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Ⅰ (1)
구미에서의 첫 수술이다.
수술대로 옮겨지는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퍼스트를 안 서 본 것도 아닌데 느낌 자체가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치프라는 사실과 약간은 미숙해 보이는 박순용의 모습 때문인지 어깨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고, 전에 없는 긴장까지 다가왔다.
‘난 이제 단순히 퍼스트만 서는 것이 아니다. 환자부터 시작해 박순용 선생님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 내가 흐트러지면 의국도 흐트러진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환자와 관련된 한 박순용 선생님은 학교 선배가 아니라 1년차다.’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물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마취과가 들어와 환자의 혈압부터 쟀다. 다행히도 100 언저리에서 잡혔다. 빠르게 마취가 진행되고,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드랩은 아주 기본적인 과정이었다. 그런데 복부를 제외한 전신을 소독된 천으로 덮는 드랩(Drap)부터 손발이 엇갈렸다. 박순용이 미숙한 것이 아니라 잘하고자 하는 의욕이 앞섰던 탓이었다.
1년차 때 자신도 그랬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모르긴 몰라도 나도 분명히 저랬겠지?’
여하튼 바람직한 일이었다.
“박순용 선생님, 제 손에 맞추셔야죠.”
“죄송합니다, 선생님.”
드랩이 끝나자마자 송동화 과장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예.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항상 듣는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속에 숨은 의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환자가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서로 확인하는 과정으로 집도의와 퍼스트가 반드시 챙겨야 할 것 중의 하나였다.
“메스.”
송동화 과장의 손에 들린 메스가 무영등 불빛에 번쩍였다.
그 순간 김지훈의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 복부 정중앙을 따라 길게 절개했다. 복막이 열리자 배 속을 가득 채운 피가 보였다.
“석션, 탭, 물 주세요.”
김지훈이 필요한 것들을 말하며 할끗 박순용과 인턴을 보았다. 세컨과 써드는 복벽에 리트랙터(Retractor:복벽을 걸어 당기는 수술 기구)를 걸고 당기는 단순한 일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수술 시야를 적절하게 확보하기 위한 일이었다. 박순용이나 초턴도 이를 빤히 알고 있지만 적절하게 움직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김지훈이 재빨리 손을 뻗어 리트랙터의 위치를 잡아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수술 끝날 때까지 이 정도는 유지하세요.”
곧 배 속의 피를 제거하고 장기를 확인했다. 다행히 별다른 동반 손상은 없었다. 이제 비장만 제거하면 된다.
김지훈의 눈짓에 옆자리, 즉 환자의 왼편에 선 박순용이 힘차게 리트랙터를 잡아당겼다.
송동화 과장이 중얼거렸다.
“오케이! 훨씬 낫네.”
손상된 비장이 드러났다. 송동화 과장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3개월 전과는 뭔가 달랐다. 손이 더욱 빨라진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왠지 퍼스트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환자 바이탈이 수술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왜 이렇게 서두르시지?’
의아한 일이었지만 퍼스트는 일단 집도의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김지훈이 당황하지 않고 빠른 호흡에 손을 맞췄다.
비장과 연결된 조직을 자르고 타이를 했다. 이어 비장 동맥을 확실하게 찾아 이중으로 타이를 했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오직 수술에만 집중했다. 반쯤 깨진 비장이 빠르게 제거됐다.
송동화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전과는 또 달라졌어. 이혁민 선생님과 송재덕 과장님이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네.’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구미로 왔다. 치프가 됐다고 저절로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단순히 손만 빨라진 것만이 아니라 자신과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볼 때마다 놀라움을 주는 김지훈이었다.
수술 중에 다른 생각은 금물이다. 이내 다시 수술에 집중했다.
“마취과, 바이탈 어떻습니까?”
“100에 70 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송동화 과장이 마무리에 들어갔다. 배 속을 깨끗이 씻고 드레인(심지)을 박은 후 복막을 닫았다.
