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우리는 모두 동료들이다 (2)
김지훈이 천천히 서도진과 이혁원, 그리고 인턴들을 보았다.
다들 무언의 눈빛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서도진까지도 말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피곤해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무척 뛰어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환자를 본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당신과 같은 의사입니다. 우리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까?’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후배들의 피곤이 전해졌다. 단순히 환자 때문도,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득 악어가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했던 시간이었다.
‘그땐 왜 그렇게 유난히 피곤했을까? 말도 안 되는 일로 날 괴롭혔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믿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김지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다를 뿐, 어쩌면 악어와 똑같이 후배들을 대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랬다. 생각해 보니 텀이 바뀐 후 수처조차 주지 않았다. 3개 과를 본 탓에 힘들고 정신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중환자실에서 킵을 하던 이혁원의 모습과 한 장의 흉부 사진이 떠올랐다. 피곤한 와중에는 누구든 놓칠 수 있는 미세한 병변을 잡아냈다. 그만큼 능력과 성의가 있다는 말이었다. 다른 인턴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도진은 또 어떤가? 정말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후배였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불신을 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입으로는 흉부 도관을 주네 어쩌네 하면서도 정작 믿지 못한 것이다.
‘난 후배들을 얼마나 믿고 있었지?’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 것도, 거꾸로 힘을 내게 한 것도 모두 신뢰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환자와 동료들이 신뢰를 보이거나, 반대로 동료들을 믿을 때 피곤을 잊을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후배들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윗사람이 신뢰를 주지 않는 것만큼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어느 순간 선배에 대한 믿음마저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모든 환자를 다 잘 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나? 그건 절대 아니야. 은연중에 후배라고 무시했는지도 몰라. 모두 다 의사고, 나보다 뛰어난 면이 많을 텐데 믿지 못한 거야.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를 잊었던 거야.’
이제는 후배들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달리해야 할 때였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 주면 그만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이미 김지훈 자신도 그래 왔다. 미숙하기만 한 인턴 때는 물론이고, 전공의가 돼서도 교수들과 선배들은 한없는 신뢰를 주었다.
후배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 자신들을 믿고 환자를 맡길 때 더욱 열성적으로 환자를 볼 것이다. 그것이 결국 실력을 만들고, 더 큰 신뢰를 부를 것이다.
핵심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믿음뿐이었다.
그런 믿음이 없었기에 상태를 막론하고 모든 환자를 혼자 보려고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려니,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후배들까지 극심한 피로 속에 빠트렸다.
각자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인재들이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했다. 후배들에게 믿음을 가져야 할 때였다.
“성형외과 인턴 선생, 이혁원, 이 환자들 수처해. 다 하고 나면 나한테 확인받고. 도진아, 우린 당직실에 있자.”
갑작스러운 오더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인턴들의 입가가 점점 찢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피곤에 찌들었던 몸에 활력이 도는지 간호사들을 닦달하기까지 했다.
뒤따라 들어오던 서도진이 중얼거렸다.
“자식들! 되게 좋아하네. 하긴 조금 더 빨리 받았어도 될 것 같던데. 혁원이 정도면 넘치지 않나요?”
김지훈이 못 들은 척하고는 침대에 벌렁 누웠다.
‘제길! 수처 하나에도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하긴 나도 저때는 수처 못해서 안달을 했던 것 같네.’
한순간에 고쳐질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도 어떻게 수처를 하는지 신경이 쓰였다. 자꾸 시곗바늘에만 눈이 갔다. 끝날 때가 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후배들을 이렇게 못 믿으면 안 되는데. 내가 지금까지 정말 이랬었나? 날 보는 게 얼마나 피곤했을까? 내가 인턴 때 선배들은 절대 그러지 않았잖아.’
드디어 수처가 끝났다. 재빨리 가운을 걸친 김지훈이 환자를 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인턴들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수처 한 바늘에도 정말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인턴의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을 깨 주어야 하는 것은 믿음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후배들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차트를 들고는 이혁원과 성형외과 인턴을 당직실로 불렀다. 잘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인턴 선생, 내가 분명히 자신 있게 수처하라고 했지. 귀 뒤쪽이라 흉이 안 보인다고 저렇게 수처하면 끝이야? 이마 쪽이었으면 눈에 딱 보인다. 한 바늘을 꿰매더라도 자신을 갖고 최선을 다해야 될 거 아냐?”
