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2)
그렇다. 삼국지 II는 나관중의 삼국지도, 고우영의 삼국지도 아닌 게임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손권 등등 삼국지 속의 영웅호걸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는 몰라도 삼국지는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다. 손과 눈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끙끙대며 여기저기를 클릭하던 김지훈이 어느샌가 유비가 되었다. 영토를 정하고 돈과 정성을 뿌려 장수들을 규합하고 백성들의 충성심을 위해 쌀을 뿌렸다. 장수들이 하나둘 휘하에 들어오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안을 정비했으니 이제는 나아갈 때였다.
드디어 삼국지의 백미, 정복 전쟁이다.
무시무시한 장수 여포가 앞을 가로막았다. 코웃음을 치며 장수 3명을 거느리고 협공을 했다. 제법 쟁쟁한 무력치를 가진 장수들에 4 대 1이다. 당연히 사로잡거나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네모 4개가 네모 하나를 둘러쌌다.
따다다다다! 따다다다다!
공격 턴이 될 때마다 여포를 둘러싼 4개의 네모가 차례차례 번쩍이며 여포를 때려 댔다. 그런데 왜 맞은 놈보다 때린 놈이 더 심하게 아플까?
100에서 시작한 유비의 무력치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협공을 가하던 장수들은 아예 바닥을 보였다. 반면 수십 방을 맞은 여포의 무력치는 아직도 99다. 박살이 났다.
유비가 멋지게 사로잡히며 게임이 끝났다.
“에이! 관우하고 장비와 함께 공격했어야 했네. 아무리 여포라지만 그래도 이건 사기다. 어떻게 끝까지 99야?”
혀를 차며 시계를 보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유비가 돼 잠깐 놀았을 뿐인데 어느 틈엔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니, 근 두 시간이 흘렀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정신을 수습한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잠을 청했다.
그날 밤 삼국지의 노랫가락이 밤새 귓가를 울렸다. 난생처음 컴퓨터 오락을 해 봤는데 어째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아침 일과가 시작되자 삼국지가 저 멀리 사라지긴 했다. 삼국지 II는 가끔 머리를 식혀 줄 가벼운 휴식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나큰 오산이었다.
처절한 한 주다. 쉴 수 있을 때 충분히 쉬어야 하건만, 그놈의 삼국지는 마약이었다. 분명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삼국지 II 특유의 노랫가락이 울리고 있었다.
하루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은 유비가 돼 관우, 장비, 조자룡과 함께 중원을 활보했다. 삼국지 때문에 일상까지 지장을 받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슬슬 걱정이 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삼국지에 빠져든 며칠 후, 정형외과 1년차 숙소에서 난리가 났다. 얼마나 고함이 컸던지 인턴들까지 나와 기웃거렸다. 뭔가 단단히 일이 났다 싶은 생각이 든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숙소 문을 열었다.
3년차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만 쉬었고, 1년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때 아주 귀에 익숙하면서도 중독성이 강한 노랫가락이 묘하게 방 안을 휘감았다.
띠~ 띠리리리~ 띠이이이~
“너 오늘부로 옷 벗어. 어떻게 오락을 하느라고 응급실이고 병동이고 허구한 날 빵꾸를 내냐. 넌 정형외과 할 자격이 없어. 이제부터 삼국진지 뭔지 실컷 하고 내년에 군대나 가. 지훈아, 이런 새끼 일에는 신경 쓸 것도 없어. 나가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는 목소리였다. 옷 벗으라는 말에도 1년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긴 했다.
전공의도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오프 때는 무엇을 하고 놀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과 중에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신경이 분산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했다.
김지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비록 며칠이라고 해도 정형외과 1년차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오락이나 유희는 더 이상 휴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뇌리를 강타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후우! 나도 저렇게 심각해질 수도 있겠지?’
숙소로 돌아와 컴퓨터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들었다. 가볍게 누르기만 하면 삼국지와는 완전히 안녕이다.
그런데 정말 삼국지라는 게임은 마약인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단단히 각오를 하고 거듭 힘을 주어도 그놈의 손가락은 허공에 멈춰 있을 뿐이었다.
