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83화 (383/1,329)

제4화 의사가 된 이유 Ⅰ (1)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깨끗한 가운을 입고 있는 젊은 의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교통사고 환자를 진찰했는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지금도 환자에게는 단순히 미안한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 거울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뭔가가 보였다. 무언가 낯설고 이질적이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자만과 나태함이었다.

누구보다도 절박한 사람이 환자다. 의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 역시 환자와 보호자다.

그런 환자와 보호자가 자신을 불신했다. 말쑥한 겉모습이 아니라 자만에 찬 속을 본 것이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나태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진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꽤 여러 날 전부터 여유라는 이름으로 나태함을 외면했다.

많은 후배들에게 오더를 내리고 가르친다는 즐거움은 자만의 다른 얼굴이었다.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환자에게 30분은 3시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보호자의 불신과 불만이 아니었다면 오늘 역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이대로 지나쳤을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이름과 얼굴을 가진 스승들이었다.

스스로 변명하며 피할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김지훈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환자분이 얼마나 힘든지를 잊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구로 가실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삿대질을 하려던 보호자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이 묵묵히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챙겼다.

곧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환자가 대구로 향했다.

간호사가 투덜거렸다.

“새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이런 일이 터지네요. 샘처럼 일하는 사람이 흔한 줄 아네요. 대구 가면 고생만 더 하지, 뭐.”

누구도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배들 역시 고개를 흔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 미안하고 창피했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다소 차가운 3월 밤바람에도 화끈거리는 얼굴이 식질 않았다.

단지 30분 늦게 환자를 본 탓에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 말로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신뢰였다. 그렇게 무너진 신뢰는 어떤 방법으로도 되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날이었다.

갑자기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자만과 나태를 극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보다 더 무겁고 무서운 것이 의무와 책임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했다.

김지훈이 자신을 호되게 나무랐다.

착잡한 마음으로 응급실에 들어간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박순용을 비롯해 인턴들까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서도진도 2년차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체력이 강한 사람도 있겠지만 약한 사람도 있다.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유난히 체력이 좋은 김지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면 구미 근무 역시 상당히 힘에 부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1년 전 서도진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만큼만 해라.

이것처럼 무섭고 부담스러운 말도 없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혁원을 불렀다.

“혁원아, 너희들 오프는 확실하게 가고 있는 거야?”

“오프요? 그게… 가고는 있는데…….”

말을 얼버무렸다. 너무 밀어붙인 탓에 오프도 규정대로 가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의 눈치를 보았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의사도 사람인 이상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우리 모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해. 나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앞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오프들 확실하게 가. 흉부외과하고 성형외과 인턴들한테도 그렇게 전해. 단, 일할 때는 최선을 다해야 돼. 일과 휴식이 뒤섞이는 꼴은 못 본다.”

김지훈이 후배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날 밤, 김지훈이 밤새 뒤척였다.

어느새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송동화 과장의 말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다음 주부터 오프를 간다고? 지훈이하고 도진이 둘 다 고생했다. 백 일 당직 기간이라고 윗년차들이 오프 안 간 경우는 니들이 처음일 거야. 지훈아,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말에 도진이 손 좀 볼까?”

응급실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을 한 서도진에게 수술을 준다는 소리가 왠지 위안이 됐다.

서도진이 입이 찢어진 채 일과를 마무리했다.

이제 아뻬만 오면 된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간만에 따스한 봄 햇살을 즐겼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 한 잔씩 들고는 잠시 시시덕거렸다.

아직도 가슴이 답답했지만 일상에까지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치프가 얼굴을 구기면 의국 분위기까지 나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응급실 앞에 섰다. 덜컥 뒷문이 열리며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환자 한 명을 내렸다. 입가를 따라 흐르는 피와 힘없이 늘어진 팔이 보였다.

한눈에도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였다.

김지훈과 서도진이 응급실로 튀어 들어갔다. 멍한 표정으로 거의 눈이 감겼던 박순용이 깜짝 놀라며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들이 환자를 처치실로 옮기고 있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 3명이 우르르 처치실로 들어갔다.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던 이혁원이 콜을 받자마자 당직실에서 뛰쳐나왔다.

반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심장박동은 40회 정도에 불과했고, 호흡까지 불안정했다.

위이이잉! 삐이이이이!

혈압이 잡히질 않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박순용 선생님, 인투베이션 하세요. 도진아, 중심 정맥 바로 잡자. 혁원이 너는 비지에이하고 소변 줄 끼워.”

김지훈이 침착하게 오더를 냈다.

박순용이 인투베이션을 하는 사이, 이혁원이 비지에이를 하고 소변 줄을 끼웠다. 이어, 서도진이 중심 정맥을 잡았다.

모두들 침착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약간은 불안한 눈빛을 보이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심 정맥을 통해 혈액이 빠진 환자의 혈관으로 수액이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순식간에 1리터 가까이 들어갔지만 소변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고, 모니터는 경고음을 멈추지 않았다.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박순용 선생님, 이 환자 사고 어떻게 났는지 알아보고, 피 준비하고 포터블 부르라고 하세요. 혁원아, 방사선과에 가서 CT 찍는다고 빨리 준비해 달라고 해.”

김지훈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소변이 나오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도진아, 소변 안 나온다. 바이탈은?”

“60에서 간신히 잡힙니다.”

“뭐 같아?”

