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4화 (394/1,329)

제9화 신뢰는 말로 얻지 못한다 (1)

사실 김지훈은 나름 절박했다. 전공의 생활만 3년째였다. 이젠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감을 잡을 정도는 됐다. 몸에서 전해지는 피로가 만만치 않았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심리적 압박감이었다.

서도진이 제 몫 이상을 해 주고는 있지만, 박순용을 비롯해 챙겨야 할 후배들이 너무 많았다. 일반 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에 응급실 인턴 3명까지 인턴만 최소 6명을 책임져야 했다. 더욱이 3주마다 인턴들을 다시 가르쳐야 하는 근무 형태 역시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 가서 뻗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해결책을 만들어야 했다.

변상훈 과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인턴들 인수인계장은 뭐야? 여기서 더 보강할 게 있냐고? 인턴들이 이 정도만 해 줘도 훌륭하지. 뭐가 부족한 것 같은데?”

“과장님, 이 정도로 충분할까요? 과장님들과 제가 없어도 확실하게 환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응급실이든 어디든 제대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어제 자리를 비웠던 장성기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실 간호사들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 불과 서너 명의 환자였지만 생각보다 김지훈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컸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지금처럼 계속 일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미였다.

“알았어. 인턴들에게 가능한 선까지 적어 줄게. 근데 글로만 봐서 이게 될까?”

“제가 먼저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가르칠 생각입니다. 두 달이나 남아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변상훈 과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수인계장을 보강했다. 한두 페이지에 불과했던 분량이 쑥쑥 늘어났다. 보다 전문적인 내용까지 포함돼 녹록하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최명철 환자를 보며 인수인계장을 읽던 김지훈의 목이 팍 꺾였다. 순간적으로 잠에 빠진 것이다.

한동안 꼼짝도 안 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기계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어후! 깜빡 졸았나? 아! 피곤하다.’

가뜩이나 뻘건 눈이 더 빨개졌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남은 부분을 마저 읽은 후 응급실로 갔다.

최명철이 김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응급실에 도착한 김지훈이 서도진과 인턴들을 불렀다. 야간 근무를 대비해 휴식을 취하던 인턴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났다.

“쉬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꼭 필요한 일이니까 정신들 차리고 내 말 잘 들어. 과장님들이 안 계실 때가 있다는 것은 다들 알지? 그래서 인수인계를 다시 만들었어. 이 안에 담긴 내용 확실하게 파악하고, 앞으로 환자들 제대로 봐야 돼.”

밤새 킵을 하느라 이제야 잠을 청했던 이혁원이 눈만 껌벅거렸다. 흉부외과와 성형외과 인턴들이 오프 때는 대신 일을 해야 하는 응급실 인턴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수인계장을 받아 든 인턴들의 얼굴이 노래졌다. 가뜩이나 지금도 김지훈에게 활활 타고 있다. 그런데 알아야 할 내용과 해야 할 일이 더 는다면 얼마나 더 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인수인계장이 아니라 휘발유를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프는 확실하게 가자. 응급실은 일정대로 알아서들 가고, 혁원이하고 성형외과 인턴 선생은 화목 오후 일곱 시에 가면 돼. 단, 나한테 연락은 해야 한다. 일할 때 확실하게 집중하고 서로 도우면 생각보다 힘들지 않을 거야. 이런 게 다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되니까 열심히 해.”

서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겁먹지 마. 그리고 선생님이 우리에게 일만 시키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가장 힘들게 일하시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하자. 선생님, 얘들이 이 정도만 해 주면 그래도 좀 돌아가겠는데요.”

역시 서도진은 김지훈의 의중을 바로 알아챘다.

한동안 앞으로의 근무 방식에 대해 상의를 한 후 자리를 끝냈다. 다들 처음에 느낀 부담감과는 달리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표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김지훈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픈 환자에게는 여유가 없다. 그 말은 곧 우리에게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는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 인수인계장에 적힌 내용 확실하게 파악해.”