‘제발 이러지 말자. 여기서 멈춰야 돼.’
달달 떨리는 손으로 눈 딱 감고 키보드를 눌렀다.
Delete.
Yes!
삼국지라는 마약이 사라졌다. 다른 컴퓨터에 깔려 있을지는 몰라도, 굳이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다신 유비가 될 일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형외과 3년차가 난리를 치며 인턴과 전공의의 손이 닿는 모든 컴퓨터에서 삼국지를 삭제한 것이다.
삼국지는 결코 달콤한 휴식이 아니었고, 그렇게 김지훈의 짧았던 일탈도 끝이 났다.
좋은 교훈을 얻긴 했다. 게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게임에 빠져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게임을 나쁘게 만들 것이다.
김지훈이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어찌 된 일인지 모두가 능동적으로 활기차게 움직이는데도 점점 바빠졌다. 동네 의원에서 꿰매도 될 열상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예전이었으면 대구로 가고도 남을 환자들이 툭하면 구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전화통을 붙잡고 나면 태도가 바뀌었다. 가끔 대놓고 김지훈을 찾는 환자도 있었다.
하여튼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고, 간호사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와중에도 따르륵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김지훈이야 익히 알려진 따르륵 선생이었고, 이제는 이혁원까지 별명을 얻었다. 제2의 김지훈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엄연히 달랐다. 따르륵이 아니라 따가각이었다.
“따르륵 샘, 아무래도 샘 때문인 것 같아요. 응급실이 이렇게 바쁜 적은 없었어요.”
“왜 이래요? 나도 힘들어 죽겠어요. 인턴 선생들 아니었으면 벌써 쓰러졌어요. 아무래도 따가각 때문인 것 같지 않아요?”
“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만 좀 하면 안 돼요? 자면서도 따르륵, 따가각 소리가 들릴 정도예요. 책임지세요.”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새 구미 병원 근무가 채 2주도 남지 않았다. 구미 마지막 텀으로 일반 외과를 도는 이혁원을 활활 태우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만 빼면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아직도 대구 병원에 가시는 걸 보면 확정된 것 같기도 한데, 과장님들 서울 발령은 아직 안 났나?’
화요일 저녁, 마치 궁금함을 풀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만 따로 불렀다.
“지훈아, 드디어 결정이 났어. 이번 주까지 근무하고 변상훈 과장님, 장성기 과장님하고 서울 올라간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와! 축하드립니다. 그럼 서울 응급실에서 두 분이 번갈아 근무하시나요?”
“이준영 과장님은 유동적이지만 일단 그렇게는 들었어. 하여튼 그건 그렇고, 너 강기웅 선생 알아?”
유동적이라는 말에 눈썹을 찌푸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송동화 과장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설마 스승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알죠. 제가 인턴 때 4년차 치프 하셨으니까 과장님과 동기 아니신가요? 그런데······.”
송동화 과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잘랐다.
“맞아. 사정이 있어서 일 년 동안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이번에 군대 막 제대하고 오는 거니까 손이 많이 굳었을 거야. 일주일뿐이지만 니가 좀 도와줘야겠다.”
“아후! 선생님, 제가 뭘 도와드려요? 도리어 배워야죠.”
송동화 과장이 피식 웃었다.
“군대나 보건소 가서 수술하는 우리 과 의사는 없다고 보면 돼. 통합 병원에서 근무했다고 해도 수술할 케이스가 몇 개나 있었겠어?”
맞는 말이었다. 의사 생활 중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기가 군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낙하 훈련이 끝나면 골절이나 삔 환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정형외과거나 신검 담당이라면 모를까, 군의관들 대부분은 수술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설혹 공중보건의로 복무한다고 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수술을 하고 싶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여건 자체가 구비돼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굳이 환자에게 문제를 만들고 싶다면 혹 모를 일이긴 했다.
무수한 문제는 차치하고, 어쨌든 그게 현실이었다.
김지훈이 잠시 스승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럼 제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라도 있나요?”
