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아주 특별한 오프? (3)
아침 9시 정각, 고경아가 정확한 시간에 차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맥주와 휴가 마지막 날 갔던 양수리의 그 모텔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양수리 어떠세요?”
“양수리요? 백화점으로 가 주세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화점? 뭐 살 거 있어요?”
고경아가 살짝 눈을 흘겼다.
“나 옷 사려고요. 전화도 제대로 안 했는데 사 줄 거죠?”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를 주물렀다. 꿈과 희망이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졌다. 더구나 준비도 안 됐다. 비상시를 대비해 데이트 때마다 지갑을 두툼하게 채웠지만, 여자 옷이 상당히 비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현재 지갑의 두께로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에이! 카드라도 만들어 둘걸.’
그래도 일단 남자 체면이 있다. 고경아가 옷을 사 달라는 것도 처음이었다. 반지를 끼운 이상 이것은 남자의 신성한 의무였다. 국방의 의무를 어기면 감방이지만 이런 의무를 어기면 죽음이다. 일단 가 보고 볼 일이었다.
“당연하죠. 갑시다.”
백화점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경아가 힐끗 숙녀복 매장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경아 씨, 옷 산다면서요?”
“지훈 씨, 아빠가 지훈 씨 빨리 보자고 하세요. 일단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입고 갈 거예요? 양복 없죠?”
“양복이 있긴 있는데, 산 지 꽤 오래됐죠. 근데 정말 내 옷 사러 온 거예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남자한테도 옷은 얼굴이에요. 앞으로는 어디를 가든 깔끔하고 깨끗하게 입고 다녀야 돼요. 가운하고 와이셔츠도 자주 빨고요. 알았죠?”
새침을 떠는 고경아의 모습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 나게 고마웠다. 자신의 옷을 챙겨 준 사람은 어릴 적 어머니 말고는 없었다.
‘어머니, 제가 여자 하난 잘 만났죠? 이럴 때는 정말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아 씨를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아련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김지훈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고경아가 신중하게 한 벌의 옷을 고른 후 입어 보라고 했다.
요리조리 뜯어보며 옷이 어울리는지 세심하게 살피는 고경아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정말 행복했고, 옷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고경아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 씨, 아닌 것 같아요. 이 옷으로 입어 보세요.”
옷을 갈아입고 고경아 앞에 섰다.
“이것도 안 어울리네. 색깔이 좀 우중충하지 않아요? 저기 저거 한번 입어 보세요.”
계속 갈아입었다. 그때마다 고경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 매장으로 갔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몇 번이나 옷을 입어 봤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경아 씨,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그냥 사죠.”
“아빠 보러 갈 때 입을 옷인데 대충 사자고요? 그러다 퇴짜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핀잔만 들었다. 첫인사 때의 인상이 평생을 좌우할지도 모르는데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입 꾹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네 번째 매장에 들어서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옷을 갈아입고 벗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냥 아무거나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고경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아직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옷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방에 널린 매장을 다 들를 기세였다.
김지훈이 그 자리에 주저앉기 직전까지 몰렸다.
‘후아! 중환자실 킵보다 더 힘드네. 어이구! 다리야.’
작전이 필요한 때였다. 확고한 목표도 생겼다. 피곤한 와중에도 김지훈은 고도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한 벌의 옷을 바라보는 고경아의 눈빛이 전과는 달랐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와락 움켜잡았다.
“야! 이거 정말 마음에 드네. 색깔이나 스타일이 나랑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일단 입어 볼게요. 경아 씨, 잠깐만 기다려요.”
김지훈이 처음으로 자진해 옷을 입어 보았다. 고경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태를 살폈다. 분명 눈빛이 달랐는데 고민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김지훈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요. 아주 나한테는 딱 어울리네.”
“정말 편해요? 어깨가 좀 끼는 것 같은데요?”
