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7화 (397/1,329)

제10화 신뢰는 힘이다 (2)

이전에는 여유가 넘친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건 내년이 돼야 아는 일이고. 어쨌든 원장 입장에서 볼 때도 혼자 하는 건 무리야.”

본심이 무엇인지 들어는 볼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단 스태프를 새로 뽑기는 어려워. 이준영 과장을 자를 수는 없잖아. 가장 좋은 방법은 이준영 과장과 함께 응급 의학과를 맡는 거야. 자네한테도 결국은 그게 좋으니까 건의해 봐. 이혁민 교수도 무시하지는 못할 거야.”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쉽지 않지. 하지만 세상은 가만히 있는 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배수의 진을 치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야. 예정대로 진행되면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겠어?”

송동화 과장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경태 과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다 별생각을 다 할 때, 당근을 던져 주면 대개는 덥석 받아먹기 마련이었다.

‘이준영을 쫓아낼 수 없다면 아예 우리 과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것이 최선이야. 그래야 나중에라도 놈을 수월하게 잘라 버릴 수가 있어. 이혁민이라면 몰라도 송동화 정도로는 이준영을 절대 못 지키지.’

금경태 과장의 입꼬리가 말렸다.

이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신동석의 계획을 이용해 최대한 이권을 챙기고, 나아가 눈에 거슬리는 놈들을 모조리 제거해야 앞날이 환히 열릴 것이다.

이미 진평호의 눈을 피해 정한득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한몫 잡을 준비까지 마쳤다.

섬뜩한 경고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살길부터 마련해 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남은 일은 이준영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내모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에 비수를 품고 말이다.

그 덕에 송재덕 과장이 서울로 올라올 가능성이 있다는 의외의 정보까지 얻었다. 어느 파트든 꼭대기에는 단 한 명만이 필요한 법이다. 대장 항문을 전공한 오상익 교수의 불안감을 극대화시켜 반쯤은 돌아서게 만들었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놈이라도 목에 칼이 들어오면 살려 달라고 하기 마련이고, 눈앞에서 달콤한 사탕을 흔들면 넙죽 받아먹는 게 세상이지. 송동화 너라고 별수 있겠어?’

사탕과 당근을 제시할 때였다.

“선택은 송 과장의 몫이지만, 어쨌든 응급 의학과를 허술하게 시작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이준영 과장과 함께 둘이 시작해. 그러면 내가 전공의 선발까지 확실하게 책임지지. 물론 병원장이 되면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잘 생각해.”

송동화 과장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하는 말 같았지만 속내가 보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준영 과장과는 앙숙과 다름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보복부 국장이라는 정한득이라는 사람까지 거론한 이유도 자신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과장님, 결국 이준영 과장님을 견제하고 내치기 위해 날 이용하겠단 말씀이십니까? 정말 병원과 날 위한다면 당신이 제시한 우리 과 자리를 말하든지, 아니면 어떤 조건도 없어야 했습니다. 이혁민 교수님이 왜 당신에게 등을 돌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십니까? 당신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송동화 과장이 심각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착각에 빠진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로 반은 성공했다고 여긴 것이다.

내친김이었다.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라는 추측을 확인할 기회였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준영 과장의 성격상 김지훈을 무척이나 아낄 것이다. 마치 친자식처럼 말이다. 전공의의 불안한 앞날은 이준영 과장에게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었다.

“아! 그런데 김지훈 말이야. 일은 잘하고 있나?”

“예. 아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응급 의학과를 하기로 한 이상, 일전에 말했던 것은 신경도 못 썼겠군. 구미 첫 치프를 할 정도로 뛰어난 놈이라 키우고 싶었는데, 혹시 언급이라도 했나?”

송동화 과장이 눈을 반짝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소한의 신뢰마저 사라지고 나니 도리어 주변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눈에 애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줄 세우기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것처럼 한 이혁민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김지훈이 잘 키워라. 간담도 하고 싶다는데, 그쪽 환자 있으면 신경 좀 써 줘. 나뿐만이 아니라 이준영 과장님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좋은 놈이다.’

그때는 왜 이준영 과장을 언급했는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의 과도해 보이는 관심을 느끼는 순간 뭔가 뇌리를 스쳤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전공의 정도는 이용하고도 남을 인간이 바로 금경태였다.

‘현수나 일석이도 만만한 놈들이 아닌데, 유독 지훈이를 언급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설마 이준영 과장님을 내몰기 위한 수단으로 지훈이까지 이용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송동화 과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리 금경태 과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전공의까지 이용할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아직은 그런 말을 할 단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금경태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계가 아니라고? 송동화, 네놈이 많이 큰 거야, 아니면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야.’

“그래? 3년찬데 장래를 생각 안 할까? 그놈 군대도 갔다 왔잖아. 송 과장, 교수는 말이야. 자신의 입장만 생각해서는 안 돼. 하긴 그것도 그놈 운이겠지. 이만 일어나지. 어쨌든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내 말 명심해.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될 수가 있어.”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은 금경태 과장이 방을 나가다 말고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문득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건물주 중 한 사람까지 생각난 것이다.

‘백억을 달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정한득, 너나 나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제 병원을 인수해야 해. 실사를 하고 세무조사를 의뢰해서라도 무릎을 꿇게 해.’

참 묘한 일이었지만 병원 정문 바로 옆에 백제 병원이라는 개인 병원이 있었다. 대형 병원을 앞에 두고 어떤 환자를 보는지 모르지만 병상 수만 90개가 넘었다. 문제는 그 건물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했다는 점이었다.

“비밀을 유지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게 관건이긴 하지만, 신동석에게는 백제 병원 자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최소한 200억은 받아 낼 수 있어. 그 정도면 굽실거리며 의사 짓을 할 필요가 없지.”

