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0화 (390/1,329)

제7화 뭔가 이상하다 (1)

이혁원과 주차장에서 만나 구미로 향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엔진이 굉음을 터트렸다. 한마디 하려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답답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애는 사랑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갑자기 고경아의 아버지가 일반 외과 의사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의사도 흔치 않았던 시절에 전문의 자격을 땄고, 자식까지 의대에 보냈다. 모르긴 몰라도 재산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사회적인 통념상 사돈을 맺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안이란 말이었다. 어쩌면 고경아를 두고 이미 혼담이 오고 갔을지도 몰랐다.

‘내겐 뭐가 있지?’

집도 절도 없는 고아다. 수중에 쥔 돈으로 집 장만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전공의를 마칠 때까지 열심히 모은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어엿한 직업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크게 내세울 일도 아니었다.

‘주택 복권이라도 살까?’

아직은 해가 짧은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답답한 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발치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고경아의 맑은 웃음이 눈앞에 선했다. 꼼꼼하게 자신의 옷을 고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보아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고경아였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머리를 톡톡 쳤다.

‘돈과 집안을 먼저 생각했으면 경아 씨가 날 사랑했을까? 아버님도 날 빨리 보자고 하셨다면 최소한 반대부터 하지는 않으셨단 말이잖아. 그래.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자.’

문득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 속에 담긴 현실에 충실하라는 의미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면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을 함께할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경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만하면 좋은 사윗감 아닐까?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 김지훈이 깜빡 잠에 빠졌다. 5시간 동안의 강행군에 상당히 피곤하긴 했다. 비몽사몽 중에 파노라마처럼 예전의 기억들이 마구 뒤섞인 채 스쳐 지나갔다.

세계 학회에서 얼핏 본 일반 외과 선배들.

큰 스승님의 서재에서 본 빛바랜 사진 속의 낯선 인물.

혹시 그 속에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

일반 외과 의사가 많지 않은 연배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어디선가 호통 소리가 들렸다.

‘자네! 내 딸 고생시키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해!’

김지훈이 잠결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짝 얼굴이 빨개진 김지훈이 슬며시 눈을 감으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야! 잠꼬대까지 이런 식으로 하시네. 설마 자면서도 일 생각을 하시는 거야? 이해는 못하겠지만 정말 대단하시네. 후우! 일반 외과를 해도 되는 걸까?’

이혁원의 가슴속에서 두려움과 감탄이 교차했다.

한동안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거친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눈을 떴다.

어느새 구미에 도착해 있었다. 역시 3시간도 안 걸렸다.

‘이 자식이 누굴 죽이려고 이렇게 밟아.’

“혁원아! 살살 좀 달려, 인마. 이러다 차 퍼지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엔진 오일만 제때 갈아 주면 이 차 앞으로 몇 년은 끄떡없을 겁니다. 스틱이라 운전하는 맛도 좋습니다.”

“이 자식아, 내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신 나게 이혁원을 패 주고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서도진이 보이지 않았다. 환자가 잠이 든 사이를 틈타 잠깐 쉬러 간 모양이었다.

일요일에 시행한 검사들을 차근차근 확인하고 최명철을 살폈다.

곧 눈을 뜬 최명철이 기침을 하다 말고 심하게 파이팅을 하기 시작했다. 호흡은 완벽하게 돌아와 있었다.

심장과 폐에 무리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튜브를 빼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미 며칠 전에 상처 치료도 다 끝났고, 흉부 도관까지 뺀 상태였다. 의식 상태도 상당히 명료해 다른 걱정을 할 일이 없었다.

송동화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원래는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할 일이었지만 별다른 말도 없이 동의를 했다. 김지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혹시나 몰라 변상훈 과장에게도 연락을 했다.

(이 밤에 튜브를 뺀다고? 괜찮겠어?)

“예. 도리어 그게 환자분에게 유리할 것 같습니다.”