오늘은 화요일이다. 결국 오프를 가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여유를 기대했던 인턴들의 얼굴에 불만이 서렸다. 이혁원만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응급실 콜이 오면서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김지훈이 인턴들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래 진료 때문에 치료가 늦어지자 직접 안면부 열상으로 온 환자를 봉합하고, 흉부외과에 관련된 환자까지 처리했다. 그 와중에도 인턴 교육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이럴 때는 천사가 따로 없었다.

“인턴 선생, 얼굴 봉합은 자신감과 정성이 필요해.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연습 많이 해. 그래야 수처를 받을 수 있어.”

“혁원아, 흉부 타박이 생각보다 상당히 고통스럽다. 다른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서면 일단 통증부터 조절해.”

환자 처리가 모두 끝났지만 끝이 아니었다.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김지훈이 시계를 보다 말고 깜짝 놀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후 회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이혁원이 동기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김지훈 선생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체력도 무시무시하지만, 환자 볼 때 보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어. 그러니까 과장님들도 노티만 받으시고 안 오시겠지?”

“내가 전 텀에 내과 돌았잖아. 공정식 선생님도 정말 열심히 환자 본다고 생각했는데, 김지훈 선생님은 한 수 위인 것 같아. 니 말대로 정말 무섭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혁원이 갑자기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 나 오늘 오픈데, 그럼 중환자실 환자는 누가 보지?”

인턴 숙소에서 함께 생활한 덕에 중요한 환자들이 있으면 서로 상의하곤 했다. 구미 병원의 규모가 크지 않아 전공의들의 일정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환자가 흉부외과로 가긴 했지만, 서도진 선생님이 킵을 하시겠지. 어? 아니네. 서도진 선생님도 오프잖아?”

인턴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답은 하나다. 일반 외과 치프이자 전체 의국장인 김지훈이 킵을 할 것이다.

불평불만이 슬그머니 사라지며 다들 인수인계장에 고개를 박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타도 아얏! 소리 한번 못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김지훈이 내린 오더를 확실하게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구미 병원에 불이 났다. 발화점은 단 한 명의 인간, 김지훈이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온 사방을 뛰어다니며 스스로 활활 불타올랐다.

인수인계장은 휘발유가 분명했다. 김지훈의 손길이 한 번 스칠 때마다 인턴들이 타들어 갔다. 박순용은 아예 하얀 재가 돼 휘날렸다.

오로지 한 가지만이 기준이었다. 환자를 제대로 보는지, 못 보는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일과 중이라도 일이 없을 때는 자든 말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았다. 한가할 때면 함께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환자를 앞에 두고 방심하면 여지가 없었다. 중환자실 킵을 하고 있는 이혁원은 아예 찍힌 것처럼 탔다.

“이혁원, 한 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 있으려면 그냥 가서 자. 집중과 선택을 잊지 말라고 했잖아. 무쇠라고 해도 하루 종일 환자에게만 매달리면 어떻게 버티겠어? 집중해. 그래야 너는 물론이고 환자한테도 훨씬 좋아.”

이제 최명철은 앉아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김지훈은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화요일에 이어 목요일에도 밤새 수시로 환자를 살폈다.

김지훈의 눈가에 일명 다크써클이라는 어둠이 내릴 정도였다. 서도진과 인턴들을 믿고 수요일에 오프를 가긴 했지만 의외로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 수술을 준비하고, 논문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턴들이 환자를 제대로 볼지 걱정까지 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럴 때 힘을 주는 일이라도 없으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금요일 아침, 마침내 가슴 벅찬 일이 일어났다. 최명철이 드디어 일반 병실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송동화 과장까지 와 환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김지훈은 도리어 가슴이 벅찬지 웃지도 못했다.

“환자분, 정말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원할 일만 남았네요.”

“고맙다니요.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나요. 선호야, 이젠 다른 소리 하지 말고 학교 가라. 안 그럼 혼난다.”

수술실에서 죽음을 앞뒀던 환자였다. 이렇게 좋아져 병실로 올라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간의 피로가 모두 사라졌다. 그리운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다소 덜은 것 같았다. 더욱이 닦달을 해 댄 덕인지 인턴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이렇게만 가면 괜찮겠어. 조금만 더 노력하자. 인턴 선생들도 조금만 더 참아. 그러면 다들 익숙해지고, 곧 편해질 거야.’

