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5화 (395/1,329)

제9화 신뢰는 말로 얻지 못한다 (2)

1년차 때 유석재와 삼겹살 먹다가 들켰던 생각이 나 미리 식당 안을 찬찬히 살폈다.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삼겹살에 맥주 딱 한 병을 시켰다.

“박순용 선생님, 지금까지 열심히 해 줘서 고맙습니다. 입국식은 술 때문에 힘드니까, 오늘 많이 드시고 내일은 오후 한 시에 바로 출발하세요. 갔다 오면 정식으로 의국원이 되는 겁니다. 각오하셔야 합니다.”

은근히 살벌한 김지훈의 말에 박순용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즐거운 자리다. 노릇노릇한 삼겹살에 각자 맥주 딱 한 잔씩 마시고는 웃고 떠들었다.

분위기가 막 달아오를 무렵, 김지훈이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시계를 보며 일어났다.

“어? 깜빡했네. 도진아, 나 잠깐 일이 있어서 들어갔다 와야겠다. 둘이 천천히 먹고 있어. 아니다. 내가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르니까 일단 의국비 남은 거 다 입으로 쓰고 있어. 단, 술은 안 돼.”

서도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일단 시킨 건 다 드시고 가셔야죠. 의국비도 얼마 안 남았지만, 응급실에 환자 오면 바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오더도 내야 하고요.”

“응급실은 우리 운에 맡기고, 오더는 열한 시쯤 내자.”

의아한 눈을 뒤로한 김지훈이 병원으로 오자마자 응급실로 향했다.

“인턴 선생, 오늘 열한 시 전에 오는 환자는 무조건 나한테 먼저 노티해. 병동 의국에 있을 거니까 그리로 연락하고.”

병동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차트를 모았다. 하나하나 넘기며 차근차근 오더를 내고, 환자 기록을 확인했다. 서도진과 박순용은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둘 다 고생 많이 했네. 오늘뿐이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먹었으면 좋겠다.’

일을 가르친답시고 허구한 날 태우며 소리만 질렀다. 치프로서 하루 정도는 아랫년차들의 고단한 몸과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손가락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오더를 내는 와중에도 빨간 볼펜이 날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전체 의국장이라는 사실과 과장들의 부재를 대비한 일들이 애먼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이젠 흉부외과와 성형외과 환자가 오면 무조건 노티를 하고 있었다. 이혁원까지도 말이다.

그나마 인턴들이 점점 더 환자들을 꼼꼼하게 봐 다행이었다. 물론 손가락은 여기서도 생각이 달랐다.

“으아! 아직도 미비한 점이 있었나?”

이혁원의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커피 한 잔을 뽑았다. 달달하고 고소한 커피가 몸을 내리누르는 피곤을 약간은 풀어 주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휠체어를 탄 최명철이 면회를 온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최선호는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다가갔다.

“환자분, 오늘 병실 올라가셨습니다. 아직 바람이 쌀쌀한데 이 밤에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감기도 걸리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선호야,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김지훈의 타박에도 최명철이 웃기만 했다.

“아이구! 선생님! 저도 그러고 싶은데 갑갑하기도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 그냥 보내기도 그래서 잠깐 나왔습니다. 어이! 잠깐만! 이 선생님이 날 살려 주신 분이야. 인사들 해.”

“아! 말씀 들었습니다. 면회까지 금지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젊으신 분이 용하시네요.”

“아닙니다. 환자분, 빨리 들어가세요.”

겸연쩍은 미소를 지은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응급실로 들어갔다. 3주 만에 중환자실을 벗어났지만 최명철의 빠른 회복이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만 환자들이 좋아지면 피곤할 일이 없겠네.’

과연 그럴까?

11시가 채 되기도 전에 빤뻬리(복막염) 환자가 왔다. 김지훈이 바로 환자를 보고 송동화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수술에 필요한 준비까지 직접 챙겼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서도진과 박순용이 나타났다.

“어휴! 선생님, 오늘 오프시잖아요. 응급실 환자는 제가 봐야죠. 그리고 오더에 환자 기록까지 하신 건 또 뭐예요?”

미안해 죽으려고 하는 서도진과 박순용을 보며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밥 잘 먹었으면 됐지. 박순용 선생님, 오늘은 나하고 도진이가 수술 들어갈 거니까 올라가 주무세요.”

“예? 가서 자라니요?”

“지금 상태로 입국식 가면 못 내려옵니다. 괜히 늦게 내려와서 욕먹지 마시고 오늘은 푹 주무세요. 일요일 오후 여섯 시까지 오면 됩니다.”

