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치프 역시 전공의다 (1)
김지훈이 스테이션 앞에 섰다.
잘 정돈된 차트와 그 위에 놓인 깨끗한 환자 리스트.
드레싱을 마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도진과 박순용.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기하는 인턴.
치프가 맞이하는 일상적인 아침이다.
차트를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박순용이 지난밤에 있었던 특이 사항과 변동 사항을 보고했다.
마지막 차트까지 확인한 후 몸을 돌리자 부리나케 달려간 인턴이 병실 문 앞에 섰다.
첫 번째 병실로 들어섰다. 박순용이 환자 앞에 서고, 서도진은 바짝 옆에 붙었다. 환자에 대해 질문을 하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이전처럼 모든 것을 직접 챙기지 않아도 좋았다.
인턴과 1년차는 앞서고, 김지훈은 뒤를 따랐다. 문제가 발생한 환자는 더욱 꼼꼼하게 보았다. 2년차 때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여유이자 호사였다.
스태프 회진이 이어졌다. 송동화 과장과 회진을 돌며 환자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항상 전공의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던 송동화 과장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진지했다.
이것이 바로 치프의 아침 시작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은 없었다. 가슴이 뿌듯하다 못해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신세계가 열리고 있었지만 김지훈의 표정이 의외로 심각했다.
‘내가 푹 자는 동안에도 박순용 선생님과 도진이는 열심히 일을 했겠지. 방심하지 말자. 치프가 됐다고 자만하지 말자. 구미에서만 치프일 뿐, 난 이제 3년차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우를 받는 것은 단순히 최고 년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어깨에 걸린 의무와 책임이 막중하다는 의미였다. 각오를 단단히 할 일이었다.
회진이 끝났다. 박순용은 이미 수술 방으로 내려갔고, 서도진은 병동 일을 챙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지훈이 습관적으로 계단을 따라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전과는 달리 서두를 필요가 없었지만 민생고는 여전했다. 이건 치프라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치프가 되어도 아침 먹을 시간이 없는 건 똑같네.’
수술 방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김지훈이 힘차게 문을 열었다. 다른 과 전공의들과 수술 방 간호사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주고받는 김지훈의 눈가에 즐거움과 여유가 잔뜩 묻어 있었다.
드디어 구미에서 벌어지는 첫 번째 정규 수술이 시작됐다.
위암 환자다.
자연스럽게 퍼스트 자리에 선 김지훈이 수술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지난밤 책을 보며 수술법을 다시 각인시켰고, 당연히 집도의 입장에 서서 나름의 계획까지 세웠다.
막힘이 없었다.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위와 주변 조직이 모두 절제됐다. 제거된 위의 절단면에 암세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급히 수술실로 내려온 서도진이 혀를 내밀었다.
송동화 과장도 손이 빠르다면 빠른 사람이었다. 그 점을 감안해도 작년과는 확연히 달랐다. 집도의만이 아니라 퍼스트의 손이 수술 시간을 이렇게 단축시킬 줄은 몰랐다.
“선생님, 프리입니다.”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수술이 이어졌다.
배만 닫으면 수술은 모두 끝이 난다. 슬쩍 시계를 본 송동화 과장이 장갑을 벗었다.
“지훈아, 배 닫고 다음 환자 내려오면 연락해.”
“수고하셨습니다.”
복막부터 흡수성 봉합사로 닫기 시작했다.
“선생님, 연속 수처 때는 타이가 늘어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복막은 강하게 닫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붙어 있기만 하면 되니까 적당한 힘으로 당기세요.”
평상시와 목소리가 다르지 않았다.
“정중앙의 백색 선을 닫을 때는 최대한 강하게 타이합니다. 그리고 피부는 적당한 긴장을 주어야지, 이렇게 타이하면 피부 괴사가 올 수 있어요.”
역시 담담한 목소리였다.
타이가 잘못됐을 때는 다시 봉합을 한 후 직접 타이를 했다. 되도록 천천히 시범을 보여 확실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회복실에 들어서서 단둘만이 남자 김지훈의 표정이 달라졌다.
