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신뢰는 힘이다 (1)
당황한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확실히 기억이 난 듯 아이 엄마의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샘, 혹시 나 기억 안 나요? 김지훈 샘 맞죠? 맞네.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네. 나 모르시겠어요?”
“제 이름이 김지훈이 맞긴 합니다만, 누구시죠?”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상했나?
어쨌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운에 명찰도 없는데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아이 엄마가 아이의 이마를 가리켰다. 희미한 흉이 보였다.
“벌써 삼 년이나 됐네요. 우리 아들놈들 이마를 연달아 꿰매셨는데, 얘 모르겠어요? 그때 꼼꼼하게 잘 꿰매 줘서 기억에 남았다 아닙니까. 작년인가 재작년엔가 한두 번 더 봤는데, 하도 바쁘게 일하셔서 그땐 아는 척도 못했어요. 어쩐지 설명을 너무 자세하게 하시더라.”
아!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생각이 났다.
인턴 때 둘째를 꿰매자마자 바로 얼굴이 찢어진 첫째가 응급실로 와 펄펄 날뛰던 엄마였다. 공포에 휩싸인 아이 아빠의 표정까지 생각났다.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아! 쟤가 그때 그 조그만 놈인가요? 그럼 첫째겠네요?”
“맞아요. 많이 컸죠. 근데 샘, 진짜 대구로 가야 합니까? 과장님 말고 수술할 선생님들이 한 명도 없어요? 이 시간에 대구를 언제 간단 말이에요.”
김지훈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제가 일반 외과 했습니다. 수술은 할 수 있는데 이제 전공의 3년차네요. 아무래도 전문의 선생님에게 받아야겠죠?”
“샘이 일반 외과예요?”
눈이 동그래진 아이 엄마가 첫째의 이마를 쓱 보더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참 후 들어와서는 또 김지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수술할 수 있다고 하셨죠? 맞습니까?”
“예. 그렇긴 한데,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전공의라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해 주세요.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까?”
너무 대놓고 물어보니 도리어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이 엄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럴 땐 사실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김지훈이 담담하면서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됐네. 그럼 퍼뜩 해 주이소. 샘 같은 분이면 내 아를 믿고 맡길 수 있어요. 3년차면 꼭대기 아닙니까?”
“전공의 중에서는 4년차가 제일 높은데요.”
“삼이나 사나, 그게 그거 아닌교. 샘처럼 일한 사람이면 수술을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내가 괜히 얼굴을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정성을 쏟아 주는 의사는 정말 보기 힘들어요.”
설마 대구로 가기가 귀찮아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서도진만이 아니라 인턴들과 간호사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이 엄마를 보았다. 3년 동안 두어 번 얼굴 보고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왜들 그런 눈으로 봐요? 설마 내 아가 수술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결정했을 것 같아요? 나도 생각 많이 하고, 마침 병원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샘에 대해 좀 물어봤어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믿고 하면 된다 카던데, 아닌가요?”
믿고 하면 된다는 말에 김지훈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일반 외과 수술 중에서는 아뻬가 가장 간단하다지만, 자식이 받아야 할 수술이다. 엄마에게는 그 어떤 수술보다 더 큰 수술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깨를 무겁게 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 그럼 제가 아이를 다시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샘만 믿습니다. 제 아 잘 부탁드립니다.”
결정을 번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심하게 주의할 점과 마취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기대하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부담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해야 했다.
송동화 과장에게 연락을 했다.
(뭐? 아뻬를 한다고 동의를 했어? 문제없겠지.)
“예. 케이스는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충분히 설명하고 수술해. 절대 방심하지 말고. 자식! 대단하네.)
수술을 앞둔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진단은 같아도 같은 수술은 없다. 무엇이든 다른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수술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특별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하에 수술을 해야 한다. 더욱이 자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 한 아이의 엄마가 자식의 수술을 맡겼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알지 못할 힘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이 엄마와 과장님이 날 믿지 못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도진이도 날 믿고 함께 수술을 할 거야.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수술해야 해.’
“도진아, 우리 책임하에 수술하는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 혹시 내가 서두르는 기색이 있으면 바로 말해 줘.”
김지훈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메스.”
피부를 가르는 손이 신중하기만 했다.
비쩍 마른 남자아이였다. 살이 많은 사람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배를 열자마자 아뻬가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톡 튀어나왔다. 흔히 말하는 굿모닝 아뻬였다.
여기에 서도진이 퍼스트다.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수술을 했는데도 빠르게 수술이 끝났다. 마취가 끝나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후우! 이뻬까지 날 돕네. 다행이다.’
아뻬 하나를 하고 이렇게 마음이 놓일 줄은 몰랐다.
제거한 아뻬를 들고 아이 엄마에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수술 방을 나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이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아이 엄마가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어? 샘, 여기서 뭐 해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어머니, 다 끝났습니다. 아주 제때 수술 잘했네요. 이게 첫째 아들 충수 돌기네요. 좀 있으면 병실로 올라갈 겁니다.”
아이 엄마가 멍한 얼굴로 김지훈을 보았다. 믿고 수술을 한다고 했지만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다.
