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01화 (401/1,329)

제1화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1)

떨리는 마음으로 집도의 자리에 선 박순용이 송동화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김지훈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밤에 첫 수술을 받은 이유가 김지훈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김지훈 선생님, 고맙습니다. 가르쳐 주신 대로 최선을 다해 수술하겠습니다.’

박순용의 첫 수술이 시작됐다.

메스를 드는 순간 긴장과 불안, 그리고 떨림의 연속이다. 누구나 첫 수술은 그렇다.

송동화 과장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가며 수술을 도왔다. 박순용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슬쩍 김지훈을 보았다. 돌아온 것은 눈가의 미소 속에 담긴 믿음이었다.

‘자신을 가지세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처음 하는 수술이었지만 박순용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동안 얼마나 최선을 다해 일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아주 잘했습니다. 이렇게만 가면 어디를 가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박순용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가슴이 벅차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첫 수술을 하면서 김지훈이 후배가 아닌 선배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김지훈 선생님, 그래서 오늘은 집도 과정만 물으셨군요. 그동안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헤맸을까요. 어쩌면 아직도 수술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서도진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사히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났다.

모두들 수술 후 오더를 내는 것까지 함께했다. 서도진이 박순용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차트를 가리켰다. 김지훈도 재촉하는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수술 기록지도 작성하셔야죠.”

박순용의 숨이 가빠졌다.

집도의 - 전공의 1년차 박순용

보조의 - 송동화, 김지훈, 서도진

외과의라면 누구나 바라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김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선생님. 지금처럼만 하세요.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받게 되실 겁니다.”

박순용이 마음과는 달리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수술 기록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과 김지훈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어디선가 송동화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메스 챙기고 목요일에 하자. 저녁에는 그날밖에 시간이 없네. 미안하다.”

“예, 과장님.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미안할까?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박순용을 보다 말고 얼굴을 확 구겼다. 하필이면 당직 날이다. 구미에 와서 마신 술이라고는 맥주 한 모금뿐이었다. 치프가 돼서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의 오더다. 입이 쭉 찢어진 서도진의 얼굴이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어쨌든 구미 일반 외과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간호사가 건네는 메스를 소중하게 받아 들던 김지훈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고이 간직하고 다니는 두 개의 메스가 생각났다.

스승의 첫 수술이 담긴 빛바랜 메스.

구미에서의 첫 수술이 담긴 반짝이는 메스.

모두 다 소중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빛바랜 메스를 택할 것이다.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승의 가르침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항상 건강하세요.’

고경아만큼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스승이었다.

바삐 일을 하는 사이, 어느새 집도식 날이 왔다.

전통대로 변상훈 과장과 장성기 과장을 비롯해 병동, 응급실, 수술 방, 중환자실 간호사들까지 초대를 했다. 장소는 변함없이 새콤한 복 매운탕으로 유명한 싱글벙글이었다.

커다란 방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케이스에 담긴 메스를 전하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얼굴이 벌게진 박순용이 송동화 과장의 첫 잔을 시작으로 술 폭탄을 맞았다.

술이 돌고 돌아 술기운이 퍼지면서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함박웃음이 터지고,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었다.

단 두 사람만 빼고 말이다. 김지훈이 술 한 잔은커녕 매운탕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옆에 이혁원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혁원아, 넌 오픈데 술도 안 먹고 왜 따라와?”

“변상훈 과장님이 술을 드시는데 제가 어떻게 먹겠습니까?”

“내가 있잖아.”

이혁원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흉부외과는 구미에서만 돕니다. 그리고 서울이나 천안에서는 환자 근처에도 못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우고 싶습니다.”

‘역시 이혁원이야. 우리 과 할 준비를 철저히 하네.’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아낄 수밖에 없는 후배였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엉뚱한 말을 했다.

“왜, 흉부외과 하려고?”

‘아버지께서 선생님한테 뭐든 다 배우라고 하셨어요. 흉부외과를 모르면 바이탈을 제대로 잡기 힘들다는 말까지 똑같이 하시던데요.’

이혁원이 콧등을 찡그리며 머리만 긁었다.

원래 말수도 적은 데다 웃음은 정말 보기 어려운 아버지였다. 대화를 나누는 일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우연히 김지훈이 너무 심하게 태운다는 말을 하는 순간 아버지의 입가에서 웃음을 보았다.

‘잘하고 있네.’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왠지 아버지와 김지훈이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성격이나 말투며, 외모까지 모든 면이 확실하게 다른데도 말이다.

이내 이유를 알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함께 환자를 보고 난 후, 자신을 죽도록 태우는 김지훈의 눈빛 속에는 항상 애정이 있었다. 후배가 아니라 마치 동생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김지훈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란 서운함까지 사라질 정도로 이혁원 역시 김지훈을 좋아했다.

그런 마음 때문일까?

한결 여유를 찾은 김지훈이 흉부외과 환자가 없어도 이혁원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면 과를 불문하고 불렀다. 외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해박해 보여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김지훈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금요일 오후 컨설트 때문에 중환자실에 들렀던 김지훈이 힐끗 신경외과 과장을 보며 입술을 모았다. 주춤주춤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이 결국 발길을 돌렸다.

“과장님, 죄송하지만 기관 절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기관 절개(Tracheostomy)를 준비하던 신경외과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일반 외과에서 기관 절개를 할 일이 있어?”

기관 절개는 흔히 볼펜으로 목젖 밑을 뚫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처치지만, 기도 내 삽관을 장기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환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처치였다. 따라서 뇌손상을 입은 신경외과 환자에게나 가끔 필요할 뿐이고, 어떻게 보면 간단한 술기일 수도 있었다.

