하게 확인할 것이다. 만일 3년차로서 단 하나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그대로 불길을 날릴 것이다. 외래 진료에 관한 일은 물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피부와 근육 층에 이어 탈장 주머니를 열자 꺼멓게 죽은 소장이 보였다. 뜨거운 물을 부으며 자극을 주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거해야 할 소장의 길이만 40센티미터가 넘었다. 배를 열지 않고서는 안전하게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김지훈이 재빨리 대답을 했다.
“배를 열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개만 끄덕인 후 뒤로 빠졌다.
수술 준비를 다시 하던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환자가 너무 늦게 오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운이 없는 경우였다.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사람도 소장이 죽어 가는 통증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그런 통증까지 참아 내거나, 혹은 경미하게 느끼는 환자들이 있었다.
아픈 것은 아픈 대로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이런 통증을 무시할 수 있었다니 사람 몸이란 게 참 희한해. 그래도 전신 상태가 좋으니까 다행이네.’
수술이 재개됐다. 죽은 소장을 포함해 대략 50센티미터 정도를 잘라야 했다.
장 겸자로 소장을 잡고 나뭇가지처럼 뻗은 혈관들을 차례로 묶었다. 이준영 과장의 손은 언제 보아도 빠르고 부드러웠다. 가장 배우고 싶은 손이었다.
‘스승님 손은 정말 달라.’
내심 감탄을 하며 최선을 다해 퍼스트를 섰다. 수술이 거의 끝나 갈 때까지 이준영 과장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벌써 몇 마디는 들었어야 하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네. 드디어 스승님에게 인정을 받는 건가?’
구미에서 치프 생활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는 사이, 이준영 과장이 피부까지 다 봉합을 했다. 왜 배를 닫는 과정까지 직접 한 걸까?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수술을 들어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여튼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드레싱을 하며 슬며시 눈치를 보던 김지훈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준영 과장이 벼락처럼 한마디를 날렸다.
“김지훈, 도대체 구미에서 뭘 배운 거야?”
김지훈이 눈만 말똥거렸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준영 과장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손이 빠른 것과 거친 것은 달라. 치프까지 한 놈의 손이 아직도 이러면 어떻게 수술을 맡겨?”
김지훈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이 거칠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했고, 수술 부위도 깔끔하기만 했다. 집도의의 혼자만의 손으로는 수술 부위가 이렇게 깔끔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혀를 차며 수술실을 나갔다. 정말 처음부터 3년차가 될 때까지 한결같은 모습만 보이는 스승이었다.
‘못 보는 사이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이 정도면 소소한 것들은 알아서 배울 테지? 이제 손을 다듬고, 집도의로서 책임감과 자세만 확실히 알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은 없겠어. 너무 빠른 게 마음에 걸릴 정도라니.’
이준영 과장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김지훈은 자신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다. 그러나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에는 감탄과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과유불급이란 옛말이 공연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훈이가 자만할 놈은 아니지. 만에 하나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올바른 길로 인내하는 것 또한 스승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이준영 과장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김지훈에게 남은 1년 남짓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했다. 세부 전공을 간담도로 택했고, 어쩌면 전적으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마저 들 정도였다.
사실 송재덕 과장이 올라온 데다 송동화 과장까지 이해를 하면서 응급실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서겠다고 자청을 했다.
외래 진료를 시작해도 한동안은 진료 환자나 수술 건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김지훈이 할 일은 크게 줄 수밖에 없다. 외과 전공의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배울 수가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정식으로 간담도 파트 외래 진료를 맡은 이상, 자신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는 금경태 과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에게 득보다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막아 주는 것 역시 스승의 책임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깊은 숨을 내쉬는 순간 누군가 조용히 달려왔다. 김지훈이었다. 마음과는 달리 목소리는 무뚝뚝하기만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입술을 살짝 문 김지훈이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엇이 감사하다는 말일까?
굳이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제자는 마음을 전했고, 스승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게 스승과 제자일 것이다. 아니,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맙다. 열심히 해.”
돌아선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의 축하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제자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가 절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당직실로 향하는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잠깐 어두운 그림자가 내비쳤다.
‘정말 고마운 사람은 송재덕 선생님과 이혁민 교수야. 우리 과를 위해 흔쾌히 병원장 자리를 내놓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교수도 유방 파트를 포기했고 말이야. 어쨌든 제자 한 놈은 정말 잘 뒀어. 게다가 세상 참 좁네. 고경아의 아버님이 고성문 선생님이었어? 그 양반 수련 때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재야의 고수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지훈이 저놈도 참 배울 복은 타고났어.’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이준영 과장에게는 참 살맛 나는 시간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자식인 이혁원과의 관계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여기에 나날이 발전해 가는 제자까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더욱이 날줄과 씨줄처럼 이어진 인연의 끈은 주변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이준영 과장의 솔직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