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드디어 3년차다. 그것도 치프다 (1)
서울에서의 3개월 근무는 대단히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신현수가 정말 오래간만에 아버지와 이혁민 교수를 동시에 떠올렸다. 솔직히 아버지를 통해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배울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당연히 후배일 것이다.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스케줄을 따라야지. 그럼 오프를 포기해야 하나?”
손일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오프를 또 포기해? 그게 그렇게 되나? 우아! 지훈이 이 자식, 정말 웬수다. 어떻게 지역이 달라도 날 죽일 수 있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김지훈이 들어섰다.
그 순간 하얀 모나미 볼펜이 강력하게 회전하며 허공을 갈랐다. 김지훈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볼펜을 잡으며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어디서 테러야. 너 왜 그래?”
“어쭈! 확실히 손은 빠르네. 그냥 성질나서 그래, 인마. 커피나 사.”
“커피? 전번에 내가 샀는데 또 사?”
“그럼 라파로 한 놈이 사야지. 우리가 사리?”
김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라파로를 해? 기구 딱 한 번 잡아 봤다. 그렇게 따지면 위 자르고, 비장 뗀 놈들이 사야지.”
“잔말 말고 회진 올라오시기 전에 빨리 사. 현수야, 가자. 지훈이가 냉커피 산단다. 우라질! 추워 죽겠는데 계속 찬 것만 마시고 앉았네. 도대체 내 마음에 봄은 언제 오는 거야.”
신현수가 조용히 일어나 손일석의 뒤를 따랐다. 멍하니 뒷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후다닥 뒤를 따랐다.
‘이 자식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친해 보이네. 그런데 왜 목덜미가 서늘하지?’
2월 막바지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가운데 세 놈이 냉커피를 홀짝거렸다. 3년차가 되면 훨씬 편해질 줄 알았는데,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후배들은 줄줄이 들어오는데 왜 더 힘들어지는 걸까?
***
천안 병원에서의 마지막 주가 시작됐다.
김지훈에게는 정말 뿌듯한 시간이었다. 정말 어렵게 라파로를 시행한 80세 고령 환자가 빠르게 회복됐다. 출혈이 제일 걱정이 됐지만 심지를 통해 나오는 말간 체액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손일석의 말처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라파로를 한 것 같았다.
다른 환자들보다 불과 이틀 정도 더 입원했을 뿐이었다. 그래야 6일이었다. 개복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과였다.
“젊은 선생님, 고맙소.”
“건강하세요, 할아버지. 당뇨가 있으니까 운동 게을리 하지 마시고요.”
“허허! 꼭 우리 아들내미하고 며느리 같네. 젊은 사람이 잔소리는. 근데 나 술 먹어도 되나?”
응급실로 내원했을 때와는 달리 의외로 정정했다.
“어이쿠! 할아버지, 그동안 뭐 들으셨어요. 그러다 또 병원에 오십니다.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한 잔은 괜찮지?”
대답도 하기 전에 병실을 나온 환자가 꼬장꼬장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라파로로 하기를 정말 잘했네.’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김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배웅을 했다. 노인 특유의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던 환자가 문이 닫히는 순간 뭔가 휙 던졌다. 반으로 접힌 하얀 봉투였다.
“젊은 선생님, 술이나 한잔해.”
환자, 아니 건강을 되찾은 80세 노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봉투를 집어 든 김지훈이 웃었다. 때론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환자들의 돈은 감사히 받는 것이 좋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환자가 김지훈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는 퇴원을 했다.
끝날 때가 됐다고 일상이 느슨해지거나 변할 리는 없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논문과 자체 집담회를 준비하다 보면 밤이 깊어 갔다.
목요일 밤, 논문 초안을 쓰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벌떡 일어났다. 구미 첫 치프로서 반드시 챙겨야 할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백 일 당직!’
신임 1년차들의 교육은 치프들이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 첫 3개월은 이후 1년차의 능력을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하기에 오프도 안 주고 100일 동안 당직을 세우는 것이다.
김지훈이 부랴부랴 3년차 숙소로 달려갔다. 다행히 홍재순과 치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지훈아,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선생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백 일 당직 동안에 제가 구미에서 1년차에게 어떻게 해야 하죠? 그리고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 또 있나요?”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별거 없어. 수술 열심히 들어가고, 환자 잘 치료하고, 1년차는 확실하게 태우면 돼.”
“그냥 태우면 되나요?”
“당연하지. 뭐가 또 있어? 근데 구미 일이 년차가 누구야? 니 밑에 있으면 고생 좀 하겠어.”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치프가 되면 무엇보다도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 자신의 일만 챙기면 됐던 일이 년차 때와는 달랐다. 챙겨야 할 사람도, 책임질 일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런데 일이 년차가 누군지 아직도 확인을 안 한 것이다.
슬며시 홍재순의 눈치를 보던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뺐다. 벽에 붙어 있는 스케줄 표를 예리한 눈으로 확인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서도진의 2년차 첫 텀이 구미였다. 위의 년차가 열성적이면 배울 것이 많지만, 그만큼 아랫년차의 몸은 고달파진다. 좋아할지 괴로워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김지훈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1년차는?
1년차 스케줄을 쭈욱 따라 내려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허탈한 소리를 냈다. 일전에 얼핏 1년차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반가워했었다. 하지만 구미로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보였다.
다름 아닌 박순용이었다.
까마득한 선배가 1년차라니 난리 났다.
눈치가 빠삭한 홍재순이다.