“아직 그런 경험은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투베이션(기관 내 삽관)이 불가능한 환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기관 절개를 할 줄 알아야 환자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경외과 과장이 김지훈에게 어시스트를 서라고 했다. 이제는 찰거머리처럼 김지훈 옆에 붙어 다니는 이혁원도 장갑을 끼고 옆에 앉았다.

“기관 절개는 혈관이 없는 부분을 절개하니까 출혈이 유발되면 안 돼. 지금처럼 준비해서 하는 경우에는 거즈 두 장이면 충분하고, 만일 응급 상황이라고 해도 다섯 장 이상 피로 젖으면 안 된다. 그 이상 출혈을 하면 피 때문에 시야가 나빠져서 기관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김지훈이 두 눈을 부릅뜨고 기관 절개를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비록 한 번뿐이지만 꼭 알아야 하는 술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간단하면서도 어렵네.’

그날 김지훈이 시도 때도 없이 두 손을 놀렸다.

따르륵! 따가각! 따르륵!

한가할 때면 들리곤 하던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자주 들렸다. 도대체 수술을 얼마나 잘하고 싶은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꼭 한 번씩 더 들렸다. 이혁원의 주머니 속에도 수술 기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다들 입맛을 다셨다.

“김지훈 샘 같은 샘 또 한 명 나타났네.”

“우리한테는 좋지. 김지훈 샘은 마지막이지만 이혁원 샘은 또 오시겠지?”

기대감으로 가득 찬 간호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

또 한 번의 주말이 지나갔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갖고 고경아를 만났다. 서도진과 후배들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장인 될 분을 만나는 일도 순조롭게 풀렸다.

“아빠가 구미에서 오려면 멀다고 서울 올라오고 난 후에 인사 오래요. 그런데 아빠 눈치가 좀 이상해요.”

응? 뭘까?

김지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빨리 인사를 오라고 하면서도 대충 2개월이나 뒤로 미뤘다. 결혼을 생각한 이후 고아에 쥐뿔도 없다는 자신의 처지가 항상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뭐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어요?”

“얼굴도 못 봤는데 그럴 리가 있어요? 그게 아니라 아빠하고 지훈 씨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언뜻언뜻 뭔가를 알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네. 날 아실 수가 없잖아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혹시 교수님들 중에 친분이 있는 분이 계신 건 아닐까요?”

“그러면 내가 일반 외과 수술을 전담하게 됐다고 말씀드렸을 때, 뭔가 얘기를 하셨을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없으셨어요.”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반 외과 전문의라면 아무리 오래전이라도 전공의 생활이 어떤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항간에 들리는 말로는 예전에는 인원이 적어 지금보다 더 열악했다는 소리까지 들은 터였다.

“어쩌면 내 생활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지도 몰라요. 안 그래요?”

“어머! 정말 그럴 수도 있네. 내가 지훈 씨하고 인사할 생각에 신경이 너무 예민해졌나 봐요.”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게 정답일 것 같네. 그럼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우리의 데이트를 즐겨 볼까나.”

이제는 시간 날 때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했다. 하지만 얼굴은 3주에 한 번밖에 못 봐서 그런지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아침 일찍 동대문에서 시작해 대학로까지 쏘다녔다.

“참! 경희는 요새 뭐 해요?”

“졸업반이잖아요. 임용 고시 준비한다고 혼자 바쁜 척은 다 하고 살아요. 계집애. 평소에 공부를 했어야지.”

“국가고시는 뭐든 만만치 않아요.”

고경희도 어느새 사회로 나올 나이가 됐다.

문득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궁금해졌다.

“연애는 하고 사나?”

“연애요? 자기는 뭐 진정한 사랑을 만날 거라면서 정작 남자 친구 하나 없어요. 지훈 씨 친구 중에 좋은 사람 없어요?”

고향 친구들은 얼굴 본 지도 꽤 오래됐다. 고개를 흔들던 김지훈이 문득 손일석을 떠올렸다. 같은 남자 입장이긴 하지만 마음만 맞는다면 그만큼 괜찮은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손일석이 목을 매는 그놈의 나이트가 마음에 걸렸다. 여자 친구가 없을 리도 없었다.

‘일석이가 괜찮긴 한데 바람둥이라서 안 되겠지?’

사실 손일석이 데이트를 한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다. 그러나 그놈의 주둥아리는 분명한 선입견을 남겼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찾아는 보는데 좋은 놈이 있을지 모르겠네. 다들 만난 지도 오래돼서 여자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고경희의 남자 친구 문제는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쏜살처럼 시간이 흘렀다.

밥 먹고 얘기하고 커피 한잔했을 뿐인데, 어느새 오후 5시였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환자 파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작별을 했다. 마침 고경아의 집 앞이 한적해 달콤한 입술의 향기를 흠뻑 맡았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열심히 달려왔건만 구미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넘었다. 부랴부랴 주말에 입원한 환자들 차트를 확인하고 잠깐 얼굴을 보았다. 밤이 늦어 정말 미안했다.

“환자분,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양해해 주세요.”

숙소에 올라온 김지훈이 개운하게 씻고는 컴퓨터를 켰다. 이젠 논문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야 할 때였다. 이혁민 교수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타는 일은 절대 사절이었다.

한동안 자판을 두드리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폈다.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쉬면서 무심코 모니터에 떠 있는 폴더들을 열어 보았다.

286 컴퓨터에 있으면 뭐가 있을까. 그런데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보였다.

삼국지 II.

띠이이이! 띠리리! 띠리리리!

아주 요상하게 뇌리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설마 게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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