“기웅이가 수술을 잘 주지 않는 스타일인 데다 성격도 만만치 않아. 아마 오자마자 바로 수술을 직접 하려고 할 거야. 아뻬 정도는 모르지만, 다른 수술은 네가 퍼스트 서면서 눈치껏 잘 끝나도록 노력하는 게 좋을 거다. 성격이 어떤지 잘 보고 분위기 잘 판단해. 알았지?”
송동화 과장의 표정이나 말이 묘했다. 동기가 과장으로 오는데 환영하기보다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성격이라는 말에 찜찜했지만 그래야 일주일이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최소한 욕먹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 성대하다면 성대할 송별식이 벌어졌다. 구미 병원 식구들 모두 아쉬워했다. 정이 많이 들었는지 몇몇 간호사는 눈물까지 보였다.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아파했지만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다음 날 오후 송동화 과장이 서울로 떠났다. 변상훈 과장과 장성기 과장도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원래는 이때 전공의들 중 이삼 년차들도 근무 교대를 해야 했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을 감안해 다음 주에 한꺼번에 교대를 하기로 했다.
성형외과와 흉부외과의 신임 과장들이 바로 근무를 시작해 한결 일이 편해졌다. 속 시원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강기웅 과장은 달랑 연락처만 알려 주고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그날 밤 빤뻬리 환자가 오고 나서야 첫 대면을 했다.
강기웅 과장은 전공의들의 얼굴도 몰랐지만 김지훈은 정말 반갑기만 했다. 인턴 때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치프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전 과장님 확실히 기억합니다.”
“그래? 반갑다. 환자는 어디 있어?”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었는지 간단한 말로 첫인사를 대신했다. 한참 동안 환자를 진찰한 후 직접 수술 결정을 내렸다. 김지훈이 살짝 갑갑함을 느꼈다.
‘오시자마자 날 치프로 대우하시기는 그렇겠지?’
수술이 시작됐다. 배를 열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터진 소장을 봉합하는 과정을 두고 원래 손이 느린 것인지, 아니면 군 복무 때문인지는 몰라도 좀처럼 진행이 되질 않았다. 손이 엉키는 것 같기도 해 어시스트를 서기도 쉽지 않았다.
소장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주춤거리던 강기웅 과장이 갑자기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박순용 선생님, 확실히 좀 끌어요. 김지훈, 넌 뭐해? 나 혼자 수술해? 3년차라도 넌 치프잖아.”
“김지훈, 니가 집도의야? 내 손에 맞춰라, 내 손에. 이러다 문제 생기면 니가 책임질래?”
난데없는 고함에 수술 방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 이것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김지훈은 최선을 다했고, 수술이 무사히 끝나긴 했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눈치껏 잘하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에이! 설마 계속 저러시겠어? 손이 풀리면 좋아지시겠지.’
섣부른 기대였다. 똑같은 분위기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강기웅 과장은 빠르게 예전의 손과 감각을 찾았지만 그놈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병동 환자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슬그머니 사라졌던 피로가 급격하게 다가왔다. 서도진과 박순용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얼굴색까지 까매졌다. 사실 치프라고 욕을 더 먹었지만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후! 왜 저렇게 짜증을 내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손이 마음을 안 따라 준다고 해도 간단한 수술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툭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찾으면서 왜 그렇게 닦달을 하죠? 정말 힘들어 죽겠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힘들었다. 서도진 말대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 댔다. 그 탓에 스승에 대한 일이 궁금해 손일석에게 전화를 하려 했지만 짬을 내기도 어려웠다. 고경아와도 딱 한 번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배움에는 끝이 없었다. 덕분에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집도의가 최소한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면 안 되는지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수술 중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승님과 송재덕 과장님, 그리고 이혁원 교수님까지 모든 분들이 수술하는 스타일이 다르시다. 하지만 집도 중에는 확실하게 수술 팀을 장악하고 분위기까지 이끄신다. 그분들이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지도 모르는데, 안 좋은 내색을 하시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
마지막 날까지 모두들 얼굴을 펴지 못했다.
김지훈도 수술을 받기는커녕 퍼스트 제대로 서라는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도 즐거웠던 수술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오프인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독재자였다.
분위기가 안 좋은 데다 시간까지 주지 않아 병원 동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구미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뜻대로 되지 않았다. 토요일 일과가 끝나기 직전 혈복막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