미적거리며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박순용을 억지로 올려 보냈다.

출발이 늦었는지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송동화 과장이 도착하지 않았다. 복통으로 끙끙대는 모습을 보기 미안한지 김지훈이 수시로 환자를 만났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과장님이 대구에서 오시는 중이니까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래도 불평이 터졌다. 환자와 보호자를 달래느라 김지훈이 땀을 뺐다. 결국 1시가 다 돼서 수술에 들어갔다.

오늘 당직은 서도진이다. 김지훈이 눈짓을 하며 박순용 대신 세컨 자리에 섰다. 손을 씻고 들어온 송동화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훈아, 박순용 선생님은 어디 가고 니가 세컨을 서?”

“죄송합니다. 제가 시킨 일이 있어서 들어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라서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던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웃은 것 같았다.

곧 수술이 시작됐다. 열심히 리트랙터를 끄는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감회가 새로웠다. 세컨 자리에서 송동화 과장이 집도하는 과정이나, 서도진이 퍼스트를 어떻게 서는지 보는 것도 왠지 즐거웠다.

‘역시 도진이답다. 안 믿을 수가 없어요.’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침이 될 때까지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응급실 환자 때문이었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 사소한 환자들까지도 인턴들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없었다.

‘어후! 정말 피곤하네. 우리 과야 전공의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인턴들만 있는데 과장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셨지? 내가 모르는 요령이 있으신가?’

하품이 멈추질 않았다. 숙소로 올라갈 힘도 없어 결국 당직실에서 쓰러지다시피 잠시 잠을 청했다.

불과 2시간도 못 잔 김지훈이 어기적어기적 토요일 일과를 시작했다.

오후 회진을 끝낸 송동화 과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어젯밤 박순용에게 어떤 오더를 내렸는지 안 것이다.

“병동 환자 잘 보고, 수술할 환자 있으면 설명 잘해.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다들 대구로 가니까 도리어 편할 거다. 그럼 월요일에 보자. 그런데 1년차 얼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일 안 하는 줄 알겠다. 어떻게 너희들이 1년차 같냐. 자식들! 미안하다.”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얼굴이 벌게진 박순용과 함께 서울로 출발했다.

김지훈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이 없으면 아뻬 환자조차도 수술받기를 꺼려 할 것이다. 전공의들만 있는데 수술을 받는다면 그도 이상한 일이었다.

“맞아. 작년에도 과장님이 일이 있으셔서 주말 근무를 못하시는 날에는 수술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가끔은 푹 쉬었던 기억이 나.”

“선생님, 그럼 수술해야 할 환자는 제 선에서 바로 보낼게요. 아니다. 흉부하고 성형도 제가 다 볼 테니까 좀 쉬세요. 그러다 쓰러집니다.”

“도진아, 그래도 성의가 있지. 수술할 환자면 확실하게 진단을 내리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 다른 과 환자도 마찬가지야. 우리를 믿고 맡기셨는데 대충 볼 수는 없잖아.”

‘이럴 때 쉰다고 뭐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을 텐데, 참 한결같으시네. 내가 이래서 지훈이 형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니까.’

서도진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맞는 말이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대구까지 보냈는데 잘못된 판단이라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송동화 과장이 없는 만큼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흉부외과는 바이탈이 걸릴 수도 있었다.

눈치 안 보고 푹 쉴 기회는 없는 모양이었다.

“일단 한가할 때 잠부터 자자.”

김지훈이 간만에 대낮부터 잠을 청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환자를 보았다.

저녁 무렵,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가 왔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웃었다.

“샘, 이번 주말은 그래도 편하시겠네요.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는데 푹 쉬세요. 아 참! 치킨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과장님이 안 계시다고 그러는 건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든 김지훈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몇 번을 진찰해도 확신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아뻬를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질환일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다.

서도진은 물론 김지훈까지 눈가를 찌푸린 채 고민을 거듭했다.

“도진아, 아무래도 입원시키고 지켜보는 게 좋겠지?”

“예.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원을 권유했다.

“보호자분, 지금 환자분이 맹장염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입원해서 하루 이틀 정도 지켜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좋아지면 다행이지만 맹장염이 확실해지면 바로 수술하셔야 합니다.”

보호자의 눈이 김지훈의 위아래를 훑었다.

“혹시 전문의신가요? 아닌 것 같은데, 과장님이 직접 보시고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입원 권유부터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과장님은 지금 부재중이시고, 전 전공의 3년찹니다. 환자분 같은 경우 지금 당장은 바로 수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만일…….”

