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Ⅱ (1)
박순용과 서도진이 깜짝 놀랐다.
“선생님, 형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박순용이 마치 선배를 대하는 것처럼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바로 위의 년차도 아니고 3년차기에 그럴 테지만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순용이 형, 잘 지내셨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음에 기회 되면 하죠. 형이라고 부르는 건 전공의를 하는 동안에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앞으로 얼굴 붉힐 일이 많을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한 번쯤은 편하게 얘기하고 싶어서요.”
형이라는 말에 도리어 박순용이 자세를 바로 했다. 까마득한 선배의 태도에 김지훈도 반듯한 자세를 취했다. 물론 가운데 낀 서도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말씀하시죠, 선생님.”
“도진이나 저나 형한테는 정말 까마득한 후배잖아요. 하지만 전공의로 보면 저희가 선배고, 형을 교육해야 하네요. 앞으로 문제가 많을 겁니다.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때론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드실 거예요.”
“각오한 일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예. 형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잘 알아요. 다만, 한 가지만 알아주세요. 아무리 얼굴을 붉히고 큰 소리가 나와도 감정을 섞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느껴지신다면 바로 말씀하세요. 우리가 바로 고치겠습니다.”
박순용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잊지 않고 개업한 병원에 찾아온 김지훈이었다. 서울 한복판도 아닌 이름조차 생소한 동네까지 말이다. 다른 선후배 사이보다는 더 친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인턴 때 선후배라는 사실을 싹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전공의들을 꽤 여럿 보았다. 특히 치프가 되면 더욱 그랬다.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전반기 근무는 생각보다 더 힘들 겁니다. 백 일 당직도 문제지만 제 성격 아시죠? 급하고 화도 잘 내잖아요. 도진이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러니까 서운한 일이 있어도 예전처럼 그러려니 하고 넘겨 주세요.”
“아닙니다. 화를 내시면 제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이겠죠. 학교 선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1년차라고만 생각해 주세요. 잘못한 게 있으면 달게 받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도진도 한발 걸쳤다.
“순용이 형님, 저는 처음 뵙지만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킴 밑에 난킴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도진 선생님.”
“예, 형님. 제가 소리 질러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잠시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분위기가 의외로 좋았다. 곧 식사가 도착하고 함께 밥을 먹을 때까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김지훈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박순용 선생님, 이제 정식으로 근무 시작합니다.”
환자 파악부터 할 일이었다. 차트를 확인해 가던 김지훈이 점점 말을 잃었다.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환자 기록을 열심히 한 티는 역력했지만 말끔하다고 해서 잘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통상 1년차들이 하는 실수라고 보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쩌면 개업했을 때의 습관이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차트 작성부터 확실하게 알려 줘야겠네.’
차트를 확인한 김지훈이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났다. 서도진이 박순용에게 눈짓을 했다.
“회진 돕니다. 앞장서세요.”
누구보다도 환자를 빠르게 파악하는 김지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첫날부터 모든 환자를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유념해서 보아야 할 환자부터 머릿속에 확실히 박는 것이 최선이었다.
밝은 웃음으로 환자 및 보호자와 인사를 나누며 회진을 돌던 김지훈이 힐끗 환자 리스트를 보았다. 수술 창에 염증이 생긴 환자를 볼 차례였다.
“이 환자분 상처 어때요?”
“예. 오늘 아침 드레싱에서도 고름이 좀 나왔습니다.”
“몇 장이나 젖었어요? 냄새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었다. 그런데 박순용이 환자에 대해 기록해 놓은 환자 리스트를 보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1년차 초반에는 종종 볼 수 있는 실수였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익숙해지기 전에는 기록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기 쉬웠다. 이제 일을 시작했고, 드레싱을 할 때만큼 바쁜 때도 없는 탓이긴 했다.
그러나 환자에 관한 한 눈곱만치도 예외가 없는 전공의가 바로 김지훈이었다.
‘당장 일은 해야 하는데 말로만 하다가는 한 달도 더 걸릴지 몰라.’
“박순용 선생님, 드레싱 카 끌고 오세요.”
순간 서도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김지훈이 살짝 눈치를 주고는 드레싱을 했다. 무엇을 보고 확인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직접 보여 주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여긴 것이다.
