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82화 (382/1,329)

제3화 치프 역시 전공의다 (2)

응급실을 나온 김지훈이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이젠 웬만한 일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치프다.

그런데 두렵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떨린다.

‘전화 왜 안 했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한다 한다 하면서 잠깐 미룬다는 것이 벌써 3일이나 지났다. 그것도 천안에서 구미로 근무 이동까지 하면서 말이다. 핑계가 될 수도 있지만 도리어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소나기를 피하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

“경아 씨, 별일 없었죠? 근무지 이동 때라 그런가, 왜 이렇게 바쁜지 짬을 낼 수가 없네요. 어우! 힘들어. 수술을 몇 개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뭔가 가슴을 꽉꽉 누르는 것 같은 숨소리만 들린다.

등덜미에서 한파가 몰아친다.

“경아 씨, 그리고 전화를 아무 때나…….”

(지훈 씨, 나 이번 달부터 일반 외과 전담하게 됐어요. 어떻게 생활하는지 제 귀에 들릴 것 같지 않아요? 이번은 그냥 지나가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땐 반지 뺄 거예요. 아셨죠?)

헉! 전화 좀 늦게 했다고 반지까지 뺀단다. 순간 욱하고 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치밀어 오른 것은 공포였다.

소나기가 내리면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과를 전담한다고요? 원래 그렇게 근무하잖아요.”

(몇 달이 아니라 앞으로 쭈욱 외과만 담당한다고요. 지금은 주로 이혁민 선생님 수술을 담당하고, 야간 당직 서게 되면 이준영 선생님 수술은 무조건 제가 들어가요.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제가 뭐라고 말을 할까요? 얼렁뚱땅 말 돌린다고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요.)

서울 병원 수술 방 간호사들의 근무 체계가 바뀐 모양이었다. 고경아와 연관된 일인 데다, 보다 전문적인 수술 팀을 만든다는 의미에 귀가 번쩍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제가 핵심이 아니었다.

의도가 빤한 투정 반, 협박 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걱정할 일이 없지만 스승은 고경아를 더 예뻐한다. 작전상 후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야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스승님은 잘 지내시죠?”

(야간 당직이 아니라 자주는 못 뵈는데 항상 바쁘시죠. 요샌 손일석 선생님하고 신현수 선생님 혼내시느라 더 바쁘신 것 같아요.)

“엥? 그 자식들이 응급실 담당을 해요?”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당연히 놀랄 일이었다. 손일석과 신현수라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것이고, 그만큼 많이 배울 것이다. 최고의 라이벌들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살짝 긴장감까지 느껴졌지만 정말 잘된 일이기도 했다.

‘그 자식들이라면 스승님도 많이 편하시겠지.’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숙소로 가다 말고 피식 웃었다. 통화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렸는데,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를 일이었다.

‘잘못했다고 빌기를 잘했어.’

역시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다.

***

너무 행복에 겨우면 웃음도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침 회진을 돌고 정규 수술을 들어가면 무조건 퍼스트를 섰다. 마이너 수술은 응급 때는 물론 정규 수술 때도 심심치 않게 집도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여기에 의국 분위기까지 좋았다. 서도진이 박순용 곁에 바짝 붙어 집중적으로 일을 가르친 덕에 큰 소리를 낼 일이 없었다. 잠을 아껴 가며 연습을 하는지 박순용의 타이 실력도 점점 늘어 가고 있었다.

하나가 좋아지면 다른 하나도 좋아지는 법이다. 고민할 일이 거의 없었다.

김지훈은 물론 송동화 과장의 얼굴에서도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응급실에 환자가 몰려와도 웬만해선 힘들 이유가 없었다. 서도진과 박순용이 미리 환자를 보고 나면 최종적으로 결정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체 의국장이라는 무시무시한 자리가 주는 덕이 컸다.