대개는 여기서부터 치프들에게 손을 넘겼지만 지금은 100일 당직이 막 시작됐다. 1년차들이 배를 닫는 과정조차 정확히 모르는 때였다. 더구나 바이탈이 흔들린 환자였기에 가능한 한 빠르게 수술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송동화 과장이 직접 배를 닫기 시작했다. 묵묵히 퍼스트를 서던 김지훈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크릴(흡수성 봉합사의 일종) 3번 주세요.”
경험이 많은 간호사들은 각 과정마다 필요한 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준비한다. 집도의나 전공의들도 간호사를 믿기에 통상 실의 이름과 번호를 말하지 않고 손만 내밀었다. 그래도 수술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누군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송동화 과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치프라고 겉멋을 떠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지.’
그 때문일까? 박순용이 눈에 불을 켜고 배를 닫을 때 어떤 실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각 층마다 어떻게 봉합을 하고 타이를 하는지를 꼼꼼하게 보고 있었다.
송동화 과장이 피하지방까지 닫고서야 장갑을 벗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힘차게 인사를 한 김지훈이 집도의 자리로 옮겼다. 박순용이 어정쩡한 자세로 퍼스트 자리에 서 있었다. 김지훈이 내심 웃고 말았다.
구미로 오는 내내 박순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환자를 사이에 둔 탓인지 까마득한 학교 선배가 아니라 이제 막 들어온 1년차로만 보였다.
“나일론 3번 주세요.”
피부 봉합을 시작했다. 박순용이 떡하니 가위를 들고 있었다. 첫 바늘을 뜬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예? 컷(Cut)하려고 합니다.”
“컷이요? 백 일 당직 중에는 피부 봉합도 타이를 합니다. 그렇게 안 배우셨어요?”
박순용의 눈가가 벌게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병원 정리 때문에 늦게 와서 교육을 다 못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늦게 오셨다고요? 언제 오셨는데요.”
“삼 일 됐습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픽스턴을 제대로 돌아도 미숙할 판이었다. 그런데 인턴만 마치고 몇 년간 개업을 했던 박순용이 1년차 일을 배운 지 불과 3일이란다.
난감하기만 했다.
‘이거 큰 문제네. 앞으로 어떻게 하지?’
“일단 타이부터 하세요.”
타이를 하긴 했다. 손이 매끄럽지 못했다. 아무리 잘 봐줘도 1년차가 아니라 인턴 정도의 수준이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선생님, 타이 연습은 안 하셨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날 말로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다. 김지훈이 직접 타이를 했다. 휙휙 손가락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말끔한 매듭이 만들어졌다.
박순용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인턴까지 마쳤다. 이 정도로 타이를 빠르게 하는 전공의는 보지 못했다.
사실 비장을 제거할 때는 헛바람을 일으킬 뻔했다. 몇 번 보지는 못했어도 이경석이 퍼스트를 서는 모습을 보며 무척 감탄을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김지훈은 후배가 아니라 3년차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이를 눈앞에서 직접 보여 준 이유는 빤했다. 김지훈만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우리 과는 타이가 가장 기본이면서도 제일 중요한 술기예요. 명심하세요, 선생님.”
어느새 두 번째 봉합이 끝났다.
“타이.”
박순용의 모자가 점점 축축하게 젖었다. 의사가 되기도 전에 임상 실습을 돌며 배운 것이 타이였다.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물론 김지훈의 손을 본 탓이긴 했지만 말이다.
거의 피부 봉합이 끝날 때쯤 서도진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응. 도진이 왔구나. 응급실에 환자 없어?”
“웬일인지 조용하네요.”
서도진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지난 1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고 노력해 어엿하게 2년차가 된 전공의의 모습이었다. 서도진은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김지훈이 마지막 바늘을 뜨고 니들 홀더를 내려놓았다.
6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박순용이 꽤나 힘들어 보였다.
‘체력서부터 인투베이션 같은 기본적인 술기에 수술까지 다 문제네. 첫날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어떻게 하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면 100일 당직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치프가 되면 가능한 한 꼭 챙겨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이 힘들 때 배까지 고프면 그보다 서러운 일도 없었다. 일단 인사도 할 겸 민생고부터 해결할 일이었다.
‘아무리 백 일 당직 중이라도 최소한 밥은 먹고 살아야지.’