“환자분, 아직도 냄새가 좀 나고 고름이 부분적으로 네 장 정도 젖네요. 다행히 양이 많지는 않지만, 며칠 더 치료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데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회진이 졸지에 드레싱으로 바뀌었다. 가뜩이나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김지훈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서도진이 중간에 미리 드레싱을 하지 않았다면 꽤나 시간을 지체했을 것이다. 얼굴이 벌게진 박순용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윗년차들의 드레싱을 지켜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회진 겸 드레싱이 모두 끝났다. 김지훈이 다시 차트를 확인했다. 환자 파악을 하자 더욱 많은 구멍과 실수가 보였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김지훈이 서도진에게 빨간 볼펜을 내밀었다.
“도진아, 뭐가 문젠지 보이지?”
“예, 선생님.”
“이 볼펜 다 닳기 전에 확실하게 작성할 수 있도록 알려 주고, 입원 기록과 수술 기록도 정확하게 챙겨. 지금 빨리 체크해. 음! 박순용 선생님.”
안절부절못하던 박순용이 급히 대답을 했다.
“예, 선생님.”
“차트 작성은 시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환자 파악은 아니에요. 선생님이 정확하게 환자 상태를 모르고 있으면 우리는 물론 환자까지 모두 문제가 됩니다. 아시겠어요?”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인투베이션, 타이, 드레싱 이런 것들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바이탈을 다루는 과 1년차가 인투베이션을 못하는 게 말이 됩니까? 외과 1년차가 인턴처럼 타이를 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순용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나가서 지적받은 차트부터 다시 작성하세요.”
서도진이 내민 차트를 받아 든 박순용이 인사를 하고는 스테이션으로 나갔다.
서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생님, 삼 일 전에 구미로 직접 왔는데 조금 더 여유를 주시죠. 인턴한 지도 상당히 오래됐잖아요. 일주일 내에는 무립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 근데 도진아, 박순용 선생님은 1년차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우리까지 다 흔들릴 수밖에 없잖아. 그러면 환자는 어떻게 봐. 그래서 말인데, 이 주만 풀 당직 서자.”
“풀 당직이요?”
“그래. 바짝 붙어서 알려 주지 않으면 분명히 환자한테 문제 생긴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응급실은 인턴 선생한테 동시 노티 하라고 하고, 항상 같이 내려가. 필요한 처치를 못하면 지적만 하지 말고 직접 보여 주고. 알았어?”
서도진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100일 당직 기간 중에는 2년차 역시 상당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만 해도 1년차에게 노티를 받고 환자를 본 후, 다시 치프에게 노티를 해야 한다. 여기에 스태프가 나와 수술까지 하게 되면 보통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1년차들은 반복적으로 환자를 보며 자연스럽게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 인턴 때의 경험과 미리 받은 교육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역시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순용은 인턴을 한 지 오래였고, 사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중에 몸과 마음이 편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오프까지 반납해야 한다니 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도 내심 미안했다. 솔직히 치프로서의 의무감이 있는 자신도 풀 당직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서도진은 오죽할까?
“그래! 말이 풀 당직이지, 그게 말처럼 쉽겠어? 일이 있거나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보내 줄 테니까 나한테 말해.”
“정말이죠? 선생님은요?”
“나도 쉬고 싶을 때는 쉬겠지. 어쨌든 이 상태에서는 1년차 일도 제대로 하기는 힘드니까 신경 바짝 쓰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순용이 제대로 일을 하기 전에는 쉴 김지훈이 아니었다. 서도진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때 박순용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 왔답니다. 내려가 보겠습니다.”
“먼저 내려가세요.”
시원하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았다.
“예, 선생님. 저도 내려가 보겠습니다. 여기 계실 거죠?”
“응. 어휴! 머리 아파. 생각해 보니까 월요일 수술 환자도 파악해야 하네. 전화해.”
눈가를 찌푸린 채 의국을 나서던 서도진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구미로 내려오며 은근히 불안해했던 것들이 단 하루도 안 돼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래. 대충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스케줄을 원망해야지, 뭐. 그래도 하필이면 박순용 선생님도 모자라 3년차 중에 제일 빡빡한 지훈이 형까지 걸리냐. 그것도 육 개월이나? 나도 재수가 그렇게 좋은 놈은 아니었네.’
누구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
17세 여자 환자였다. 생리통인 줄 알고 며칠이나 진통제로 버티다 응급실로 내원했다.
김지훈이 침착한 태도로 꼼꼼하게 환자를 진찰했다. 그 모습에 도리어 엄마가 한 걱정을 했다.
“선생님, 아까 본 선생님들이 맹장이라 카던데 맞나요? 설마 다른 병인가요?”
김지훈이 혀를 차며 눈가를 찌푸렸다.
