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2화 (392/1,329)

제8화 자! 다시 시작이다 (1)

전공의에게나 한 달 월급이 넘는 고가의 상품이지, 과장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구미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는 삐삐를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저놈의 휴대폰만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언제 어디서든 콜을 받을 수 있으니, 병원과 거리만 가까우면 언제든 외출이 가능하다.

뿐인가? 고경아와 통화하기 위해 굳이 공중전화 박스를 찾지 않아도 된다.

생각할수록 점점 부러워지는지 김지훈의 눈이 자꾸만 휴대폰으로 쏠렸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다. 탐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사 대면 돈주머니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삐삐로 만족할 일이었다.

“간호사들이 우리 번호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쨌든 노티가 안 될 일은 없었다.

잠시 머리 아픈 일은 접고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갔다.

장성기 과장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요새 응급실 차트만 보면 웃음이 나와. 거의 다 두 장이야. 도대체 누가 첫 장에 빨간 줄을 그렇게 그어 대는 거야? 지훈아, 누구냐?”

빤히 알고 있는 물음에 김지훈이 딴청을 피웠다.

“하여튼 인턴 선생들이 지금처럼만 일해 주면 걱정이 없겠어. 수처 제대로 못하면 네가 나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혼내. 수처는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듣던 김지훈이 슬쩍 송동화 과장을 보았다. 불현듯 고경아의 아버지가 떠오른 것이다.

‘고, 성 자, 문 자를 쓰신다고 하셨지. 잘하면 과장님이 아실지도 몰라. 어떤 분이실까?’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다소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따르르릉’이 아니라 ‘띠리리리’였다. 변상훈 과장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 기흉이 의심된다고? 알았어.”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단순 늑골 골절이면 몰라도 기흉이면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때에 흉부 도관을 삽입해야 할 환자가 왔다. 궁금증을 꾹 누른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과장님, 이왕 세 분이 모두 모이셨는데 조금 더 계시죠. 제가 흉부 도관 박고 입원시키겠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변상훈 과장이 대답도 하기 전에 부리나케 사라지는 김지훈을 보며 모두들 웃었다.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서울 병원으로 올라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혼자 히죽히죽 웃다 말고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지 입을 벙긋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스승님, 송동화 과장님 꼭 올라가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좋아 죽던 김지훈이 흠칫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간담도를 전공한 스승이 잘못하면 응급 의학과를 하게 생겼다. 좋든 나쁘든 스승이 가는 길이다. 친구 따라 강남도 간다는데 정말 골머리가 썩을 것이다.

‘어후! 스승님이 좋아하실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네. 제길! 당장은 편해지셔서 좋긴 한데, 영영 우리 과를 못하시면 어쩌지? 나도 응급 의학과를 해?’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송동화 과장은 이미 응급 의학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도 깊은 갈등에 빠져 고민하고 있을지 몰랐다. 어쨌든 결정은 온전히 스승의 몫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준영 과장이 스승이라는 사실에는 한 치의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카르페 디엠이다.

이런 때일수록 좋은 생각만 해야 했다. 불길한 생각을 꾹꾹 밟아 땅속으로 처넣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스승을 경원시하는 금경태 과장.

스승과 두터운 친분을 가진 이혁원 교수 및 송재덕 과장.

이런 대립 구도 속에서 송재덕 과장이 천안 병원 병원장이 됐다. 송동화 과장이 서울로 올라가면 이준영 과장에게는 또 하나의 날개가 달리는 꼴이다.

금경태 과장에게는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이준영 과장이 응급 의학과 과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반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일반 외과 내에서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여기에 변상훈 과장과 장성기 과장까지 발령이 났다. 무언가 병원 전체에 걸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개 전공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변동이 있다고 해서 할 일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입장은 달랐다.

‘만일 송동화 과장님이 제대로 준비를 못해 응급 의학과 개설에 차질이 생긴다면 스승님께는 최악의 일일 수도 있어. 이런 일 하나가 틀어지면 다른 일에도 영향을 줄 거야.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은근히 소름이 돋았다.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스승에게 좋은 일은 제자인 자신에게는 훨씬 좋은 일이었다. 행여 작은 실수 하나가 큰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야 해. 그래야 두 달이야. 그 시간으로 스승님이 지금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 그래! 다른 생각 말고 음성에서처럼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가슴이 빡빡해지면서 어깨가 무거워졌다. 일말의 불안감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다면 크게 웃을 일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졌다. 자신만의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름 각오를 다지며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경아 씨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되게 궁금하네. 기회 되면 과장님께 꼭 물어봐야지. 아실까?’

세상도 그렇고 사람 관계까지 참 어렵기만 했다.

***

흉부 사진을 보는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측 폐 상부에 초승달 모양으로 검은 음영이 가느다랗게 걸려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발생한 기흉이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병변을 이혁원이 정확하게 잡아낸 것이다.

‘그래. 사진 하나를 봐도 꼼꼼하게 봐야지. 그래야 환자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야. 잘 찾아냈네.’

초기에 정확히 진단해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더구나 외상이 아닌 자연적으로 발생한 기흉이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상태를 설명한 김지훈이 무슨 이유인지 서도진을 불렀다.

“도진아, 기흉 환자 흉부 도관 박을 거야. 잘 보고 다음번에는 니가 해야 하니까 확실하게 준비해. 혁원이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제가요? 변상훈 과장님이 뭐라고 안 그러실까요?”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당연히 뭐라고 하시겠지. 흉부외과 애들은 1년차 때 하는 처치야. 이 정도는 우리도 정확하고 익숙하게 할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바이탈을 제대로 잡지.”

