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Ⅰ (2)
힐끗 회복실을 본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직도 서도진과 박순용이 오더를 내고 있었다. 환자가 옮겨지지 않은 탓인지 수술 기록지까지 작성하는 것 같았다. 뭔가 지적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 문득 이혁원이 떠올랐다.
인턴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 중 하나인 비지에이(aBGA:동맥혈 가스 분석)를 하지 못했다. 기본이 부족하면 어떤 술기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초턴이기에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도 다음부터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의 혈압이 떨어졌다는 것은 핑계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인턴은 환자를 처음으로 보아야 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마침 한마디 할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혁원아, 이게 다 환자와 너를 위한 일이니까 서운해하지 마라. 난 스승님께 이 년 동안 재가 되도록 탔다. 내 스승님이 누군지 알면 너도 깜짝 놀랄 거다. 그나저나 더 급한 사람은 순용이 형인데 어떻게 하지?’
일단 상대적으로 쉬운 일부터 해결할 일이었다.
어떻게 태워야 잘 태웠다고 소문이 날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응급실이 한산하기만 했다. 김지훈이 왔다는 연락을 받은 이혁원이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있지.”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 김지훈이 슬슬 태울 준비를 하다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스테이션에 놓인 응급실 차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동시에 송동화 과장의 말이 뇌리 속을 스쳤다.
응급실 인턴을 교육시켜야 하는 전체 의국장!
일반 외과 후배로 만들고 싶은 이혁원!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온 사방이 태울 거리였다.
‘자식들, 다 죽었어. 어디 차팅을 어떻게 했나 볼까?’
자연스럽게 빨간 볼펜을 꺼내며 차트를 확인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몇 장을 더 읽고 나서는 아예 화가 난 표정으로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다.
비지에이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다.
“이혁원, 수술 방에 가서 지금 수술한 환자 응급실 차트 가져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낌새에 이혁원이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차트를 가져왔다. 김지훈이 쓰윽 한 번 살펴보고는 차트를 들고 당직실로 향했다.
“따라와.”
치프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인턴을 불렀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
웬만한 전공의들 앞에서는 치프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 간호사들조차 눈치만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구든 서로를 존중하며 확실하고 철저하게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 대표적인 전공의가 바로 김지훈이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오자마자 15분 만에 환자를 해결했다. 해마다 온 탓에 구미 간호사들 상당수가 김지훈이 어떤 전공의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쌤, 빨리 따라가요.”
간호사들까지 재촉을 했다. 바짝 긴장한 이혁원이 뒤를 따랐다.
“나머지 한 명은?”
“백 듀티(Back Duty)라 먼저 식사하러 갔습니다.”
이왕이면 다 있을 때 지적하는 것이 좋겠지만, 김지훈도 이제 막 구미로 왔다. 인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이혁원부터 확실하게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비지에이는 실패할 수 있다. 심지어 김지훈 자신도 그럴 수 있었다. 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원칙을 지켰는지 물어보고, 필요하다면 따끔한 지적을 할 생각이었다.
반면 차트 작성은 실수를 거론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와 의식 문제였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혁원, 너 지금 이걸 차팅이라고 한 거야?”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이혁원도 당직실로 들어오면서 대충 차트 작성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환자들이 갑자기 몰려오면 간단하게 작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응급실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핑계일 뿐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 너 환자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니가 작성한 이 차트를 보고 어떻게 환자 파악을 하라는 거야?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기본은 지켜야 할 거 아냐?”
김지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넌 학생이 아니라 인턴이야. 의사라고. 환자에게 문제가 생겨도 죄송하다고 할래? 니 차팅을 보면 지금 수술한 이 환자도 별문제가 없는 환자야. 뭐야? 이게 말이 돼? 이 환자 차트 다시 작성해.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환자에 상관없이 다 확인할 거니까 제대로 해라. 넌 인턴이야.”
사실 서울이나 천안 병원에서는 생기지 않을 일이었다. 초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미 병원은 달랐다. 초턴이라고 해도 환자를 먼저 보고 판단한 후 노티를 해야 한다. 그만큼 차팅도 중요했다.
김지훈이 가져온 차트를 일일이 확인하며 문제가 되는 부분을 빨간 볼펜으로 쭉쭉 그었다. 이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무성의의 극치네. 지적할 곳이 한두 군데여야지 고쳐 주지. 다 다시 작성해. 이혁원, 긴장 안 할래? 인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너 이따위로 일할 거야?”
이혁원이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의사가 기본을 못 지키면 반드시 실수한다.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니가 아니라 환자야. 차팅은 환자에 대한 정보를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야. 명심해. 기본을 이렇게 무시를 하니까 비지에이도 실패를 하지. 왜 실패했는지도 잘 생각해 봐. 알았어?”
화가 나도 정말 단단히 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혁원을 힐끗 쳐다본 김지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은 이혁원이 차트를 보며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었다.
그때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이혁원이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혁원, 내가 구미 전체 의국장이야. 앞으로 전공의가 없는 과 인턴은 모두 신경을 쓸 거니까 확실하게 하라고 전해.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 알았어?”
“예.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이미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내심 비지에이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 차팅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기본을 지켜야 한다.’