“도진아, 이 환자 주말 동안에는 중환자실에서 보자. 그리고 환자 옮기고 나서 바로 밥부터 먹자. 배고프다.”
“그때면 구내식당 닫을 것 같은데요.”
“우리에겐 짜장과 짬뽕이 있잖아, 인마. 밥 먹고 바로 환자 파악할 거니까 병동 의국에서 먹자.”
서도진이 손가락을 튕기며 좋아했다.
곧 수술이 모두 마무리됐다.
서도진과 박순용이 환자와 함께 회복실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멈칫거렸다.
이젠 치프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모든 환자는 서도진과 박순용에게 맡겨야 한다. 아랫년차를 믿지 못하면 의국이 원활하게 돌아갈 리가 없었다.
갑자기 갈 곳을 잃은 김지훈이 잠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병동이야, 의국이야. 아니면 숙소야.’
별게 다 고민스러웠다.
그때 교수 휴게실 문이 열렸다. 송동화 과장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송재덕 과장의 안부부터 천안 병원 사정까지의 이야기가 잠시 오고 갔다.
“하여튼 앞으로 잘해 보자.”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니가 구미 의국장도 겸하는 거 알지?”
대충 일반 외과 치프가 구미에 파견된 인턴과 전공의 전체를 대표한다는 말은 들었다.
“듣긴 했는데, 딱히 할 일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없긴 왜 없어. 귀찮아서 안 한 거지. 원래 전공의가 없는 과하고 응급실은 전체 의국장이 책임지고 트레이닝을 시키도록 돼 있어. 하긴 우리 과 일도 벅차서 힘들긴 하지. 아무튼 그렇게 알고 문제 생기지 않게 관리라도 잘해. 그리고 이거 받아.”
하얀 봉투다. 그런데 두툼하다.
“이게 뭡니까, 선생님?”
“우리 과 의국비 오십만 원하고, 전체 의국비 오십만 원이야.”
역시 돈은 강했다. 김지훈의 입이 슬며시 찢어졌다. 새삼 치프가 됐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한 달 치 치고는 약간 많았고, 세 달 치 치고는 턱없이 적었다.
송동화 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공적인 돈이다. 넌 잘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세 달이면 삼백이다.”
“예에? 이게 한 달 치예요?”
“그럼 설마 세 달 치겠어? 니들 밥 먹을 돈은 돼야지. 툭하면 밥 먹을 시간 놓치는데 사 먹어야 할 거 아냐.”
“감사합니다.”
김지훈의 입이 완전히 귀에 걸렸다.
‘설마 이 자식도 돈 욕심을 내려나?’
치프들 대부분 의국비를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 탓에 의국비에 관심이 많은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원성의 대상이 되곤 했다. 김지훈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얼굴을 보니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의국비는 치프의 소관이었고,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송동화 과장이 갑자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결국 그동안 그렇게 우려했던 의국 내 힘 싸움이 시작됐다. 그 탓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결정하기 힘든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과장님 제안을 따르면 너까지 물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혁민 교수님 말씀을 따르자니, 날 위한 일인지는 알면서도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네. 제길! 이번에는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가 않은데 큰일이야.’
송동화 과장이 입을 열려다 말고 손을 저었다. 아무리 답답하고 김지훈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아니었다.
“나가 봐.”
홀로 남은 송동화 과장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나 금경태 과장, 누구의 말도 확실하지 않았다. 막말로 줄을 잘못 서면 꼼짝없이 구미에서 평생 근무해야 할 판이었다.
보다 큰 세상!
서울은 물론 천안 병원은 확실히 큰 세상이었다. 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좀처럼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이혁민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신현수가 아닌 김지훈을 보낸 이유가 있었다. 단지 외과 전공의로서의 실력만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송 과장, 구미 첫 치프로 지훈이가 간다. 확실하게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결정을 내리면 준비할 여유가 있을 거야. 사실 우리 병원도 응급 의학과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난 송 과장이 맡았으면 하지만 너무 부담 갖지는 마라. 어차피 보낼 놈을 보낸 거고, 송 과장 니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치프인 김지훈은 왔다. 첫 수술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됐고,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송동화 과장 자신의 결정뿐이었다.
교수 휴게실이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