(그래. 니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맞는 결정이겠지. 아침에 환자 보면서 나도 튜브를 빼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빼자. 그리고 너희 과 문제는 이제 다 해결됐지?)

“예. 간 손상 부위를 포함해 수술 부위 모두 깨끗합니다.”

(그럼 전과시켜. 남은 문제는 심장하고 늑골 골절인데, 너희들이 볼 이유가 없잖아.)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흉부외과 문제가 겹친 환자는 일반 외과에서 보았다. 전공의가 없는 상태에서 변상훈 과장 혼자 중환자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과장님, 아직 킵을 해야 합니다.”

(이유가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전과시켜. 그리고 내가 본다고 니가 안 볼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적이 없으셔서요.”

(누가 들으면 일 하나도 안 했는지 알겠다. 자식! 과만 바뀌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환자 잘 봐.)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최명철에게 집중했다.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막 튜브를 고정한 테이프를 떼는 순간 서도진이 들어왔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어? 튜브 빼실 거예요?”

“응. 주말 동안 수고했다. 빼자.”

드디어 2주 만에 최명철의 기도를 답답하게 했던 튜브가 제거됐다.

“크윽! 으으으!”

거친 숨소리와 함께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였다. 만일 호흡 상태가 나빠지거나 바이탈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바로 다시 기관 내 삽관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서도진이 즉시 비지에이를 하고, 김지훈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띠! 띠! 띠! 띠!

후우욱! 후우욱!

지속적으로 정상적인 심장박동과 혈압이 체크됐다. 비지에이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환자를 보며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분, 지금은 억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나오실 거예요. 모든 게 순조롭게 회복되시니까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최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환자의 움직임을 제한할 필요도 없어 손발을 묶었던 줄까지 풀었다. 최명철이 힘들게 손을 들어 보며 김지훈과 서도진을 보았다.

“고… 으흠! 고맙습니다.”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지금은 다른 때보다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활짝 웃을 최선호를 생각하니 가슴까지 뛰었다.

다소 흥분된 기색을 보이는 김지훈과는 달리 서도진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주말인 데다 밤에 튜브를 뺐으니 더욱 정신 바짝 차리고 킵을 해야 할 판이었다. 월요일 근무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도진아, 앞으로는 킵할 필요 없어.”

“예? 일반 병실로 올라가기에는 빠르지 않아요?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 텐데, 그동안 누가 킵을 해요?”

“혁원이가 있잖아. 아까 변상훈 과장님하고 통화했는데, 우리 과 문제없으면 전과해 달라고 하셨어. 우리 과 문제는 거의 다 끝났고, 지금은 메인이 심장하고 흉부 손상이잖아.”

서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아무리 혁원이가 열심히 한다고 그래도 인턴이잖아요. 어떻게 믿고 맡겨요.”

“일단 삼사 일 동안 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지. 그 이후에도 내가 시간 나는 대로 봐주면 되고.”

“선생님이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도진아, 혁원이가 우리 과를 할 모양이야. 미리 트레이닝 좀 시키자. 그리고 변상훈 과장님이 계속 나오실 수도 없는 데다 내가 전체 의국장 아니냐. 흉부하고 성형은 맡아서 책임져야 돼. 그렇게 알고 병동 일부터 마무리해. 조금 이따가 내일 수술 환자 보러 올라갈게.”

잠시 후, 이혁원이 영문도 모른 채 중환자실로 불려왔다. 월요일 아침 9시부터 근무 시작인 데다 흉부외과였다. 당장은 김지훈이 부를 일이 없었다.

“혁원아, 이 환자 곧 흉부외과로 전과될 거야. 그러면 니가 책임지고 봐야 되니까, 이참에 중환자실 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자. 좋지?”

좋을 턱이 있을까?

힘들고 말고를 떠나 아직은 인턴이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혁원에게 씨익 죽음의 미소를 보낸 김지훈이 차트를 들었다.

“한 시간 내에 환자 파악해 와.”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김지훈을 본 서도진이 입가를 말며 아무 말 없이 병동으로 올라갔다.