“나 김지훈인데, 소아과 환자가 좀 많이 밀렸네. 병동에 급한 환자 없으면 일단 응급실 환자부터 봐줄래? 피곤할 텐데 미안하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해당 과 전공의에게 이런 식으로 전화 한 통만 걸면 끝이었다.

인턴들의 태도도 변하고 있었다. 태울 때는 살벌하게 태웠지만, 조금이라도 열성을 보이면 아예 붙잡고 가르쳤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는다는 것은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마침내 인턴들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한 주가 거의 다 지나면서 인턴들의 분위기까지 착착 잡혀 갔다.

이젠 다른 과 전공의들도 김지훈 앞에서는 태만히 할 수 없었다. 김지훈보다 나이가 많은 전공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가끔은 환자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구미 전공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박순용의 살벌한 눈길을 마주쳐야 했다.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똑바로 하자.”

“형님, 저도 이제 2년찹니다. 지훈이가 아무리 전체 의국장이라고 해도 후배잖아요. 게다가 과도 다르고요. 환자 조금 등한시했다고 뭐라고 하면 안 되죠.”

“김지훈 선생님처럼 깍듯한 사람도 없어. 환자만 제대로 보면 넌 선배 정도가 아니라 하늘로 대우할 사람이야. 나이 많은 거 티 내지 말고 일이나 확실히 해. 네 말대로 선후배 사인데 얼굴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서도진과 더불어 숨은 군기 반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즐겁지 않으면 정말 이상한 놈일 것이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고 새로운 주가 밝았다.

의아할 정도로 상당한 신뢰를 보인 송동화 과장이 이제는 아예 김지훈을 혼란 속에 빠트렸다. 궤양 천공을 비롯해 사고로 인한 복막염 환자들까지 집도를 하게 한 것이다.

‘후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나야 좋지만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잖아. 어쨌든 정말 좋은 기회야. 열심히 하자.’

집도 경험이 많아질수록 점점 손이 빨라졌다. 수술을 보는 눈까지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이제는 어떤 수술을 받아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와!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도진아, 너도 열심히 하면 이런 날이 올 거다. 박순용 선생님, 일주일 지난 거 아시죠?”

“예, 선생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환하게 웃으면서도 자꾸 기지개를 폈다.

일반 외과 일만 하면 정말 피곤을 모를 생활이었다. 응급실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박순용이 100일 당직 기간이라 환자가 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응급실로 내려가야 했다. 여기에 인턴 교육까지 하다 보니 도리어 서도진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면 이미 무리를 느꼈을 상황이긴 했다. 어쨌든 김지훈은 항상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정형외과 1년차는 아직도 툭하면 응급실에 늦게 내려왔다. 김지훈이 기회가 될 때마다 한마디 했다. 환자 문제도 있는 데다 최소한 몽둥이라도 피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연히 그때마다 매타작을 당하고 있었다.

“어휴! 너도 참 문제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계속 늦게 내려오면 어쩌자는 거냐. 그리고 넌 1년차잖아. 나이 많은 박순용 선생님도 이런 일은 없는데 긴장 좀 하자.”

이 문제를 빼고는 신경 쓰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리어 그게 문제였을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김지훈이 때 아닌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치프이자 전체 의국장이라는 자리가 주는 달콤함에 취하고 있었다.

경고를 알리는 빨간 불이 하루 종일 번쩍이고 있었지만, 너무도 미세하게 다가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사실 그 정도로는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또 한 주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난 후, 약간의 피로를 느낀 김지훈이 침대에 누워 잠깐 잠을 청했다. 마음의 여유 때문인지 깜빡거리던 눈이 이내 스르르 감겼다.

‘체력이 부족한가. 점점 몸이 늘어지네.’

얼마나 지났을까?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데 김지훈이 눈을 뜨지 못했다. 곧 휴게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다 끊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숙소 전화가 울렸다. 열 번도 넘게 울리고서야 눈을 뜬 김지훈이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숙소에 계셨어요? 어후! 여기저기 다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습니다. 박순용 선생님, 김지훈 선생님하고 연락 됐으니까 전화 끊으세요.)