돈 생각에 눈이 벌게진 금경태 과장이 송재덕 과장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송 과장,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이리 와 앉아. 앉아. 준비는 잘되지?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우리가 잘만 만들면 정말 멋지지 않겠니? 그치? 내 말이 맞지? 그럼. 송동화가 과 하나는 꽉 잡을 능력이 있지. 이 교수, 그치? 맞지?”

“당연하죠. 송 과장 능력을 내 단디 믿고 있습니다. 송 과장, 내 술 한 잔 받아라. 내년부터는 새끼들이 줄줄이 늘 텐데, 혼자면 어떻고 둘이면 어떻나.”

송재덕 과장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이혁민 교수는 사투리까지 썼다.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켠 송동화 과장이 모처럼 웃었다.

‘그래. 고생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혼자면 어떻다고 하셨나?’

잠깐 의문이 스쳤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일반 외과 대신 응급 의학과를 택한 것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이준영 과장이 불쑥 잔을 내밀었을 때는 황송하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송 과장, 잘 부탁해.”

아리송한 말이었다. 응급실을 부탁한다는 말인지, 함께 잘해 보자는 말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다시 입을 꾹 다문 이준영 과장을 보니 속내를 묻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놈의 무뚝뚝함은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느새 입국식이 끝나 갔다.

“가자. 가자. 새끼들은 다 가고 우리만 남았네. 준영아, 우리도 입국식 한 거지? 그치? 잘될 거다. 지훈이는 대장이다, 대장. 건드리지 마.”

“형님, 이미 끝난 얘기는 그만합시다.”

“어? 너 화났니? 화났어? 그래도 소용없다. 우리 정정당당하게 하는 거다. 정정당당하게. 야! 취한다. 취해. 좋다. 좋아. 지훈이는 대장이다, 대장.”

교수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파묻혔다. 1년차들은 술에 떡이 된 채 선배 전공의들의 등에 업혀 실려 갔다.

가장 먼저 응급실로 실려 간 박순용이 기억하는 건 입국식 장소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뿐이었다.

***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평소라면 늦잠도 자고, 피곤을 풀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번 주말은 그렇지 않았다. 밤새 응급실을 오간 김지훈과 서도진이 벌건 눈으로 간신히 아침 일과를 마쳤다.

“어이구! 힘들어. 선생님, 괜찮으세요? 한 명 빠진 자리가 이렇게 크네요. 우리가 왜 이렇게 됐죠?”

“그러게 말이다. 다른 과까지 커버하는 게 정말 힘드네. 자식들이 이제는 과장님들께 노티도 안 하네.”

“그냥 예전처럼 노티하라고 하시죠.”

“그러고 싶다만, 과장님들 안 계시고 나도 수술 중이면 어떻게 해? 성형외과는 몰라도 흉부외과는 환자 놓치면 난리 나잖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정말 진퇴양난이네요. 그런데 인턴 때 어떻게 일을 하신 거예요? 어제 아뻬 한 애 엄마를 보니까 생각이 참 많아지네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운으로 그런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요?”

김지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콧등만 찡그렸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더 이상 말을 나눌 힘도 없었다. 다른 과까지 커버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전에 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인턴들의 능력이 단 일이 주 만에 비약적으로 좋아지진 않을 것이다. 3주마다 텀까지 바뀐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마냥 끌고 갈 수만도 없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먹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오늘도 여유는 없었다. 전화를 받고 내려간 응급실이 북새통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단체 교통사고에 남아 있는 체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었다. 절로 터지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흔들며 누울 수 있으면 바로 눕는 것이 최선이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피 검사라도 해 봐야 하나.’

당직을 더 많이 서는 서도진이 오히려 체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늙었나. 도대체 왜 이러지?”

이상스러울 정도로 피곤을 느껴 몸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팔다리를 주무르던 김지훈이 깜빡 잠에 빠졌다.

그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마구 흔들어 대는 바람에 눈을 떠야 했다. 서도진이었다.

“선생님, 얼서(Ulcer) 빤뻬리 있습니다.”

“빤뻬리? 에이! 내일 오면 얼마나 좋아.”

보호자의 온갖 불평과 불만을 또 들어야 할 것이다.

투덜거리며 일어난 김지훈이 찬물에 머리까지 감고는 환자를 보았다. 흉부 사진에 떠 있는 프리에어(Free Air)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선명하게 보였다. 구멍 난 위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배 속에 참 많이도 찼다.

지금 상황에서는 추가 검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어제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수술을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환자분이 평소에 술을 많이 드셨나요?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위에 구멍이 났습니다. 이미 복막염이 발생한 상태고, 수술을 지체하면 배 속 전체로 염증이 퍼질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병원 사정상 과장님이 부재중이시라 수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보호자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럼 대구로 가야 합니까?”

“예. 여기서 수술을 하시겠다면 제가 해야 하는데, 전 전공의 3년찹니다. 가능은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

“급합니다. 환자 좀 빨리 봐주세요.”

누군가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등에 업힌 사람이 축 늘어진 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 팔에 둘둘 말려 있는 수건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깜짝 놀란 간호사들이 재빨리 처치실로 안내했다. 김지훈 옆에 서 있던 서도진이 인턴과 함께 급히 달려갔다. 때마침 응급실에 있던 이혁원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일순 어깨를 움찔거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진이가 있으니까 일단 이 환자부터 해결하자.’

김지훈이 설명을 하는 동안 간호사들이 갑자기 다급하게 움직였다. 처치실에서 서도진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인턴은 정형외과 1년차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경이 쓰여 연신 곁눈질을 하던 김지훈이 애써 보호자에게 집중하려는 순간, 서도진이 뛰어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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