아뻬 수술을 한 사람들을 문병할 때 대부분 한 시간은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도리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 잘 끝난 거죠? 혹시 대충 하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늘 밤에는 아프다고 울 거예요. 너무 아파하면 간호사에게 말씀하세요. 우리가 보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설명을 하는 사이, 아이가 마취에서 거의 다 깬 모양이었다. 수술 방 자동문이 열리며 아이를 눕힌 간이침대가 덜그럭 바퀴 소리를 내며 나왔다.
“엄마! 으아아앙!”
엄마를 본 아이가 비몽사몽 중에도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수술이 잘 끝났다는 걸 안 엄마가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엄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샘. 정말 고맙습니다. 대구 안 가길 정말 잘했네요. 아들, 많이 아프나. 수술 잘 끝났다. 조금만 참아.”
병실까지 함께 간 김지훈이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 엄마가 보내 준 신뢰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순간만은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먹먹했다. 3년 전의 일로 신뢰를 보인 것이 아직도 의아했지만 정말 중요한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이고! 내 정신 봐라. 샘 준다고 사 와 놓고 안 줄 뻔했네. 별거 아니지만 맛있게 드세요. 샘,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전공의가 아니라 의사 샘이었네요.”
말이 묘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컸다. 아이 엄마가 쥐여 준 봉봉 한 박스에 담긴 마음이 정말 무겁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것이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의국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뢰란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음과 열정, 실력만이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요인들이 더 있을 것이다.
문득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피곤에 지쳐서인지 흐릿하게 느껴질 뿐, 그것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간, 입국식이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예년과는 달리 빈 술병이 채 작년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피곤에 찌든 1년차들에게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폭탄주 서너 잔에 맛이 가 몇몇은 눈도 뜨지 못했다.
그 모습에 교수들이 크게 웃으며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의외로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밝아 분위기는 좋아 보였지만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반 외과 외래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이 여실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준영 과장, 송재덕 과장,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에 백무용 교수까지 한데 앉아 있었고, 그 반대편으로 금경태 과장, 임동완 교수, 구영선 교수가 보였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오상익 교수가 함께하고 있었다.
송동화 과장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전공의들 옆에 앉아 있었다. 입장도 곤란했지만 교수들 간에도 레벨이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송 과장, 거기서 혼자 뭐 하니? 뭐 해? 빨리 이리 와. 내 술 한 잔 받아. 지훈이는 열심히 하지? 응? 지훈이 말이야.”
“예, 과장님. 미안할 정도로 열심히 합니다.”
“그래. 그놈이 원래 그런 놈이지. 그치? 내 말이 맞지? 뭐 하니? 빨리 마시고 나 한 잔 줘. 수술은 많이 줬어? 수술 많이 줘라. 그놈은 대장이야, 대장.”
송재덕 과장은 언제나 유쾌했다.
사실 송동화 과장에게는 입국식보다 응급 의학과 문제가 더 급했지만, 이혁민 교수는 웃기만 할 뿐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언제든 가장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라는 것 같았다.
이준영 과장도 특유의 무뚝뚝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물론 대장이라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다. 송동화 과장도 이젠 그 이유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
‘지훈이 그놈은 복도 많네.’
한동안 술잔이 오고 갔다. 그때 유석재가 다가와 송동화 과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금경태 과장님이 옆방에서 잠깐 보시잡니다.”
올 것이 왔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얼굴을 굳혔다.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끼고는 조용히 송동화 과장을 보았다. 찌푸린 눈가와 불쑥 내민 입술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미 배는 떠났다.
‘네놈이 감히 내 말을 거역해? 지금은 웃어 주지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아직은 내가 신동석의 뜻을 따르고 있는 척은 해야 하니까 말이야. 어쨌든 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해야 해. 송동화 넌 이준영의 앞만 막으면 돼. 그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송 과장, 듣자하니 응급 의학과를 할 생각인 것 같은데 맞나? 요새 구미에서 대구를 오가느라 바쁘다며?”
확실히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금경태 과장에게 각을 세운 이혁민 교수 역시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모른다면 애초에 싸움을 벌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 과에 남는 것도 좋지만 응급 의학과를 개설해서…….”
“아! 자네가 결정한 일인데,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지. 운 좋게 우리 과로 올라온다고 해도 과장까지 하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잘 생각했어.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마음에 걸리시다니요?”
“응급 의학과 교수가 한 명이면 전공의 선발이 힘들어. 최소한 둘은 있어야 할 거야. 그런데 이준영 과장이 응급 의학과 개설 준비를 안 하네. 자칫하면 말만 과장이지, 응급실에서 썩을 수도 있어.”
송동화 과장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금경태 과장은 애초부터 자신을 서울 병원으로 끌어올 생각이 없었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일단 화를 내거나, 최소한 서운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내색할 일이 아니었지만 의아한 말이기도 했다. 대구 병원의 교수들은 물론 이혁민 교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만일 금경태 과장의 말대로 전공의가 배정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확실합니까?”
“물론 올해는 그런 적용을 받지 않았지. 그런데 나랑 아주 가까운 지인이 보건복지부 국장이야. 정한득이라고 병원 관리를 담당하고 있어. 대학 병원들이 새로운 과를 개설할 때마다 내게 자문을 구하고 있는데, 난 이왕이면 송 과장이 응급 의학과를 제대로 만들어서 이끌었으면 해. 게다가 내가 서울 병원 원장이 될 수도 있거든.”
“그 말씀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