“이혁원, 넌 차팅이 이게 뭐야? 달랑 수처했다고 쓰면 끝이야? 어떤 실을 썼는지, 어떻게 수처를 했는지 기록을 해야 할 거 아냐? 만날 똑같은 말 하게 만들 거야?”
이혁원과 인턴의 고개가 팍 꺾였다. 그런데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어쩐지 입가에 미소까지 걸린 것 같았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목소리까지 힘찼다.
그 때문인지 후배들이 달라 보였다. 낯간지럽지만 예뻐 보인다고나 할까?
‘자식들! 정말 괜찮네. 마음에 꼭 들어. 그동안 미안했다.’
그 순간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타고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믿음과 동시에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들 역시 자신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김지훈의 마음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말이다.
힐끗 시선을 준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이혁원이 움찔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둘 다 잘했어.”
한마디 툭 던진 김지훈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응급실을 나갔다.
사실 이혁원의 표정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긴 했다. 후배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애정과 믿음!
선후배와 동기들, 그리고 환자까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감정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기억하는 한 두 놈이 있었고, 요즘 들어 한 놈이 더 생길 판이었다. 알아서 솎아 낼 일이었다.
왠지 모를 즐거움에 가벼운 발걸음을 보이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과 신뢰를 나누어야 할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내가 언제 전화를 했지?’
손가락을 꼽던 김지훈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달달 떨렸다.
새카맣게 탔다. 새로 산 양복을 무를 수도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저 빌고, 또 비는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때쯤에야 고경아의 목소리가 평온을 찾았다.
(지훈 씨, 앞으로 또 이러면 안 돼요. 힘내시고, 끼니 꼭 챙기세요. 혹시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없어요? 오프 때 준비할게요. 사랑해요.)
아! 무조건 감동이다.
고경아는 삶의 기쁨이자 위안이었고, 강한 힘이었다.
***
월요일 아침, 모든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굴러갔다.
김지훈이 일하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를 두기 시작했다. 노티를 받자마자 환자를 보는 것은 같았지만, 재량껏 줄 수 있는 치료는 모두 인턴들에게 주었다.
물론 인턴들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환자 처치 후에는 더 심하게 태웠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인턴들이 도리어 전에 없는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턴들이 그럴진대 서도진과 박순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인가 바닥 깊숙이 깔려 있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기 시작했다.
신뢰가 문제였다는 것이 확실했다.
후배들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모두들 기대 이상으로 환자에게 온 정성을 다하며 훌륭하게 치료했다. 인턴이면 이 정도까지 하겠지 하는 생각이 여지없이 깨졌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맡기니까 정말 피곤도 많이 못 느끼네. 그래. 스승님을 물론 교수님들도 날 믿어 주셨기 때문에 밤을 새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던 거야. 후배들도 마찬가지겠지? 서로를 믿어야 그 자식들이나 나나 덜 피곤할 거야.’
마음과 행동의 변화는 분위기를 확연하게 바꾸었다.
응급실이 팡팡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반 외과 역시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손이 척척 맞았다. 아직도 빨간 볼펜은 자유롭게 날고, 김지훈이 쏟아 내는 불길도 여전했지만 다들 웃음을 잃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도 큰 덕을 본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분명 전과 같은 일상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덜 피곤한 덕에 뜻하지 않은 시간까지 벌었다.
‘후우! 후배들을 믿고 환자를 맡기니까 논문을 검토할 시간까지 얻네. 아이구! 진작 이럴걸.’
하루하루가 정말 바빴지만 착실히 오프를 간 덕에 충분히 견딜 만했다.
고경아와 몇 번 통화하고 나니 어느새 일주일이 훌쩍 지났고, 서도진이 주말 오프를 갔다. 희한하게도 아뻬 환자가 단 한 명도 안 왔지만 유난스럽게 바쁜 주말이었다.
밀려오는 응급실 환자와 수술로 떡을 친 김지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박순용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오프를 다녀와 새로 입원한 환자들을 확인하던 서도진이 입맛만 다셨다.
