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3화 (393/1,329)

제8화 자! 다시 시작이다 (2)

치프로서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었다.

“선생님, 이번 주 토요일에 입국식입니다. 선생님도 가실 건가요?”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다. 응급실 문제로 이혁민 선생님을 만나야 해서 가야 될 것 같아. 주말에는 너랑 도진이 둘이서 커버해야 돼. 대개 내가 없으면 환자들이 대구에서 수술을 받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신경은 바짝 써야겠지?”

금경태 과장이 아니라 이혁민 교수를 만난다?

다른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막연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건 절대적으로 스승에게 좋은 일이었다.

입가를 살짝 치켜 올린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또 하나의 문제를 꺼냈다.

“그러면 박순용 선생님 집도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신뢰를 얻은 1년차들은 대개 입국식을 전후에 첫 수술을 받는다. 믿으면 믿을수록 빨리 받기 마련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이번 주에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결정은 과장님이 하셔야죠. 전 일단 박순용 선생님이 집도를 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김지훈이 눈을 반짝이며 급히 박순용을 불렀다. 환자가 올라오려면 15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배우고 스스로 깨우친 대로 트레이닝을 시킬 때였다.

“박순용 선생님, 지금 아뻬 환자를 직접 수술한다고 생각하시고 수술 과정 설명해 보세요.”

1년차가 된 지 어느새 한 달째다. 곧 입국식이었기에 박순용도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미 서도진에게 넌지시 물어 나름 준비를 했고, 수술 기록지는 달달 외우고 있었다.

박순용이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수술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김지훈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건 다른 환자 수술 기록지잖아요. 모든 환자를 기록대로만 수술할 수 있어요? 제법 뱃살이 있는 환잔데 평행 절개로 5센티미터 정도만 열고 한다고요? 그건 나도 힘들 수 있어요.”

박순용이 눈가를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안 터진 게 확실해요? 만일 터졌으면 지금 설명한 대로 수술을 할 수가 없잖아요. 전에 내가 분명히 수술 들어오기 전에 미리 여러 경우를 생각하고, 그에 맞게 준비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듣긴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데다 언제 수술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먼 일이라는 생각에 그냥 흘려버린 것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박순용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누구보다도 정말 힘들게 일했는데 살살 해야 하나? 아니지. 그럼 또 기억을 못할 거야. 만일 박순용 선생님이 뒤처지면 그 속에는 내 탓도 있어.’

일반 외과 전공의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수술을 배우는 것이다. 1년차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 또한 치프의 역할이었다.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시뻘건 눈이 시뻘건 눈을 노려보았다.

“치프들이 하는 말은 다 1년차 교육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기억하세요. 그럼 퍼스트를 선다고 생각하고 설명해 보세요.”

퍼스트 입장에서 설명하라고?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생각하지도 못했다. 박순용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수술 기록지는 집도의의 과정이지, 퍼스트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수술실에서도 집도의에게만 집중했지, 퍼스트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설명할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요.”

몇 번이나 반복을 했는지 몰랐다.

환자가 수술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입으로 배만 열었다.

박순용이 아무 말도 없이 수술실로 향하는 김지훈의 뒤만 따랐다. 평생 후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그 어떤 선배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조용조용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훨씬 쉽고 편할 것이란 생각에 솔직히 짜증도 났다. 어쨌든 집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야 할 퍼스트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입국식이 코앞인데 퍼스트도 못 서겠네. 제길! 힘들다.’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송동화 과장이 얼굴을 비쳤지만 수술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아뻬는 김지훈이 집도를 하고, 서도진이 퍼스트를 설 것이다.

그런데 김지훈이 슬쩍 송동화 과장과 눈길을 교환한 후 뜻밖의 말을 했다.

“박순용 선생님, 퍼스트 서세요. 도진아, 잘 도와줘.”

“야! 선생님! 드디어 퍼스트 서시네요.”

서도진이 웃으며 세컨 자리에 섰다. 박순용이 기대하지도 못한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드디어 바라 마지않던 퍼스트를 서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렸고, 김지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가슴을 진정시킨 박순용이 김지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방향이 틀렸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눈짓을 했다. 박순용이 그제야 송동화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잠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 후 수술이 시작됐다.

박순용의 이마에서 땀이 뻘뻘 흘렀다.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뚱뚱하다고 해도 삼사십 분 정도면 끝날 수술이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김지훈이 끈질기게 기다려 준 탓에 다행히 실수를 하진 않았다.

배를 닫을 때가 돼서야 송동화 과장이 김지훈에게 살짝 신호를 하고는 수술실에서 나갔다.

곧 수술이 모두 끝나고 환자를 회복실로 옮겼다. 서도진 대신 김지훈이 옆에 앉았다.

“박순용 선생님, 내가 항상 무엇을 강조했죠?”

“환자와 기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퍼스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타이 연습은 하고 있어요? 동맥 묶을 때 끊어지면 배 더 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김지훈은 천사였다.

박순용이 1년차로서 전에 없이 아주 시원하게 탔다. 퍼스트를 서는 과정과 집도 과정을 열댓 번은 반복했다. 사소하다고 지나쳤던 과정을 빼먹는 순간 바로 다시라는 말이 떨어졌다. 해야 할 일이 없었다면 밤을 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날 밤 12시쯤 아뻬가 하나 더 떴다. 박순용이 환자를 보자마자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김지훈에게 연락을 했다. 아뻬 진단하에 송동화 과장에게 바로 연락을 하자 대구에서 막 출발한다는 답이 왔다.