김지훈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공정식을 찾았다.

채찍을 휘둘렀으면 당근도 주어야 한다. 그게 세상 이치지만, 김지훈에겐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정식아, 회비 남았지? 우리가 온 지 딱 한 달 됐고, 그동안 나 때문에 인턴들 고생이 많았잖아. 오늘 회식이나 하자.”

“회식? 사람이 몇 명인데 이 돈으로 회식을 해?”

“간단하게 하자. 인턴들한테는 족발하고 보쌈 시켜 주고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에는 치킨 좀 시켜 줘. 그 정도는 되지 않나? 혹시 돈 남으면 인턴들 먹으라고 맥주까지 어때?”

공정식이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들까지 챙기면 빡빡하지만 되긴 되겠네. 근데 우린 안 먹어?”

“우린 과에서 준 의국비 있잖아. 그걸로 먹으면 되지.”

“에이! 공짜로 먹는 게 더 맛있는데. 알았어. 인턴들 좋아하겠다. 구미에서 전체 의국비로 하는 회식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야. 그치? 그동안 그 돈 누가 다 썼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니 덕에 욕은 안 먹겠다.”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전체 의국장은 전통적으로 일반 외과 치프가 했기 때문이다. 맞장구를 쳐 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유석재 선생님하고 최철한 선생님은 사적으로 돈을 쓸 사람들이 아닌데, 유용하게 사용하셨겠지.’

나름 위안을 삼으며 돌아서는 순간, 인턴 한 명이 지나갔다. 공정식이 잘됐다는 듯 인턴에게 전체 회식을 알렸다. 인턴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 병동으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족발하고 보쌈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일이 힘들긴 힘들었나 보네. 혹시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주고 있나?’

피식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한가했다. 박순용이 반쯤 감긴 눈으로 그동안 밀린 일을 하고 있었고, 서도진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김지훈도 의국 구석에 앉아 잠시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마자 꿈나라로 직행을 했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박순용이 부러운 눈으로 한숨만 쉬었다.

그런데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눈을 뜬 김지훈이 한껏 기지개를 펴며 의국을 나갔다.

잠결에 최명철 생각이 난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막 올라온 환자는 하루 이틀 정도 바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이혁원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과 하루도 안 됐는데 병실 안에 난이 가득했다. 친척들과는 관계가 묘해도 꽤나 처신을 잘한 모양이었다.

잠시 최명철을 살핀 김지훈이 이혁원에게 잘하고 있다는 눈길을 준 후 병실을 나왔다. 편안함과 기쁨이 가득한 최선호의 얼굴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오후 회진이 끝난 후, 김지훈이 서도진과 박순용을 불렀다.

“도진아, 우리 의국비 얼마 남았지? 나가서 삼겹살 먹자.”

“오더도 안 냈는데 나가자고요? 박순용 선생님은요?”

100일 당직 기간 중 1년차는 외출 자체가 금지다. 그러나 김지훈은 이 정도 예외쯤은 얼마든지 허락할 수 있는 치프다. 물론 눈에 안 띄어야 하지만 말이다.

“내일 입국식이잖아. 선생님들이 주는 술 받아먹으려면 힘이 있어야지. 시간 없다. 빨리 나가자.”

김지훈이 가운만 벗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박순용을 보며 씨익 웃은 서도진이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핀 후 재빨리 병원을 나왔다. 어디선가 고소한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다.

박순용이 깊게 숨을 들이켜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무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한 것이다.

‘순용이 형, 좋죠? 고생한 만큼 더 좋으실 겁니다.’

당연히 좋았다. 식사 자리가 길어지는 만큼 일과가 늦게 끝나겠지만 박순용은 그래도 좋았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군대에서 자대 배치 전에 훈련 마치고 첫 외박을 나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때도 한 달 만에 나왔는데 이번에도 한 달이네요.”

서도진이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웃었다.

“선생님, 이건 아주 예외적인 일이에요. 전 작년에 입국식 날 빼고 백 일 내내 단 한 번도 못 나왔어요. 그땐 죽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저도 2년차네요.”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평소에는 잘 안 가는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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