“절대 안 낍니다. 딱 좋네. 아주 맞춘 것 같네. 그리고 그 정도는 살짝 수선하면 되는 거 아닌가?”
고경아는 쉽사리 오케이 사인을 내지 않았다. 김지훈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옷이 마음에 든다고 강조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점원까지 가세했다.
그래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수선할 부분까지 모두 말한 후에야 김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계산만 남았다. 지갑을 꺼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던 김지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옷이 이렇게 비싸? 경아 씨, 너무 비싼데.”
“남자 양복이 이 정도는 하죠.”
곤란했다. 돈이 한참 모자랐다. 그런데 고경아가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카드 한 장을 척 내밀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아 씨, 잠깐만. 지금 내가 돈이 부족하니까 다음 오프 때 사죠. 미리 얘기를 했으면 준비를 했죠.”
“일단 지금 사고 다음에 돈으로 줘요. 아저씨, 다음 주에 찾으러 올 거니까 잘 고쳐 주세요. 지훈 씨, 가요.”
끝이 아니었다. 구두와 넥타이에 와이셔츠까지 사야 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게 그건데, 여자의 눈은 다른 모양인지 고경아는 고개만 저었다.
결국 2시간이 넘게 돌아다닌 끝에야 필요한 것을 다 살 수 있었다. 여기에 카드 긁는 소리까지 김지훈에겐 너무도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모두 얼만지 단단히 머릿속에 새겼다. 사랑하는 사이라도 아직은 돈 문제를 대충 넘어갈 시기는 아니었다.
김지훈이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경아 씨, 배고픈데 일단 밥부터 먹죠.”
“안 돼요. 나도 옷 하나 사야죠.”
‘헉! 경아 씨 옷까지? 어우! 사는 건 좋지만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까? 자기 옷은 좀 빨리 사려나?’
심각한 걱정이 들 정도로 불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의를 제기하면 죽음이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김지훈이 고픈 배를 부여잡고 말없이 뒤를 따랐다.
숙녀복 매장은 또 왜 이렇게 넓은 걸까? 듣도 보도 못한 메이커는 또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고경아가 옷을 입어 볼 때마다 탄성을 터트리며 예쁘다고 했지만, 모두 다 허사였다. 앉았다가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하며, 고경아의 마음에 드는 옷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어후! 차라리 밤새 수술을 하는 게 더 편하겠다.’
이젠 다리까지 저리고, 배도 너무 고파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런데 고경아는 아직도 생생했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체력이었다. 여자는 다 그런 건지, 아니면 고경아가 그런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다. 드디어 고경아의 마음에 드는 옷이 나타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당장이라도 꼭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내심 환호성을 지르던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맨 처음에 입어 본 옷이 분명했다. 그걸 사기 위해서 2시간이 넘도록 매장을 뱅뱅 돈 것이다. 5분도 안 걸릴 일을 두고 말이다.
하지만 웃어야 한다. 그건 본능적인 감이었다.
“야! 정말 예쁘네. 마음에 들어요?”
“음! 그래도 이게 제일 낫네요. 얼마죠?”
가격을 물어보던 고경아가 빤히 김지훈을 보았다. 약간은 겁먹은 얼굴로 지갑을 열던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5만 원이나 남았다.
고경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혹시 몰라서 기름값은 남겼어요. 고맙죠?”
그랬다. 고경아는 지갑에 든 돈 이내에서 옷을 골랐던 것이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5시간이 넘도록 백화점을 헤맨 것만 아니었으면 200점을 주고도 남았다.
배 속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후! 배고파. 경아 씨, 밥 먹으러 갑시다. 여기 식당에 맛있는 거 있나?”
“여긴 비싸요. 우리 나가서 먹어요.”
뭔가 묘했다. 옷을 산다고 분에 넘치는 돈을 지불했는데 밥값은 비싸단다. 물론 처음 인사를 하러 가는 자리에서 입을 옷이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옷보다 밥이 더 중요한 김지훈으로서는 살짝 머릿속이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호구조사를 다시 했다.