“예. 맹장은 확실해 보이는데 늦게 오셔서 터졌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복막염까지 유발됐다면 배도 크게 열어야 하고, 배 속에 심지까지 넣어야 합니다.”
“심지요? 그게 뭔데요?”
드레인에 대해 설명을 하자 엄마가 짜증을 부렸다.
“아이구! 내가 니 때문에 몬 산다, 몬 살아. 그러게 내가 빨리 병원 가라고 했을 때 갔어야지. 지지리도 엄마 말 안 듣더니 잘됐다. 이놈의 가시나! 확 죽여 삘라.”
“엄마, 내 지금 많이 아프다. 그리고 내 배 째지, 엄마 배 째나?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역시 화가 나면 억양이 세지면서 말이 상당히 빨라진다. 대충 저런 대화가 오고 갔다.
김지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노티를 했다. 박순용이 옆에서 열심히 차팅을 하고 있었다.
‘기본, 원칙. 이건 1년차가 아니라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나부터 지키자.’
“김지훈입니다. 선생님, 노티 드리겠습니다. 내원 사 일 전부터 시작된 복통으로 내원한 17세 여자 환자입니다. 현재 우하복부 동통을 호소하고, 압통과 반사통 모두 관찰됩니다. 내원 당시 시행한 검사상 백혈구 수치는 12,000입니다. 아뻬 의심됩니다. 터졌을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송동화 과장이 희한하게 웃었다.
(김지훈, 너 갑자기 왜 이래? 그냥 아뻬라고 해도 돼.)
“아닙니다, 선생님. 노티는 정확하게 해야죠.”
(혹시 옆에 박순용 선생님 있어?)
“예, 선생님.”
송동화 과장이 또 웃었다.
(알았다. 나 조금 있다가 출발할 테니까 스케줄 내고 시작하고 있어.)
“예? 시작하고 있으라고요?”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고 있어.)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좋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3년차 말은 되고 전적인 신뢰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홍재순도 그렇게 좋아했던 일이었다. 구미라고 해서 치프를 더 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할 일만은 아니야. 날 그만큼 믿으신다는 소리니까 더 열심히 환자를 보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해. 자만하지 말고 침착하게 수술하자.’
“박순용 선생님, 지금 바로 스케줄 작성해서 제출하세요. 수술실 준비되면 바로 환자 올릴 겁니다.”
박순용이 차팅을 하다 말고 급히 스케줄을 챙겼다.
김지훈이 자꾸만 다가오는 흥분을 지그시 억누르며 응급실 차트를 보았다. 필요한 사항들이 거의 다 정확하게 기재돼 있었다. 어느새 이혁원이 다가와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본을 지킨 것뿐이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칭찬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거의 다였지, 완벽한 차팅은 아니었다. 당연히 빨간 볼펜이 나올 때였다.
덩달아 옆에 놓여 있던 응급실 차트까지 빨간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빨간 줄이 쫙쫙 그어질 때마다 이혁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혁원아, 차트 다시 작성해. 우리 잘 좀 하자. 그리고 비지에이를 실패한 이유는 찾아봤지? 근데 왜 실패하면 안 돼?”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이혁원도 눈치가 있고, 자신의 실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미 짬을 내서 의미까지 다 찾아봤다. 이혁원이 헛기침을 하며 원하는 답을 줄줄 읊었다.
“비지에이는 환자의 동맥 내의 산소 포화도만이 아니라 PH와 전해질까지 측정할 수 있어서,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의 경우에는 초기 치료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김지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지에이라는 검사가 갖는 의미였고, 당연히 실패하면 안 되는 이유기도 했다. 책에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혁원이 대답을 끝내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 맞는 말이야. 근데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옆에서 스케줄을 작성하던 박순용은 물론 서도진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검사기는 하지만 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선생님, 제일 중요한 거라니요? 책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참고해야 할 책이 또 있는 건가요?”
“혁원아, 여러 번 찌르면 환자가 많이 아파한다. 절대 잊지 마라. 도진아, 나 먼저 수술 방에 가 있을 테니까 환자 올라올 때 너도 같이 올라와.”
이번에는 엉뚱한 대답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이혁원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수술 방으로 향했다.
다들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환자가 많이 아파한다는 말이 이상스럽게도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서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환자의 입장부터 이해하라는 말이겠지? 에휴! 이런 건 정말 배워야 돼. 박순용 선생님, 앞으로 코 줄이나 소변 줄 낄 때 신경 좀 쓰세요. 혁원이 너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이혁원이 갑자기 미소를 머금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김지훈의 눈은 분명 잘했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