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아주 특별한 오프? (2)
거의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원하던 바다. 그러나 일반 외과 치프로서 좋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
김지훈이 마치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던질 것은 던져야 할 때였다.
“너 곧 흉부외과 돌잖아. 변상훈 과장님하고 그때 확실하게 태워 줄게. 그러면 저절로 하게 된다. 물론 외과의 정수는 우리 과에서 배워야 제대로 알게 되지만 말이야.”
김지훈의 말에 머리를 벅벅 긁던 이혁원의 눈길이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넌지시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인턴 때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 어느 과를 하든 1년차 생활이 훨씬 편해질 것이다.
배우려고 하는 후배다. 더구나 간과 비장 손상에 대해 중점적으로 물어보았다. 김지훈이 내심 기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렇구나. 근데 선생님, 언제 출발하실 거예요?”
“여섯 시.”
“어? 그때까지 계실 거예요?”
“급하면 먼저 가. 난 환자 좀 보고 가야겠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지만 환자 진짜 열심히 보시네. 에이!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한 거나 물어보고 편하게 가자.’
잠시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던 이혁원이 아예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이번에는 다음 텀에 돌 흉부외과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다음이 성형이 아니라 흉부였어? 하긴 어느 과를 돌든 결과는 똑같지, 뭐. 그런데 이 자식이 아예 날로 먹으려고 하네. 이런 건 태우면서 가르쳐야 하는데. 에이! 역시 똑똑한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아는 한 충실히 대답을 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울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환자를 보며 틈틈이 이혁원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6시가 됐다.
서도진이 정확한 시간에 내려왔다. 환자 인수인계를 한 후 최선호와 만나 잠시 얘기를 했다. 일요일 오후에 온다는 소리에 최선호가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선호야, 아버지 지금 잘 회복되고 계셔. 너도 서도진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봤잖아.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바로 내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힘들더라도 아버지 일은 삼촌하고 상의해라.”
고개를 끄덕이는 최선호의 등을 두드린 김지훈이 슬쩍 보호자 대기실을 살폈다. 면회 제한 때문인지 최필근이 보이지 않았다.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다니, 어쨌든 씁쓸한 일이었다.
최선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오프를 안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고경아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다 고려해야 하는 치프에게는 오프 가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7시가 다 됐다.
“어후! 피곤하다. 빨리 가자.”
말동무가 있어 서울 가는 길이 피곤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겸사겸사 졸음도 쫓고, 은근슬쩍 스승과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기회기도 했다.
김지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불과 30분도 안 돼 눈꺼풀이 심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꼬집고, 물도 마셔 봤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휴! 가뜩이나 늦게 출발했는데 지금 잠을 자면 언제 도착하지? 그것도 문제지만 이러다가 사고 나겠다. 가만? 혁원이가 운전을 할 줄 알지도 모르잖아.’
김지훈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혁원아, 너 혹시 운전할 줄 알아?”
“예. 할 줄 압니다. 어머니 때문에 자주 했어요.”
“그래? 잘됐다. 너 운전 좀 해라. 딱 두 시간만 자자.”
“제가요? 그건 문제가 아닌데, 그럼 어디로 가요?”
“서울 병원으로 가. 넌 집에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 형이 택시비 줄게.”
이혁원이 형이라는 말에 활짝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에이! 물어볼 게 정말 많은데 너무 졸려 하시네. 그럼 지훈이 형, 출발하겠습니다.’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김지훈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지금쯤이면 빨라야 천안 근방에 도착했어야 했다.
“어? 여기가 어디야?”
“예.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 있으면 한남대교예요. 전용 차선이 딱 시간 맞춰 풀려서 빨리 왔습니다.”
채 3시간도 되지 않았다. 지금도 얼마나 밟아 대는지 엔진이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차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휙휙 앞 차를 앞지를 때마다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순간 홍재순의 얼굴이 스쳤다. 레이서 한 놈 추가다.
“이혁원, 천천히 가. 인마.”
“이 정도면 준수하죠. 차만 잘 나갔으면 이십 분은 더 당기는 건데 아깝네요.”
“미친놈!”
눈을 뜬 지 10분 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병원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이제 10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제법 담이 크다고 자부했던 김지훈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잡으며 말했다.