“선생님, 제가 분명히 타이 연습하라고 했죠? 어젯밤에 환자도 없었는데 뭐 하셨어요? 수술 후 오더는 왜 아직도 못 외운 겁니까? 일주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옆에 누가 있든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심각한 목소리로 지적을 한 김지훈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박순용과 함께 수술 후 오더를 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수술 환자를 볼 때 주의할 점과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사항들까지 자세히 알려 주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오더를 적고 있는 박순용을 보던 김지훈이 고민에 빠졌다.
‘강약 조절이 돼야 하는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 해야 기분 나쁘지 않게 알려 줄 수 있지?’
옆에서 볼 때는 치프의 역할이 참 쉬워 보였다. 그런데 막상 치프가 되자 사람과의 관계가 도리어 어렵기만 했다. 아랫년차가 박순용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도진과 이혁원은 물론 다른 인턴들에게 뭐라고 할 때마다 내심 걱정스러웠다. 태우는 것도 능력이었지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가 더 고민이었다.
박순용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후우! 어젯밤 어떻게 해서라도 타이 연습을 하고 잤어야 했어. 이놈의 오더는 왜 이렇게 안 외워지지? 김지훈 선생님, 죄송합니다. 단둘이 있을 때 지적해 준 것도 고맙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곧 탈장 환자가 내려왔고, 서도진이 응급실에 교통사고 환자가 단체로 들어왔다는 연락까지 해 왔다.
생각할 시간도 없는 것이 1년차였고, 위급한 환자가 오면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일반 외과 의사였다.
탈장 수술이 끝나고 응급실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일반 외과 환자는 한 명도 없었지만, 바이탈에 문제가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한시름을 돌렸다.
그때 당직실 쪽에서 몽둥이로 방석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퍽! 퍽! 퍽! 퍽!
서도진이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정형외과 애들은 변하질 않네요. 이십 분 늦게 내려왔다고 저렇게까지 때릴 필요가 있을까요? 1년차 때 그렇게 맞고 살았으면 안 때릴 만도 하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다. 늦게 내려온 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애들도 아닌데 저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에이! 제때 딱딱 내려오면 얼마나 좋아. 나도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안 하길 잘했네.”
없어져야 할 악습이었지만 참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다.
우당탕탕!
첫날부터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늦지 마라. 몽둥이를 들어야 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혼날 일이라는 건 맞잖아.’
전체 의국장이라고 해도 다른 과 일에 참견을 할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칫 인턴들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확실하게 가르쳐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도진아, 박순용 선생님하고 먼저 올라가.”
“예? 선생님은요?”
“흉부외과하고 성형외과 환자까지만 처리하고 올라갈게. 인턴 선생들이 전반적으로 입원 기록지도 제대로 작성을 못하더라. 그런 상황에서 환자는 제대로 보겠어?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
전체 의국장의 오지랖일까? 아니면 전공의가 없는 과의 환자들 걱정 때문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턴들 역시 천천히 배워도 될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점이었다.
김지훈이 성형외과와 흉부외과 인턴들은 물론 응급실 인턴까지 모아 놓고 교육을 시켰다.
방사선 검사와 필요한 혈액 검사부터 시작해 오더 내는 법과 입원 기록지 작성까지 하나하나 가르쳤다. 정형외과의 매타작 때문인지 인턴들이 거의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어이구! 이런 도움은 필요 없는데.’
“성형외과 인턴 선생, 장성기 과장님과 나한테 타고 싶지 않으면 오늘부터 삼겹살 사서 수처 연습해. 자신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을 갖는 게 더 중요해. 그러려면 손이 휙휙 돌아가야겠지?”
“흉부외과 인턴 선생,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흉부 도관 삽입법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해. 만일 긴장성 기흉이라도 오면 니가 해야 될 수도 있어. 그때 머뭇거리면 환자 놓칠 수도 있다. 잘하자.”
다 지난날의 경험이었다. 벌써 햇수로는 4년 전의 일이었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특히 긴장성 기흉 환자를 두고 악어와 부딪쳤던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인턴이라고 전공의나 과장들만 믿고 있다가는 환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응급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슬며시 이혁원을 불렀다. 편애하면 안 되지만, 그중 유독 아껴 주고 싶은 후배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누가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랬다.
이혁원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불과 사흘이었지만 그냥 눈에 보였다. 마치 교탁에 선 선생님 눈에는 누가 딴짓을 하는지 정확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지도 몰랐다. 물론 사람인 이상 특별하기만 한 인연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혁원아, 너 구미 스케줄이 어떻게 돼?”