“됐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다른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수술을 전공의한테 받을 수는 없잖아요. 전문의가 없으면 없다고 미리 얘기를 해야지. 사람들이 말이야. 시간만 낭비했네.”

보호자가 짜증을 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전문의와 전공의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병원에 몇 번 와 봤다면 누가 전공의인지는 딱 보면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검사 결과하고 소견서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꼭 입원해서 지켜봐야 하니까 집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의사를 불신하면 아예 진단까지 못 믿는 경우가 있었다. 김지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신당부를 했다. 서도진이 투덜거리며 간략하게 소견서를 작성했다.

“에이! 과장님 안 계시다고 바로 가라고 했으면 더 난리칠 사람들이 꼭 말을 저렇게 해요.”

“뭘 그렇게 투덜거려? 우리 같아도 그랬겠지. 대충 쓰지 말고 자세히 써. 기분 따라 환자 볼 수는 없잖아.”

“선생님, 어차피 지금은 대구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다 다시 검사할 텐데, 이 정도만 써도 되죠.”

김지훈의 눈빛이 변했다.

“서도진, 어쨌든 환자고 보호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냐. 자세히 쓰면 쓸수록 진단하기 편해지지 않겠어? 너 갑자기 왜 한 번도 안 보이던 모습을 보이고 그래?”

“에이! 저도 순간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할 테니까 화내지 마세요. 화 안 나셨죠?”

서도진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떨었다. 그러고는 꼼꼼하게 소견서를 작성했다.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후배인 서도진에게 화를 낸다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다 화를 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수술에 관한 한 전문의에 대한 신뢰는 생각 외로 강했다. 개인 병원에서 아뻬로 의뢰한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송동화 과장의 부재에 대해 말을 꺼내자마자 불신의 빛을 역력하게 보이며 결국 대구로 갔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주말 동안 우리 과 환자는 보기 어렵겠다. 과장님 말씀대로 편하긴 하겠네. 확실히 수술은 기대하기 어렵겠지?”

“예. 그러니까 제게 맡기고 쉬세요.”

“그래. 쉬어야겠다. 근데 왜 이렇게 피곤하니. 아후! 머리까지 아프네.”

단순히 잠만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환자가 보이는 불신은 정신적인 피로까지 몰고 왔다. 전공의의 한계와 환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공연히 속이 상했다.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던 간호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샘, 속상하세요? 과장님이 안 계시면 누가 있어도 다 그래요. 그동안 수술한 환자가 없어요. 솔직히 선생님이 과장님만큼 수술 잘하신다는 걸 누가 알겠어요? 나 같으면 철석같이 믿고 맡길 텐데.”

“과장님만큼? 에이! 그런 말 말아요.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따라가려면 정말 멀었네요.”

“어머! 최명철 환자 살린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죠.”

말이라도 고마웠다. 어깨를 으쓱인 김지훈이 편하게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갈 환자들이라면 서도진에게 전적으로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선은 믿을 수 있고, 불안하면 반드시 연락을 할 서도진이기 때문이었다.

막 나가려는 순간 응급실 문이 열렸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업기에는 꽤 큰 아이를 업고 허둥지둥 들어왔다.

“아이고! 됐다. 간호사 선생님, 우리 아가 배가 아파서 왔어요. 어제까지 잘 놀았는데 갑자기 아프다네요. 우짠 일인지 모르겠네.”

엄마의 등에서 내린 아이가 배를 움켜잡았다. 어째 오른쪽으로 구부린 채 삐딱하게 선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김지훈과 눈빛을 교환한 서도진이 인턴과 함께 진찰을 했다.

“선생님, 아뻬 같은데 잘 설명하고 보내겠습니다.”

“과장님 안 계시니까 어째 더 많이 오는 것 같다. 당직 날에나 이렇게 오지.”

쩝쩝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빤히 환자가 있는데 진찰도 안 하고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김지훈 자신의 원칙을 깨는 일이자,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었다.

“도진아, 나도 그러면 편하겠는데 환자에게 문제 생기면 니가 책임질래? 과장님이 안 계실 때는 내가 책임을 져야 돼.”

김지훈이 꼼꼼하게 아이를 진찰했다. 전형적인 아뻬였고, 진행이 빠른지 증상이 상당히 심했다.

김지훈이 아이 엄마를 붙들고 한참 동안 설명을 했다. 아이 엄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수술을 하려면 대구로 가라고요? 니도 하필이면 이럴 때 아파서 이게 뭔 고생이고. 퍼뜩 가자.”

어쨌든 다들 고생이다.

아이 엄마가 눈가를 찡그리며 다시 아이를 업으려다 말고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민망할 정도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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