“이혁원, 너 또 한 번 이렇게 운전하면 내 손에 죽는다.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네. 그나저나 응급실에 잠깐 들를 건데 같이 갈래?”
“응급실이요? 어후! 싫습니다. 한 달 동안 응급실 근무를 했는데 거길 또 가요? 전 집에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후다닥 차에서 내리던 이혁원이 휙 돌아서며 말했다.
“선생님, 내일 몇 시에 내려가실 거예요? 괜찮으시면 제가 편히 모시겠습니다.”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인턴이 감히 치프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다니, 이혁원의 숫기가 이토록 좋은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면 얼굴에 철판을 깔았을 것이다.
여하튼 좋은 일이었다.
‘응급실 하면 스승님이 먼저 떠오를 텐데, 그런 기색을 하나도 안 보였단 말이지. 좋았어. 스승님과의 관계가 좋아진 게 틀림없어. 그래. 내일도 같이 내려가자. 나는 친하면 친할수록 더 부담 없이 태운다는 걸 넌 모르는구나. 차도 태워 주고, 너도 활활 태워 주마.’
“전화번호 줘. 오후에 연락할게.”
“예. 감사합니다.”
오래간만에 집에 와서 좋은지 이혁원이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순순히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사이기도 했다.
‘스승님 댁 전화번호 확보 완료. 이제 확인만 남은 건가?’
김지훈도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응급실로 향했다.
아수라장이다. 교통사고 환자에, 술 취한 사람에, 대학 병원 응급실에 올 필요가 없는 경증 환자들까지 몰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인턴들이 바로 오더를 못 내는 까닭에 더욱 환자가 밀린 것이다. 교육의 일환이고, 지금은 미숙하기만 한 시기여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답답한 일이기도 했다.
고개를 저으며 당직실 문을 살며시 두드리던 김지훈이 갸우뚱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날짜상 분명히 당직 날이었다. 그렇다면 있을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수술 방으로 올라가기 전,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가 이준영 과장의 연락처를 물었다. 간호사가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도 최대한 친절하게 알려 줬다. 역시 사회생활에는 안면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전화번호를 받아 든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의 전화번호.
심증만으로도 100퍼센트였지만 이것으로 물증까지 확보했다.
‘이번 주는 왠지 마무리가 정말 깔끔하네. 환자도 깨어나고, 스승님과 혁원이가 한집에 산다는 것까지 확실하게 알아낼 줄 누가 알았겠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이준영 과장이 수술을 하고 있었다. 인사는 하고 갈 생각에 덧 가운을 입고 조심스럽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반가움도 잠시, 들어서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스승은 정말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손일석, 너 3년차야. 이따위로 퍼스트 설래? 벌써 삼 주나 지났어. 변하는 게 있어야지. 이렇게 할 거면 2년차 다시 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살벌하게 타고 있었다. 아니다. 실수가 아니라 더 잘하라고 태우는 것이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데도 몸이 딱 굳었다.
수술이 막 끝났는지 이준영 과장이 장갑을 벗으며 돌아섰다. 김지훈의 허리가 절반으로 뚝 꺾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김지훈, 너 웬일이야? 오프야?”
“예, 선생님. 주말 오픕니다.”
“근데 수술실에는 왜 들어왔어?”
뻔히 알면서 입장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김지훈이 우물쭈물하자 이준영 과장이 눈길만 한 번 던지고는 나갔다.
‘녀석, 열심히 한 티가 팍팍 나네. 혁원이하고는 어떻게 지냈을까? 지훈아, 그놈이 우리 과를 하고 싶은 눈치는 보이던데, 나 때문에 망설이는 것 같더라. 내 대신 잘 가르쳐라.’
“오프 때는 병원 기웃거리지 말고 푹 쉬어. 그것도 의사가 지켜야 할 일이야. 치프란 놈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스승의 입에서 치프라는 말이 나왔다.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 오늘은 아주 입이 찢어질 일투성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김지훈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숨 막히는 긴장에 휩싸였던 수술실에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손일석이 배를 닫으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모자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바짝 긴장했던 1년차도 이제야 인사를 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온 손일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넌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아이고! 죽겠다. 이러다 정말 제명에 못 살 것 같다. 낮에는 신기동 선생님한테 타고, 밤에는 이준영 과장님한테 타고, 아주 온 동네가 불바다야.”