‘구미도 천안처럼 지옥이 되려나? 도대체 누가 이렇게 일을 몰고 다니는 거야?’
가급적이면 몰래 응급실을 커버할 생각이었던 서도진이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고개를 젓고 말았다. 밤 9시쯤 아뻬 환자가 한 명 온 것이다.
거의 쓰러질 것 같은 박순용이 필사적으로 환자를 보았다. 잠시 후 나타난 김지훈도 연거푸 하품만 해 댔다. 그런데 노티를 하는 김지훈의 눈이 점점 똘망똘망해지기 시작했다.
“충분합니다, 선생님. 지금 시작하면 열 시 반 정도에 끝나고, 도진이도 있으니까 환자를 보는 데도 문제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통화가 꽤 길어졌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박순용을 불렀다.
“선생님, 지금 빨리 찬물에 샤워하고 확실하게 잠 깨서 오세요. 아뻬 수술 과정 상기하는 거 잊지 말고요. 확인합니다.”
박순용의 눈에서 졸음이 스르르 사라졌다.
지난주에 퍼스트를 몇 번 서면서 세컨과 퍼스트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퍼스트를 서는 순간만은 가슴까지 벌렁거려 졸음조차 오지 않았다. 물론 김지훈에게 지독하게 타는 것을 감수해야 했지만, 무조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퍼스트를 서면서 헤매긴 했지만, 그렇다고 샤워까지 하라는 건 좀 심한데. 하긴 이번 주는 너무 피곤하긴 해.’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마치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어 서 있을 힘조차 없긴 했다.
어쨌든 박순용에게는 피곤이 사라질 정도로 힘이 되고, 소중한 기회였다.
“예, 선생님. 빨리 갔다 오겠습니다.”
서도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퍼스트 주시게요? 근데 뭘 샤워까지 하라고 하세요.”
“과장님이 바로 나오신단다. 왜 그러실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아뻬는 거의 다 김지훈이 수술을 하긴 했지만, 송동화 과장도 항상 수술 방에 나왔다. 입국식 때처럼 피치 못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김지훈의 말투가 뭔가 요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도진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박순용 선생님이 수술을 하는 건가요?”
“빙고! 간만에 난 세컨, 넌 써드 서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다음 주로 미뤄질 뻔했어. 시간이 늦었다고 많이 불안해하시네.”
주말에 첫 수술을 주고자 마음먹었던 송동화 과장이었다. 응급 의학과 일 때문에 주중에는 너무 바빠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렇게 많이 오던 아뻬 환자가 일요일 밤이 돼서야 왔다. 박순용에게는 첫 수술인 데다 야간이라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박순용 선생님 수술 받게 하려고 그렇게 길게 통화를 하신 거예요?”
“이젠 충분하잖아. 이번 기회 놓치면 주중에는 또 못 받을 수도 있어. 박순용 선생님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오늘 밤은 우리도 환자에게 신경 좀 쓰자.”
김지훈의 목소리에 믿음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술 방에 들어온 박순용이 시커멓게 탔다. 김지훈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술 과정을 말하던 박순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송동화 과장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거의 죽을 뻔했다.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를 보던 박순용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송동화 과장이 손을 씻고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오프인 서도진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순간 뭔가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고작 퍼스트 세 번 정도 섰는데 설마. 근데 서도진 선생님까지 들어오면 난 어디에 서야 하지?’
마취에 이어 곧 수술 준비까지 다 끝났다.
내심 혼자 고민을 하며 어중간한 자리에 섰던 박순용이 깜짝 놀랐다. 송동화 과장이 자신을 보며 집도의 자리를 가리킨 것이다. 마스크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김지훈과 서도진이 분명히 웃고 있었다.
“뭐 해요? 빨리 자리에 서서 시작합시다.”
눈치 빠른 마취과 전공의가 나직한 박수를 두어 번 쳤다.
“박순용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박순용의 눈가가 떨렸다. 드디어 그렇게 고대하던 첫 수술을 받은 것이다.
‘박순용 선생님, 배운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김지훈이 알지 못할 뿌듯함에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