“근데 아버님이 뭐 하시는지 왜 자세히 얘기를 안 해 주는 거예요? 전문직에 종사하신다고 하셨죠?”
“아빠가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젠 말해도 될 것 같네요. 우리 아빠 의사세요.”
깜짝 놀란 김지훈이 국수 가락을 쏟으며 캑캑거렸다.
“의사요? 정말이에요? 무슨 과 하셨어요?”
“일반 외과요.”
헉! 으아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다. 고경아의 아버님 연배라면 최소 오십은 넘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나이대라면 일반 외과 전문의가 흔한 시기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지훈의 눈가가 떨리며 입술까지 마르기 시작했다.
“와! 그걸 왜 이제 얘기해요. 이거 더 긴장되네. 혹시 좀 깐깐하시거나 엄하지는 않으세요?”
“되게 무서워요.”
꾹꾹 억눌렀던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위는 백 년 손님이라지만 사위 될 사람에게도 무척 어려운 사람이 장인 장모 될 분들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문득 스승의 얼굴이 스치며 소름까지 돋았다.
“어후!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잠깐만요. 다시 확인 좀 합시다. 아버님은 일반 외과 의사시고, 처형 될 분이 고경순. 맞죠? 경희야 잘 알고, 막내 동생이 경철이라고 했죠? 올해 대학 가지 않았나?”
“네. 이번에 대학 갔어요. 지훈 씨 후배예요.”
“내 후배? 그럼 우리 학교 예과 일 학년?”
고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장인 될 양반이 일반 외과 의사라는 사실이 싹 사라졌다. 김지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동생들은 무조건 통과다. 더구나 예과 1학년이라면 감히 고개도 못 들 후배다.
“흐흐흐! 그래요? 자식, 누군지 되게 궁금하네. 경아 씨 동생이니까 잘생기긴 했겠네.”
“그럼요. 키도 크고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그런데 웃음소리가 왜 그래요? 설마?”
“설마는 무슨. 내가 얼마나 예뻐하겠어요. 아이고! 장인어른은 일반 외과 선배시고, 처남은 학교 후배네. 정말 다행이다. 야! 우리 정말 천생연분 같지 않아요?”
고경아가 코웃음을 치면서도 웃고 있었다. 다행히도 다행이라는 말을 지나쳤다. 장인 될 분에게 타면 처남 될 놈을 태우면 된다. 최소한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었다. 백화점에서 너무 시간을 끈 탓이었다. 게다가 고경아의 아버지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즐겁기만 한 시간이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말을 끊었다. 최명철을 깜빡 잊고 있었다. 고경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시간을 내 병원에 전화를 했다.
(별문제 없긴 한데, 환자가 점점 더 심하게 파이팅을 합니다. 튜브를 빼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최필근인가, 그 사람을 본 건 아니고?”
(면회 제한이잖아요. 잘 때는 괜찮은데 눈만 뜨면 갑자기 그러네요. 아무래도 튜브가 너무 고통스러운 것 같습니다.)
서도진의 말에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다발성 늑골 골절이 있어 심한 파이팅은 도리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심장에도 무리가 올 것이다.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3주 후의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고경아가 오늘은 왠지 활짝 웃기만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손에 가방을 든 김지훈도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아쉬운 데이트가 끝났다. 오늘은 아예 달콤한 입술 근처에도 못 갔는데, 늑대 울음소리는 왜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이유를 알았다.
장인이 될 분이 아니어도 감히 얼굴조차 마주하기 어려운 일반 외과 대선배다. 전공의 3년차 따위는 옆에 앉지도 못한다.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만에 하나 스승이나 다른 교수들과 친분이라도 있다면 고양이 앞의 쥐일 것이다. 아니, 고경아의 아버님은 늑대 정도는 우습게 볼 호랑이였다.
아오오오! 깨갱!
오늘따라 늑대 울음소리가 애달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