“배가 불러 오는 것으로 보아 헤모뻬리(혈복강) 같습니다. 그리고 좌측에 다발성 늑골 골절이 있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혈압이 안 잡히는 상태에서 늑골절이 동반됐다면 혈흉까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시 흉부 도관이 준비됐다. 동시에 혈액과 포터블이 도착했다.

흉부 사진을 촬영했다.

김지훈이 서도진에게 잠시 환자를 맡기고 방사선과로 달려갔다. 우측과는 달리 좌측 폐 부위가 허옇게 보였다. 흉강 내에 액체가 가득 찼다는 의미였다. 100퍼센트 혈흉이었다.

급히 응급실로 돌아온 김지훈이 처치실로 들어가다 말고 힐끗 고개를 돌렸다.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중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설마 아들인가?’

보호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혈압을 올리지 못하면 CT조차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늑골 골절과 혈흉은 환자의 호흡까지 방해할 것이다.

“도진아, 흉부 도관부터 박자. 어시스트 서. 나 없을 때는 니가 해야 되니까 잘 봐. 박순용 선생님, 이혁원, 피 더 시키고 계속 짜.”

흉부 도관을 박았다. 도관을 통해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다행히 고였던 피가 배출되고 나자 더 이상의 심각한 출혈은 없었다. 일단 호흡과 흉부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남은 문제는 혈압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복부 CT를 찍어야 했다. 어디에 손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배를 열 수는 없는 일이었다.

4명이 모두 달라붙어 피를 짰다. 심지어 수액까지 짜 최대한 빠르게 혈관을 채웠다. 비지에이 검사 결과에 따라 필요한 처치를 병행했다.

마침내 경고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시적인 일일 뿐이었다. CT를 찍고 수술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CT부터 찍자. 도진아, 송동화 선생님하고 변상훈 과장님께 노티해. 일단 혈복강하고 혈흉이 발생했고, 바이탈 확보되는 대로 수술해야 한다고 말씀드려.”

우르르 침대에 달라붙어 방사선실로 향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보호자들이 달려왔다.

“선생님, 환자 괜찮습니까? 어디를 다친 겁니까?”

“아직 모릅니다. CT 찍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은 탓인지 김지훈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다급해 보였다. 복부 CT를 찍기 시작했다. 박순용과 이혁원이 차폐복을 입고 옆에 붙어 피를 짰다. 환자는 그 짧은 시간도 버티기 어려웠다.

환자의 흉강 하부와 복부 단면이 모니터 화면에 차례차례 나타났다. 흉부 도관을 박은 덕인지 흉강 내의 피는 소량만이 관찰됐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김지훈이 이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장 파열과 간 손상이 동반됐다. 배 속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도 감당할 수 없는 출혈이 지속되고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급히 보호자를 만났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보호자분, 복부 CT에서 간과 비장의 손상이 관찰됩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이요? 여기서 말입니까?”

보호자가 다급해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과장님이 나오시면 바로 할 겁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은 혈압이 잡히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수술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수술에 동의할 줄 알았다.

“대구로 갈 수는 없겠습니까?”

의사가 아닌 사람이 봐도 환자 상태는 심각하기만 할 텐데 다소 의외의 물음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잘못하면 가는 도중에 사망하실 수 있습니다. 운 좋게 도착한다고 해도 수술 준비를 다시 해야 하는데, 그땐 너무 늦습니다.”

보호자가 망설이고 있었다. 혼자서는 결정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호자분, 최대한 빨리 결정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어차피 송동화 과장이 나와야 한다. 그 정도 시간은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들이 상의를 하는 동안 김지훈이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혈압이 상당히 불안정했지만 지금은 수혈과 수액 공급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멍한 표정만 짓고 있는 고등학생을 사이에 두고 보호자들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대구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봐라. 대구로 가다가는 도중에 죽는다고 안 했나.”

“나도 안다. 근데 이 병원을 믿을 수 있겠나. 상태가 저리 나쁜데 아무래도 큰 병원이 훨씬 낫지.”

“어허! 지금 병원 크기 따질 때야. 이러다 사람 죽는다.”

큰 소리만 오갈 뿐, 보호자들도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송동화 과장이 변상훈 과장과 함께 들어왔다. 김지훈에게 환자 상태를 듣고는 바로 복부 CT를 확인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잘못하면 수술 중에 사망할 케이스네. 보호자들은?”

김지훈이 보호자에게 안내를 했다.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갔다. 송동화 과장은 환자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다. 보호자들은 의사를 확신하지 못했고, 자칫 잘못된 결정으로 환자를 잃었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도 아까운 시간이 흘러만 갔다.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친보호자는 안 계십니까?”

“있기는 한데 고등학생입니다. 엄마는 없어요. 에이구! 저노무 자슥이 왜 자꾸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가슴이 서늘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환자의 아들이었다.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리운 이들로 인해 가슴이 사무칠 때가 있었다. 홀로 남겨진 자식의 아픔과 슬픔은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모른다. 지금 이 환자를 놓친다면 역시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할 것이다.

‘저 아이의 아버지가 살 수 있는 기회는 수술밖에 없다. 아무것도 못해 보고 아버지를 잃으면 평생 그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해. 제발 그런 일만은 피하자.’

김지훈이 보호자를 보았다. 환자와 자식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야 했다.

“보호자분, 지금 당장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저도 이렇게 부모님을 떠나보냈습니다.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아파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수술도 못해 본다면 자식의 가슴에도 평생 빼지 못할 못이 박힙니다. 보호자분, 환자분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김지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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