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73화 (373/1,329)

제10화 빛과 어둠 (2)

고민만 해서는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짐짓 모른 척하며 진평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야 했다.

“회장님, 금경탭니다. 보내 주신 서류 잘 받았습니다.”

(도움이 됐나?)

“예.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서울 병원 원장에 내정되다니, 다 회장님과 이사장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는지 연락드렸습니다.”

(이사장 덕? 금 과장, 나 진평호야. 내가 자네를 잘못 본 거야, 아니면 자네가 지금 날 떠보는 거야? 자네 주제에? 허허!)

지금은 적당히 중간에 서 있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그러나 단숨에 의도를 파악당했다. 역시 진평호였다. 그렇다고 해도 주제를 알라는 말까지 들을 이유는 없었다. 지그시 어금니를 물던 금경태 과장이 애써 기분을 돌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서류를 봤으면 자네 처지가 어떻게 됐는지 잘 알았겠지? 내게 먼저 전화를 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입장을 정리했다는 소린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다니 생각을 잘못했다. 진평호는 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입장을 정리하지 못해 상대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약점만 만들 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잠시 숨을 고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진평호는 손에 피만 안 묻힐 뿐 누구보다도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었다. 저울질한다는 인상조차 주면 안 된다.

지금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반드시 신동석과 진평호 중 승자의 손을 잡아야 했다. 신동석에게 자신은 가장 중요한 패가 아니었다. 반면 진평호에게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진평호가 보내온 서류와 그간 신동석이 보인 행동들을 종합해 판단해야 했다.

금경태 과장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진평호는 채근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어떤 결론이 날지 예측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나직한 숨소리가 길게 울렸다.

“예. 확실하게 정리했습니다, 회장님.”

(금 과장, 난 날 배신하는 사람은 인간으로 안 봐. 그런 게 바로 짐승이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짐승입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면 절대 섭섭하지 않을 거야. 나 진평호, 신세는 꼭 갚는 사람이야. 평생 그렇게 살아왔어. 허허허!)

웃음소리가 섬뜩하기만 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아시다시피 전 일개 의사에 불과해서 말입니다.”

(당장은 별거 없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신동석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이 있으면 모조리 내게 알리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목소리가 더욱 낮고 차가워졌다. 순간 강한 위험을 느낀 금경태 과장이 본능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일개 의사에…….”

(금 과장, 내 말을 벌써 잊은 거야? 자네, 부원장 아니었나? 이사장과 수시로 전화 정도는 했잖아.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상 말이야. 설마 안부 전화를 그렇게 많이 했나?)

숨이 턱턱 막힐 소리였다. 최근 서울 병원에서 가장 신동석과 자주 통화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병원 내 개혁이라는 문제 때문에 대부분 남들의 이목을 피했었다.

신동석이 가장 믿고 아끼는 측근들에도 진평호의 손이 뻗쳐 있다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개혁안이나 병원 확장 건은 언제 통과가 되는 겁니까?”

(신동석이야 빨리 통과시키고 싶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시간은 내 편이거든. 이삼 개월 정도는 지나야 첫 삽이라도 뜨게 해 줄 생각이야. 개혁안도 조금은 미뤄 주지. 그래야 금 과장도 대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진평호의 목소리가 자신만만했다. 진철호만이 아니라 다른 이사들도 진평호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니 당연한 태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평호의 자신감을 설명할 수 없었다. 돈과 이사회에 대한 영향력 말고도 다른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의미였다.

금경태 과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어? 하여튼 내 기대하지. 그리고 조만간 진 이사하고 정 국장 불러서 함께 저녁이나 하자구. 얼굴 보면서 좋은 얘기도 하고 말이야. 아! 한 가지 더.)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이번 건은 이사들 말고는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런데 가끔 정보 좀 얻었다고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자네, 알박기가 뭔지 알지? 그거 잘못하면 도리어 독이 돼.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신동석이 병원 확장을 포기하면 안 되니까 말이야.)

전화를 끊은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진평호는 한 번 점찍은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늑대였다. 분명 성급했지만 내친걸음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무식하게 달려들 수는 없었다.

‘삼 개월이라. 그 전에 확실한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진평호가 숨기고 있는 건 또 뭐야? 그렇게 공을 들였건만, 병원 내 인맥은 하나도 쓸모가 없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멍은 없었다. 진평호라는 늑대가 열어 준 길 이외에는 온 사방이 모두 꽉 막혀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분노가 치밀었다.

일반 외과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개혁안을 작성한 사람은 한때 자신의 수족이라고 생각했던 이혁민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이준영,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이 오기 전에는 이혁민이나 송재덕은 내게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어. 일반 외과는 내 거였다고. 이렇게 된 이상 네놈들을 모두 제거해 주지. 지금은 마음껏 웃어라. 결국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금경태 과장이 사방으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진상철 교수와 구영선 교수, 그리고 임동완 교수를 비롯해 10여 통 가까이 통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송동화 과장에게까지 연락을 한 후에야 숨을 돌렸다.

자신의 인맥이 장악한 교수 협의회와 더불어 인간 본연의 질투와 시기는 누군가를 견제하는 데 매우 유력한 무기였다.

금경태 과장이 기대에 차 있을 이준영 과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코웃음을 쳤다.

‘음성에서 십 년을 썩었는데 그깟 응급실 근무 일 년 하고 정식으로 외과 근무를 할 수는 없지. 이준영, 넌 절대 안 돼. 응급 의학? 그건 송동화가 아니라 니가 해야 할 일이야. 평생 응급실에서 썩어.’