‘지금 출발하시면 수술 결정까지 최소한 한 시간은 잡아야 하겠지? 이렇게 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시간상 평상시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근 한 시간 동안 응급실을 떠나지 못하던 김지훈이 송동화 과장이 도착하고 나서야 얼굴을 폈다.

곧바로 수술이 결정됐다.

“지훈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 이 환자도 네가 수술해. 지금처럼만 해 주면 나도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

김지훈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신뢰였다. 수술을 들어가며 더욱 마음을 다잡은 김지훈이 박순용을 불렀다.

“이번 수술은 도진이가 없으니까 더 집중하세요.”

퍼스트를 너무 못 서 기대도 하지 않았던 박순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한 수순이 이어졌다. 박순용이 바짝 긴장을 하며 김지훈의 말대로 수술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수술 전과 수술이 끝난 후에 너무 살벌하게 타 잠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인턴이 있어서인지 수술 중에는 태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박순용이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며 이를 악물었다.

‘김지훈 선생님 말이 맞아. 한 달밖에 안 됐어도 난 엄연한 일반 외과 전공의야. 내 몸이 힘들다고 동기들이 얼마나 열심히 할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새벽이 다 돼서야 박순용이 잠깐 눈을 붙였다.

책상 위에 수술 기록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수술을 끝낸 김지훈이 습관적으로 중환자실에 이어 응급실에 들렀다. 마침 이혁원이 흉부외과 환자를 보고 있었다. 진찰이 끝난 후 주의할 점을 알려 주고 숙소로 올라왔다.

어느덧 시계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분명 큰 문제 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하루 일과를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1년차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만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지? 과장님은 매일 저녁 부재에 변상훈 과장님이나 장성기 과장님도 자리를 자주 비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박순용 선생님도 챙겨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가는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환자는 환자대로 보기 힘들 것이다. 결국 과장들도 불안해져 마음 편히 대구 병원에 다녀오지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김지훈이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 일과를 찬찬히 되짚기 시작했다.

오전 회진은 항상 일정하다. 정규 수술이 끝나는 시간은 불규칙하지만, 어쨌든 주중에는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응급 환자가 없다면 오후 회진과 오더를 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여기까지는 몸에 붙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를 힘들게 한 일은 무엇일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빤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 때문이었다. 어디에서든 그런 일이 터지기 마련이었지만 특히 응급실 환자가 문제였다. 더구나 두세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한 탓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진이에 인턴들까지 있는데, 내가 왜 혼자 환자를 봤지? 도대체 이유가 뭐야?’

서도진과 박순용, 그리고 이혁원을 비롯한 많은 인턴들이 함께해 주어야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자란 능력부터 채워 주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평범하지만 노력하는 써전들이 모여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수 있다면 병원도 마찬가지겠지. 그래. 후배들부터 확실하게 가르치자. 그게 최선이야.”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급히 인턴 숙소로 달려갔다. 마침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와 있던 이혁원이 벌떡 일어났다. 새벽 4시가 다 됐다. 이혁원이 엉뚱한 걱정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킵하는 중에 올라왔다고 뭐라고 하시지는 않을까?’

“혁원아, 인수인계 받은 거 있지? 성형외과 것도 가져와 봐. 아! 그리고 너 수처 연습 철저히 해.”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새벽 4시에 인턴 숙소를 찾았다니,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인수인계장을 받아 든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 정규 수술로 잡힌 탈장 수술을 준비한 후 인수인계장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는 한동안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었다.

새벽 5시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래도 투자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눈이 벌건 채 회진을 돌던 김지훈이 순조롭게 회복되는 환자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송동화 과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힘들다는 표가 팍팍 나는데도 불평은커녕 웃고 있네. 미안하긴 하지만, 참 믿음직하네.’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던 송동화 과장이 더욱 즐거운 기분으로 수술을 줬다. 겸연쩍게 웃으며 인사를 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는 김지훈은 언제나 웃음을 불러왔다.

수술 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수술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수술에만 집중했다. 박순용도 어제의 일 때문인지 눈을 부릅뜨고 수술 과정을 보았다. 김지훈과 송동화 과장의 손이 정확하고도 빠르게 움직였다.

소아 탈장에 이어 성인 탈장까지 끝이 났다. 박순용과 오더를 낸 김지훈이 난데없이 아뻬 수술 과정을 물었다. 쉴 새 없이 다시라는 말이 터졌다. 박순용의 이마가 흠뻑 젖을 때쯤에야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박순용 선생님, 환자 기록, 드레싱, 병동 환자 관리는 이제 웬만큼 하시잖아요. 그럼 다음 단계를 스스로 준비하셔야죠. 내가 주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이면 수술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응급실 환자도 마찬가집니다. 백 일 당직 끝나면 혼자 보고 어떻게 치료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섬뜩한 말이었다. 송동화 과장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치프의 말이라면 허언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순용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특히 심각한 수면 부족으로 인해 툭하면 졸기 일쑤였다.

그런 사실을 빤히 알고 있는 김지훈이 박순용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일이 생길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정신력도 약해져 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박순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지독하네. 다들 이렇게 살았다니, 말은 못하지만 정말 힘들다. 입국식을 할 때쯤이면 그래도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어째 점점 더 힘들어지냐.’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이 가운을 휘날리며 수술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외래로 가 변상훈 과장과 장성기 과장을 만났다.

잠시 쉴 만도 한데 정말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김지훈이었다. 아니면 정신력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