한동안 빨간색으로 도배가 된 응급실 차트를 보던 이혁원이 조용히 응급실 매뉴얼을 꺼내 들었다. 연이은 근무로 눈이 벌게져 있었지만 김지훈도 눈이 뻘겋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사로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애정이 없다면 혼내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이혁원에게 김지훈은 각별한 존재였다. 의사이자 선배로서도 존경했지만, 유일하게 아버지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나눈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씩씩거리며 중환자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순간 조그만 걱정과 갈등이 다가온 것이다.
‘어휴! 자식, 차팅도 똑바로 안 하면 어떻게 해? 제길! 혁원이도 그렇고 순용이 형한테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혹시 내가 엉뚱한 감정을 섞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에휴! 타는 게 훨씬 쉽네.’
스승에게 그렇게 타면서도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속에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싣지 않았다. 이건 똑같이 따라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혁원을 비롯한 모든 후배들을 진심으로 아껴야 가능한 일이었다.
쩝쩝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들어가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 내가 뭐라고 했지? 인턴 선생들 트레이닝 시킨다고 했나? 내가 미쳤지.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그렇지, 왜 스스로 일을 만들고 있니. 무를 수도 없고 죽겠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혼자 투덜거리며 중환자실로 내려온 환자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서도진과 박순용이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김지훈이 환자 상태를 먼저 살피고 수술 후 오더를 확인했다. 서도진이 함께한 덕인지 박순용은 확실하게 빠짐없는 오더를 냈다. 입원 기록지도 일단은 말끔하게 기록돼 있었다. 마음이 조금은 풀렸는지 굳었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박순용 선생님, 환자 괜찮죠?”
“예. 바이탈 안정적이고, 환자 의식이 많이 돌아온 상탭니다. 아직 수술 후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고 회진 돌죠. 그리고 이 환자는 주말 동안 킵해야 합니다. 상태 좋다고 방심했을 때 일 터지니까 잘 보세요.”
다시 한 번 환자 상태를 살피던 김지훈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내과 전공의 3년차인 공정식이 차트를 보며 환자 파악을 하고 있었다.
“정식아! 반갑다.”
“오! 김 치프! 반가워.”
“아! 그런가? 공 치프! 반가워. 잘 지냈지?”
그동안 못 나눈 말들을 잠시 나누던 김지훈이 공정식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외과와 내과는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전체 의국장의 짐도 나누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주머니 속이 무거웠던 참이었다.
“정식아, 너 내가 전체 의국장인 거 알지?”
“그럼, 잘 알지. 그런데 왜?”
“음! 총무가 필요해서. 니가 해라.”
“총무? 우리 회비 걷을 일 있어?”
“회비? 월급도 쥐꼬리만 한데 그런 건 왜 걷니. 다른 게 아니라, 전체 의국비가 있더라구. 한 달에 오십이야. 이거 너 줄 테니까 니가 관리 좀 해. 우리 숙소 휴게실 냉장고도 채우고, 돈 남으면 전체 회식도 하고 좋잖아.”
공정식이 손사래를 쳤다.
“야! 나 바빠, 인마. 다른 애 시켜.”
“정식아, 나는 전공의 없는 과 인턴 선생들 교육까지 시켜야 돼. 총무 하기 싫으면 니가 대신 하든지. 그건 싫지? 그럼 총무 해라.”
김지훈이 봉투 하나를 툭 던지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서도진과 박순용이 그 뒤를 따랐다.
“근데 전체 의국비가 있었나?”
공정식이 졸지에 총무가 됐다. 돈 봉투를 들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지었다.
의국에 올라가 식사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원래 주인이 불분명한 돈은 헤프게 쓰기 마련이었다. 혹은 개인적으로 유용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많았고, 잡음이 터지는 과도 있었다.
이럴 때는 돈 관리를 잘할 놈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후배들을 위해 유용하게 써야 할 돈이었다.
내친김이었다.
“도진아, 우리 의국비다. 이건 니가 관리해.”
“예? 제가 관리하라고요?”
“그래. 우리 밥 굶기지 말고 잘 관리해라.”
남은 돈 봉투가 툭 던져졌다. 서도진이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지훈이 눈을 부라리자 조용히 의국비를 갈무리했다. 그 와중에도 예리한 눈으로 액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와! 꽤 되네요. 가끔 삼겹살 사 먹어도 되겠는데요?”
“도진아, 백 일 당직 기간이다.”
서도진이 헛기침을 하며 박순용을 보았다.
외출은커녕 챙겨 주지 않으면 밥도 못 먹는 1년차를 앞에 두고 삼겹살이 가당키나 한가?
속 시원하게 돈 문제를 털어 낸 김지훈이 박순용을 보았다.
오자마자 바로 수술을 한 탓에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앞으로 3개월, 아니 서울까지 6개월을 서도진과 함께 셋이서 일해야 한다.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사전에 최대한 막아야 했다.
‘내가 막 1년차를 시작했을 때 무슨 말을 들었지? 아! 음성이라 못 들었구나. 그럼 내 방식대로 하는 수밖에 없네.’
구미로 내려오는 내내 나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을 했다. 입장이 곤란할수록 인간적인 친근감이 우선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은 최소한 그렇게 생각했다.
지극히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아랫년차에게 절대 하지 않는 말이 나왔다.
“순용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