“박순용이? 걔가 내 하나 아래니까 송동화 과장님보다 위네. 킴(군 미필자) 밑에 난킴(예비역)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니 스케줄 참 희한하다. 이 자식은 뭐하다 이제 들어온 거야? 근데 너 순용이가 누군지 알기는 해?”
“그럼요. 잘 알죠. 아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친해서 그게 더 문제네요. 학교 다닐 때 형형 그러면서 따라다녔고, 작년 휴가 때는 개업한 병원에도 들렀었어요. 나나 도진이가 뭐라고 하면서 트레이닝을 시키죠? 그것도 백 일 당직인데 정말 갑갑하네요.”
전공의 생활 중 가장 입장 곤란한 경우에 걸렸다.
학교 선배가 아랫년차로 들어오면 아무리 잘못해도 큰 소리조차 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예 안면을 싹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문의가 되고 나면 곧바로 인생 역전이었다.
김지훈이 푹푹 한숨을 내쉬자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너 지금 걱정하는 거야?”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자식! 그런 놈이 나한테는 어떻게 말을 붙였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순용이가 아니라 더 선배라고 해도 네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 3년차 말 안 들으면 2년차도 고개를 돌릴 테고, 그러면 누구한테 배워? 송동화 과장님도 백 프로 네 편을 들걸?”
맞는 말이긴 했다. 전공의들 사이에서 년차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정말 무시하지 못할 힘이었다. 가장 잘난 놈도 가장 못난 위의 년차보다 실력이 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윗년차에게 한 번 찍히면 4년 내내 제구실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그래도 선배라는 사실이 주는 부담은 대단했다. 그것도 김지훈을 아껴 주었던 선배다.
홍재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2년차 중에서는 제일 뛰어난 놈이지만, 이런 경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 지훈아, 네 자신이 어떤 강점을 가졌는지 잊지 마.’
“지훈아, 순용이를 잘 안다면 어떤 놈인지도 알겠네. 괜찮은 선배였어?”
“그럼요. 까마득한데도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그럼 나한테 했던 것처럼 이해해 주고 믿어. 전문의만 되는 게 목적이었으면 우리 과를 할 리가 없잖아. 트레이닝 때는 네가 단순히 년차만 높은 게 아니라 선생이자, 선배다. 그리고 넌 치프잖아.”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치프란 말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왔다. 이제야 조금은 교수들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잘나서 구미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학교 선배인 박순용을 구미로 보내는지도 몰랐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어. 더 많은 조언이 필요해. 스승님은 뭐라고 하실까?’
잠시 홍재순에게 치프가 해야 할 일들을 들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스승의 오프 날이 금요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스승님, 지훈입니다.”
(웬일이야?)
“저 다음 텀으로 구미로 가게 돼서 인사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그래. 잘 갔다 와.)
언제나 무뚝뚝하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며 잠시 머뭇거렸다.
전공의 시절은 생각도 안 날 스승에게 치프가 어떤 존재인지 물어보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스스로 알아 가고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스승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전화를 왜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
(너 구미 가면 치프지?)
“예, 스승님.”
(다른 거 생각할 것 없어. 치프는 전공의면서 의국을 책임지는 사람이야. 그것만 기억해. 끊는다.)
띠! 띠! 띠! 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이젠 서운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이래야 스승님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준영 과장의 말을 곱씹던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의국을 책임지라는 말에는 무수한 의미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명쾌했다.
책임자!
권리보다 더욱 많은 의무가 뒤따르는 존재다. 앞으로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었다. 가슴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벼워진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기억과 배움을 준 천안 병원에서의 마지막 날이 왔다. 이제 오후 회진만 돌면 각자 근무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지난밤까지 밀려드는 환자들과 수술로 떡을 친 2년차들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짐을 챙겼다.
“일석아, 삼 개월 후에 보자.”
“너도 잘 지내, 인마. 나도 서울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 구미에서 칼바람 좀 날리고 와라. 어이구! 지긋지긋한 놈하고 헤어지니까 날아갈 것 같네.”
손일석이 구미 치프에 관한 일은 싹 잊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또한 손일석일 것이다.
“현수야, 넌 전반기에는 아예 못 보네. 잘 지내라.”
아직도 짐을 챙기던 신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훈아, 구미에서 길 잘 닦아 놔라. 그래야 내가 광을 낼 수 있으니까.”
김지훈과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지훈이한테 농담한 거야? 야! 이 자식! 점점 사람이 되어 가네. 좋았어. 서울 생활이 암담했는데 그나마 왠지 즐거울 것 같다. 근데 왜 말속에 뼈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 지훈아, 너 좀 춥겠다.”
신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농담처럼 말한 것이 맞았다. 진지하게 얘기한다는 것이 자칫 공격적인 말로 들릴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라이벌인 김지훈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더 낼 광이 있을까? 내가 아주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넌 와서 그대로만 하셔.”
“어라? 이 자식은 한술 더 뜨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야. 현수야, 우리도 긴장 좀 해야겠다. 그렇지?”
신현수가 눈빛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일석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울 응급실은 3년차들이 맡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혁민 교수의 계획이었고, 금경태 과장도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러모로 고민이 깊었던 신현수에게는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과장님이 반대를 안 했다니 좀 놀랍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야. 마음 단단히 먹고 이준영 선생님께 제대로 죽어 보자.’
곧 치프가 된다는 사실에 기대보다는 도리어 긴장을 한 김지훈이 라이벌들의 강력한 의지를 읽지 못했다.
하긴 알았다고 해도 허구한 날 그랬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오후 회진까지 모두 끝났다.
송재덕 과장을 위시해 스태프들이 모두 스테이션에 모였다. 때가 되면 근무 지역을 옮기는 것이 당연한 전공의들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