“3년찬데 아직도 그러셔?”
“방금 전에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아니, 사람이 순간 삐끗할 수도 있지 말이야. 그렇다고 실수라고 말하기도 힘든 걸 가지고 이렇게 태우시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래. 힘들겠다. 현수하고 경석이 형은 잘 지내?”
“말도 마. 현수하고 경석이 형도 당직 때는 거의 죽으려고 해. 어떻게 갈수록 더 탈 수가 있지?”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스승이 태운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나 더 가르치고자 한다는 말이었다. 은근히 불안해졌다.
그렇게 타고도 더 타지 못해 안타까워하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일석아, 얼굴 펴. 누가 보면 초상났는지 알겠다.”
“웃을 일이 있어야 얼굴을 펴지, 인마. 그나마 경석이 형은 대장 파트 돈다고 신이라도 내지. 게다가 현수 그 자식까지 날 배신했어.”
“배신? 현수하고 무슨 일 있었어?”
“그놈도 연애하는 것 같더라. 그저께 당직이었는데 얼마나 탔는지 오늘 아침까지 얼굴이 굳었던 놈이 오프 받자마자 신 나서 나갔어. 딱 감이 오지? 분명히 여자야.”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윤서연 생각이 난 것이다.
“누군지 몰라?”
“내 휘하의 하오문 문도들도 병원 밖까지는 아직 능력이 못 미친다. 하지만 내 안테나에 걸렸으니까 곧 알아낼 거야. 자식이 뛰어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뭐. 어디 가겠어? 지훈아, 근데 요새 병원 분위기가 뭔가 묘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손일석이 힐끗 1년차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금경태 과장님의 눈빛이 이상해졌어. 우리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다른 교수님들하고도 상당히 친한 것처럼 항상 웃는데… 뭐랄까. 뭔가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그건 좋은 일 아냐? 인마.”
김지훈의 말에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이혁민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께도 그런다니까. 물론 이준영 과장님하고는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살벌했었잖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감을 못 잡겠네. 분명 뭔가 있어.”
그냥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손일석만큼 눈치가 빠른 놈도 없었고, 별일도 없이 사이가 다시 좋아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생각해 보면 바람 잘 날이 없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손일석도 전공의다. 별일 아닌 것을 두고 혼자 심각해할 수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변화가 마냥 좋은 일만도 아니었다.
‘어휴! 변덕이야, 뭐야? 병원에 남을 수 있어도 문제네. 금 과장 밑에서 어떻게 일을 하지? 스승님께서 간담도 파트를 맡을 일은 없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차에서 잔 잠으로는 풀릴 피로가 아니었다.
손일석이 힐끗 눈길을 주다 말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넌 치프를 하면서도 꼴이 그게 뭐냐? 하여튼 일 몰고 다니는 놈들이 있어요. 아니지. 넌 일을 만들지. 앞으로도 쭉 이렇게 따로 살자. 아! 원래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밑에 있으면 힘들기 마련인데, 박순용 선생님 때문이야?”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너 육 개월 연속 서울이지? 다음 텀에 나랑 박순용 선생님하고 올라온다. 그때 보자.”
“역시 박순용 선생님이 만만치는 않구나. 그럼 그렇지. 내 복에 무슨. 제길! 다음 주에 입국식이니까 보면 알겠지. 넌 올라올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올라와?”
참담한 표정을 지은 손일석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슬슬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재빨리 숙소로 사라졌다.
‘어휴! 어떻게 입국식을 할 때가 됐다는 걸 잊을 수 있지?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그럼 도진이 오프는 다음 주로 미뤄야겠네.’
이경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 근무지가 항상 엇갈리고,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경석이 형 얼굴 보기 참 힘드네. 병동에 무슨 일이 있나?’
오프 날 구미도 아닌 서울 병원 병동을 헤매면 100퍼센트 미친놈이다. 김지훈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날 새벽, 수술을 들어갔다 나온 손일석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쓰러졌다. 하얀 재가루가 펄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