응급실이다.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다. 아직도 졸음에 겨운 눈을 하고 있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환자 있어? 언제 왔는데?”

(예. 빤뻬리 환자 한 명 있습니다. 온 지는 한 시간도 넘었죠. 선생님을 찾은 지는 삼십 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럼 숙소에라도 와 봤어야지.”

(우리 과 환자는 아닌데, 봐줘야 할 환자가 있어서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하시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잠긴 목소리를 들은 서도진이 도리어 걱정을 했다.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고, 절대 농땡이를 부릴 김지훈이 아니었다. 불가피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 여겼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응. 갑자기 배가 아파서 말이야. 지금 바로 내려갈게.”

부랴부랴 가운을 입은 김지훈이 황급히 응급실로 향했다.

‘전화 소리도 못 듣다니, 내가 그렇게 피곤했나?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나저나 환자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이미 일반 검사는 물론 복부 CT까지 다 나온 상태였다.

급히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환자를 진찰했다. 교통사고로 인해 장 어딘가가 터진 것이 분명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김지훈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미안해서 환자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지경이었다. 전보다 더욱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것 이외에는 미안함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환자분, 많이 아프시죠. 현재 나온 검사 결과와 환자분 상태를 종합할 때 복막염이 강하게 의심됩니다. 바로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지훈의 말을 듣고 있던 보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지금 당장 수술을 하는 겁니까?”

목소리까지 삐딱했다.

“필요한 검사는 다 나왔으니까, 과장님만 나오시면 바로 수술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과장을 또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죠? 근데 이제 내려와 환자를 봅니까? 에이! 전에도 그러더니 또 이러네. 어떻게 이놈의 병원은 올 때마다 밑도 끝도 없이 환자를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일이 생겨서…….”

“의사가 환자를 놔두고 무슨 일이 있다는 거요? 긴말하고 싶지 않아요. 대구로 갈 테니까 준비나 해 줘요. 쯧! 전문의도 아닌 것들이 꼴에 의사라고 뻗대기는. 에이! 시간만 버렸네. 환자는 아파 죽겠다는데 이게 뭐야.”

말이 너무 심했다.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입을 열지 못했다. 제때 내려왔으면 당연히 나오지 않았을 말이었다.

사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구미 병원에 대한 불신 때문에 대구로 가는 환자들이 간간이 있었다. 지금 온 환자와 보호자는 예전의 안 좋은 경험으로 인해 생각보다 훨씬 구미 병원에 대한 불신이 큰 모양이었다.

김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변명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어차피 갈 사람들이었네.’

묵묵히 듣고 있던 서도진이 발끈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십니까? 늦은 건 미안한 일이지만 의사는 아프면 안 됩니까? 지금 선생님 얼굴 안 보이세요? 선생님, 즉시 보낼 준비 하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김지훈이 지금도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었다. 보호자도 물러설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가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과장까지 봐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사가 저 사람 한 명뿐이야? 그럼 당신이라도 먼저 과장에게 연락을 했어야지.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환자는 아파 죽겠다는데 뭐하는 거야?”

서도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고, 김지훈도 불가피하게 늦었다는 생각에 화를 참지 못했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을 확고하게 믿는 서도진을 본 김지훈이 급히 앞을 막아섰다.

“도진아, 그만해.”

발단은 환자를 늦게 본 것이다. 평소 그런 일이 생기면 가장 화를 낸 사람이 바로 김지훈 자신이었다. 더 이상 일을 키울 수는 없었다. 서도진과 박순용은 물론 인턴들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창피해 볼 낯이 없었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도진아, 가뜩이나 미안해 죽겠는데 이쯤에서 끝내자.’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고 당장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김지훈이 여전히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보호자에게 다가가다 말고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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