서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물었다.

“근데 좋은 일 있으세요?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일이 있긴 한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따가 얘기해 줄게.”

이준영 과장과의 각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좋을 일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일이 늘어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년차와 동시에 환자를 본다는 것 자체가 2년차에게는 스트레스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힐끗 서도진에게 눈길을 준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환자를 볼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집중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심하게 흉부 도관을 삽입한 김지훈이 이혁원에게 입원 기록지와 오더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락없이 빨간 줄이 쫙쫙 그어졌다.

“다시 작성해. 응급실 환자가 아니라 입원 환자야. 똑바로 못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이혁원을 노려본 김지훈이 서도진과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기실에 있던 최선호가 달려왔다.

“선생님.”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구겨졌던 김지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런 기분 때문에 피곤도 잊고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

“선호야, 오늘 면회 다 끝났잖아. 이젠 좀 자. 그리고 너 이제 학교 가야 하지 않겠어?”

“전 괜찮아요, 선생님. 아버지는 괜찮으시죠?”

학교에 대해서는 대꾸도 안 했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버지의 건강일 것이다. 김지훈이 최선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아침에 보자.”

이제는 최선호에게도 특별 면회를 허락할 단계는 지났다. 아쉽고 서운한 눈길을 뒤로하고 중환자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서도진과 마주 앉았다.

송동화 과장과 나눈 말을 전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상의했다. 서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지만 쉽게 가는 길은 없었다. 김지훈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프만은 확실하게 챙겨 주는 것이었다.

“도진아, 일단 주간에는 우리가 응급실을 기본적으로 커버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주중 오프는 지금처럼 화목에 가고, 우리 과 환자는 너나 나나 박순용 선생님과 동시 노티를 받아야 해. 단 반드시 박순용 선생님이 먼저 환자를 보게 하고, 최대한 간격을 줄이는 데 신경을 써.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해결하자.”

“우리 과 환자는 그렇다고 쳐도, 흉부외과하고 성형외과까지 커버해야 하는 날에는 정말 만만치 않겠는데요. 열심히 해 봐야죠. 대신 흉부외과 처치들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준비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역시 서도진이었다. 짜증을 부려도 이상할 일이 아닌데 흔쾌히 동의를 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서울에 송동화 과장님과 함께 올라갔으면 좋겠어. 그래야 이준영 선생님도 편해지실 거야.”

“선생님도 참 희한해요. 그렇게 타고도 이준영 과장님을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하긴 나도 가끔은 그렇게 해서라도 확실하게 배우고 싶긴 하네요. 기회가 있겠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대신 눈물 쏙 빠질 거다. 열심히 하는 놈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닌 데다, 옆에서 보는 거하고 실제로 타는 건 차원이 달라.”

“은근히 겁나네요.”

“어쨌든 각오는 단단히 하는 게 좋겠지. 난 올라갈 테니까 환자 오면 바로 연락해. 아니구나. 오늘 니가 당직이지. 난 중환자실만 신경 쓰면 되겠네.”

서도진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쓰윽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이 모른 척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래도 오프를 간다는 말에 서도진이 웃었다. 김지훈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치프가 먼저 오프를 챙겨야 아랫년차가 편해진다는 사실을 조금씩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음 날, 김지훈이 연신 머리를 긁었다.

이미 약속이 잡혀 있었는지 장성기 과장이 외래 진료 시간을 조정한 후 대구 병원으로 갔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정규 일과 중에 콜이 오는 대로 성형외과 환자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결국 송동화 과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술 사이사이에 환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휴! 변상훈 과장님까지 가셨으면 죽을 뻔했네. 이러다 죽도 밥도 안 되겠어. 확실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 과 환자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힘내자.’

하루 종일 병동, 수술 방, 응급실, 중환자실을 오갔다. 덩달아 서도진까지 바빠져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오후 회진을 돌기 직전에야 간신히 새로 입원한 환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치 1년차를 다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 첫날부터 정말 만만치 않네요. 내일은 다들 계시겠죠?”

“아직까지 말씀 없는 거 보니까 그렇겠지. 그것보다 과장님과 연락이 잘돼야 할 텐데 오늘 밤이 문제다.”

은근한 걱정이 앞섰다. 이왕 올 환자라면 송동화 과장이 있을 때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역시 구미답게 아뻬 환자 한 명이 왔고, 다행히도 회진이 끝날 무렵이었다.

우르르 몰려가 차례차례 환자를 보았다.

검사다 뭐다 해서 통상 1시간 정도는 걸려야 할 과정을 30분 내에 끝냈다. 노티를 받고 온 송동화 과장이 시간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아,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다. 다른 문제 없겠어?”

“예. 도리어 여기까지는 시간이 단축돼서 환자들에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도 있네. 아무튼 너무 서두르지는 마라. 환자들에게는 미안해도, 정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면 당분간은 대구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예, 알겠습니다.”

진단이 안 된 환자를 두고 서두르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자칫 오진이라도 하면 쓸데없는 수술을 할 수도 있고, 거꾸로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함께 수술 방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니가 수술해. 난 결과 확인하는 대로 대구로 출발할게.”

이제 아뻬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정도였지만, 수술은 언제나 가슴을 들뜨게 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가져왔다.

넙죽 허리를 숙인 김지훈이 좋아하며 수술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멈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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