왠지 모를 서늘한 느낌에 부르르 어깨를 떤 이혁원이 멍청히 서 있다 한 소리 먹었다.

“뭐 해? 흉부외과는 인턴이 전공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 몰라? 확실하게 파악해 와. 한 시간이라고 했다. 늦지 마라.”

흠칫 놀란 이혁원이 부리나케 차트를 보다 말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한참 오더를 내고 있던 서도진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중환자실 환자를 어떻게 파악해야 합니까?”

“차트에 다 쓰여 있다. 김지훈 선생님이 니들한테 괜히 환자 기록을 철저히 하라고 한 줄 알아? 누가 봐도 의사라면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거야. 박순용 선생님이 기록한 거니까 눈에 딱 들어올 거야. 가 봐.”

“선생님, 그러면 중요한 포인트라도.”

“혁원아,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야. 그리고 환자한테 연습은 없다. 책임도 니가 지어야 하는 거 알지? 김지훈 선생님 화나면 무서운 정도가 아니니까 잘해 봐.”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진 이혁원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달렸다. 눈이 반쯤 감긴 박순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선생님, 인턴인데 좀 가르쳐 주시지 왜 그러세요.”

“저도 가르쳐 주고 싶죠. 근데 김지훈 선생님이 혼자 하게 하라고 신호를 주시더라구요.”

“혼자서요?”

“예. 스스로 해야죠. 그게 지훈이 형 스타일이잖아요. 빨간 줄 쫙쫙 긋고 다시 작성. 환자 잘못 보면 죽일 것 같은 눈빛. 내가 작년에 백 일 내내 시달렸잖아요. 그리고 최명철 환자 킵 시키신대요. 혁원이 저 자식 제대로 걸린 것 같죠? 눈물 좀 빼고 나면 나처럼 확실하게 알게 될 거예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오더나 내죠.”

박순용이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짐작대로 서도진의 빨간 볼펜이 훨훨 날아다니는 이유는 김지훈이었다. 잠이 부족해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이가 갈렸지만 막상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덕에 지금은 빨간 펜 보는 일이 훨씬 적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지훈은 결코 아랫년차에게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고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확실하게 배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지훈이 최선호와 함께 즐거운 표정으로 최명철을 보고 있었다. 특별 면회를 하는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최선호가 나가는 순간, 다소 안심을 했던 이혁원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환자 설명을 해 보라는 말에 이혁원이 처음부터 버벅거린 것이다.

“이혁원, 환자 보는 게 그렇게 자신 있어? 머릿속에 다 담기 힘들면 적어야 할 거 아냐? 중환자실 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삼십 분 더 준다.”

30분 후, 이혁원이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들고 환자 설명을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스톱(Stop). 적은 거 줘 봐.”

빨간 볼펜이 허공을 갈랐다. 단 한 줄도 빠짐없이 쭉쭉 그어 내려가던 김지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너 한 시간 반 동안 환자 한 명도 파악을 못해? 그것밖에 안 돼? 내가 보기에는 절대 아니야. 정성이 없는 거야. 집중을 안 한 거지. 나 잠깐 병동 올라갔다 올 테니까 다시 파악해. 그때도 이런 식이면 중환자실 킵 못 시킨다.”

이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킵을 못 시킨다는 말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뒤집어 생각하면 환자를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건 능력을 떠나 의사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이를 악문 이혁원이 눈에 불을 켜고 환자와 차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멘탈이 강하네. 그래야지. 타도 덤비고, 또 덤벼야 실력이 쑥쑥 는다. 바이탈을 다루는 의사의 정성과 집중력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걸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잠시 후, 빨간 볼펜이 또 날아다녔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김지훈에게는 여기저기 허술한 면이 보였다. 그게 치프와 인턴의 차이일 것이다.

“그나마 킵은 시킬 수 있겠네.”

그날 밤 이혁원이 난생처음으로 중환자실에서 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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