“예. 응급실, 성형, 흉부, 일반 외과 돕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이혁원을 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이거 봐라. 이건 재가 되도록 태우라는 하늘의 계시네.’
“야! 나 인턴 때랑 똑같이 도네. 만만치 않은 과들이니까 열심히 해야 되겠다. 그런데 어째 다 나랑 만나야만 하는 과를 도냐. 자식! 우리가 꽤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그때 문득 이혁민 교수와 송동화 과장이 생각났다. 인턴 때 어느 과를 할지 빨리 결정하라며, 사실상 일반 외과를 하라는 무언의 협박(?)을 했었다.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혁원아, 너 무슨 과 할 거야?”
“외과 쪽을 하고 싶기는 한데 아직 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답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응도 똑같은 것이 세상의 이치다.
김지훈의 눈이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눈처럼 섬뜩하게 번쩍였다.
“외과라! 그럼 우리 과네. 통상 시간을 별로 안 주는데 너한테는 특별히 시간을 줄게. 우리 과 돌기 전까지 확실하게 결정해라.”
이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 두 달 내에 결정하라고요?”
“응. 시간 충분하잖아.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 책임도 니가 지는 거고. 알지? 안 하면 죽는다는 거. 도진이가 보기보다 성질이 대단해. 아니다. 어차피 스케줄상 죽게 돼 있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혁원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입맛을 다셨다. 일반 외과를 하든 말든 어차피 죽는다는 말이었다. 상반된 말속에 담긴 동일한 의미에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인턴에게는 한가로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환자 한 명이 들어왔다. 이혁원이 심한 변비라는 진단하에 내과에 노티를 했다. 그런데 복통이 너무 심하다며 일반 외과 질환을 배제하라는 오더가 나왔다.
박순용이 서도진과 함께 내려왔다. 역시 변비로 인한 기능성 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100일 당직 기간이었다. 게다가 내과 전공의가 아리송하다며 의뢰를 한 환자였다. 당연히 김지훈에게 노티를 해야 했다.
“변비요? 박순용 선생님, 직장 검사에서도 그래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서도진이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머리만 긁었다.
“이혁원, 직장 검사 했어?”
역시 말이 없었다. 눈매가 매서워진 김지훈이 이혁원의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응급실 매뉴얼을 꺼냈다. 변비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부분을 펼쳤다. 떡하니 직장 수지 검사를 하라는 글이 보였다.
“박순용 선생님,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엑스레이하고 배만 만져 보면 답이 그냥 나와요? 대장암 환자도 변비를 주소로 내원할 수 있어요. 환자부터 생각하세요. 이혁원, 넌 이건 왜 갖고 다녀? 폼이야?”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댈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박순용과 이혁원을 노려보던 김지훈이 직접 직장 수지 검사를 했다. 그러고는 차팅까지 했다.
모두들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차라리 큰 소리가 나오는 편이 나았다.
“박순용 선생님, 우리 과는 바이탈을 다루는 괍니다. 사소해 보이는 검사라고 무시하면 결국 환자를 놓치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이혁원, 넌 의사야. 명심해.”
‘그냥 확 리포트까지 쓰라고 할까? 에이! 그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거겠지?’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던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 역시 배움의 과정 속에 있었고, 아직도 수없이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었다. 치프 노릇 하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은 걱정이고, 일은 일이다. 뛰어난 후배를 외과 전공의로 만드는 것도 일이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서도진을 보며 말했다.
“도진아, 혁원이가 두 달 내에 우리 과를 할지 말지 결정한단다. 잘 가르쳐. 애먼 소리 나오면 알지? 너도 작년에 경험했잖아.”
서도진의 입꼬리가 귀까지 말려 올라갔다. 왠지 섬뜩한 미소였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혁원아, 인턴 하나 준다고 일에 지장이 없다는 것쯤은 너도 알지? 우리 실망시키지 마라.”
일반 외과 전공의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혁원에게 쏠렸다. 이제 1년차를 시작한 박순용까지 말이다. 이혁원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말씀이 없으실 때는 이상하게 무서운데, 일반 외과 선생님들이 다 이렇게 무서웠었나? 김지훈 선생님까지 이럴 줄은 몰랐네.’
김지훈의 눈빛과 서도진의 미소가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이혁원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