그간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 인맥이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은 아직까지는 자신이었다. 한 번에 빠질 힘도 아니었다.

‘신동석, 당신은 내 목을 잡고 있지만, 난 신현수의 목을 잡을 수 있어. 장래까지도 말이야. 신현수, 너도 당장 구미에 누가 먼저 갔는지 그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라이벌에게 밀리는 것처럼 비참한 것도 없지.’

대부분의 아비에게 자식은 못났든, 잘났든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입꼬리가 서서히 말렸다.

***

당뇨를 앓고 있는 80세 고령 환자의 라파로가 시작됐다.

어려운 케이스인 것은 분명했지만 환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이런 경우 개복을 한 후 고생하는 환자도 여럿 봤다.

‘환자 상태가 어제보다는 좋으니까 염증도 좀 가라앉았을까? 그래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데.’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배 속을 비추는 카메라를 통해 담낭을 확인하는 순간 김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심한 염증 반응으로 담낭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조직은 연약해 아주 쉽게 손상을 받고, 출혈도 잘 발생한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개복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쯧! 시작하자.”

백무용 교수의 손이 신중하기만 했다.

담낭을 떼어 낼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났다. 모두들 바짝 긴장을 한 채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보비(Bovie:전기 소작기).”

김지훈이 전기 소작기에 연결된 발판의 레버를 눌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한 기계음이 나직하게 울렸다. 소작기에 전기가 흐르며 조직을 태우기 시작했다. 간과 붙어 있는 담낭 벽을 지져 절개할 때마다 하얀 연기와 함께 끈적끈적한 염증성 삼출액이 흘러나왔다.

그 탓에 배 속을 비추는 카메라에 너무 쉽게 습기가 찼다. 백무용 교수의 손이 멈출 때마다 김지훈이 재빨리 카메라를 빼냈다. 뜨거운 물에 렌즈 부위를 담가 습기를 제거해 가며 수술 시야를 확보했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수술 팀의 눈은 오직 모니터 화면에만 집중되고 있었다.

“보비(Bovie:전기 소작기).”

삐이이이! 삐이이이!

나직한 기계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지훈은 전기 소작을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백무용 교수가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에만 집중했고, 느리지만 원활하게 수술이 진행됐다.

조금씩 담낭 벽이 절개되며 간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환자였다.

한 시간 만에 간에 붙어 있는 담낭 벽을 박리했다. 이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부위인 동맥 및 담낭과 담도를 연결하는 담낭관을 찾아 단단히 묶어야 할 때였다.

긴장이 치솟았다.

화면에는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1센티미터 남짓한 크기의 켈리로 담낭관 주변의 조직을 박리했다. 구불구불한 담낭관이 드러났다. 최대한 길게 노출을 시킨 후, ‘ㄷ’ 자 모양의 클립을 관에 끼웠다.

끼이익!

백무용 교수가 손잡이 쪽의 레버를 당겼다. 클립이 확실하게 조여지며 당낭관을 꽉 물었다.

“확실하게 잘 잡혔지?”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 담낭관 주변을 확인한 김지훈이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예, 선생님.”

그렇게 세 곳을 클립으로 잡았다. 1센티미터 남짓한 크기의 가위가 달린 기구로 클립 사이의 담낭관을 잘랐다. 잘린 관에서 검은색이어야 하는 담즙이 노란색을 띤 채 흘러나왔다. 고름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염증이 생각보다 심하네. 호석아, 이제 동맥 잡고 자를 거다. 정신 바짝 차리자.”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과도한 긴장을 살짝 푼 백무용 교수가 켈리를 이용해 동맥 주변을 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위험한 과정이었다. 염증이 심한 탓에 약해진 동맥이 손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혹은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 작고 가는 동맥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만일 어느 정도 이상의 출혈이 발생한다면 개복을 해야 한다. 배를 열고 직접 볼 때는 아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출혈도 라파로에서는 지혈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카메라를 통해 수술 부위를 보기 때문에 아무래도 수술 시야가 제한되고, 기구 조작의 한계도 많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숨을 바짝 죽였다. 화면 속에 보이는 켈리가 움직일 때마다 조직을 박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서히 동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면에 보이는 부분을 거의 다 노출시켰다.

백무용 교수의 긴장이 치솟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어떤 각도로 돌려도 동맥 뒷부분을 온전하게 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반쯤 눈을 감고 수술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백무용 교수가 극도로 신중하게 동맥 밑 부분에 켈리를 밀어 넣었다.

단 한 번 벌렸을 뿐이었다. 그 순간 뻘건 피가 팍 튀었다. 모니터 화면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석션 빨리 주고, 켈리 하나 더 준비해.”

심한 염증 탓에 숨어 있던 가는 동맥이 맥없이 잘린 것이다. 줄줄 흘러나오는 피를 석션으로 제거한 백무용 교수가 필사적으로 출혈을 잡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잘린 동맥을 찾을 수 없다. 전기 소작기도 사용할 수 없다. 동맥을 잘못 지지면 새로운 손상을 만들어 출혈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주변 조직을 넓게 잡아, 그 안에 동맥이 물려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백무용 교수가 숨 가쁘게 손을 놀렸다.

“석션, 켈리.”

동맥이 잡히질 않았다. 흘러나온 피가 주변 조직을 점점 더 넓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직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5분이 넘도록 지혈을 시도하던 백무용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개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에겐 가장 나쁜 결과라는 점이었다.

백무용 교수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제길! 개복해야겠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분명 저기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을 잡아도 왜 동맥이 안 잡히지?’

김지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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