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빛과 어둠 (1)
금경태 과장이 건재한데 신현수가 밀리다니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누구에게도 처지지 않는 신현수였기에 당연히 구미 첫 텀일 줄 알았다. 김지훈과는 우열을 확연하게 가리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신현수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김지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정말 밀린 거야? 교수님들이 보기에 지훈이의 능력이 정말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까? 혹시 내가 논문을 거부한 것 때문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 신현수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도, 집안 배경이나 금경태 과장까지 누구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엇비슷한 실력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로 가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였다.
야심이 많은 금경태 과장의 경고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이유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서울 병원의 외래 분위기를 보면 교수들의 객관적인 판단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김지훈과의 차이가 유리한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벌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답답한 가슴을 주체하기 힘든지 신현수의 숨이 다소 거칠어졌다. 자존심이 모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눈빛을 굳힌 채 주먹만 꽉 쥘 뿐 일어나지 못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런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가장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냉정해지자. 지금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야. 이런 결과가 왜 나왔는지 이유를 확실하게 파악해야 해. 내가 정말 모자란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손일석이 가장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심 이렇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실망감을 어쩔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처음에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손일석을 보는 순간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은 것이다.
‘에이 씨! 찝찝하게 이런 제도는 누가 만들었을까? 그나저나 일석이도 문제지만, 현수 저 자식도 얼굴이 안 좋네. 첫 텀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희비가 엇갈렸지만 친구이자 동기들이었다. 눈앞의 손일석은 의기소침, 그 자체였다. 위로한답시고 나서다간 도리어 자존심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손일석의 등을 툭 쳤다.
“일석아,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 신경 쓰지 마. 그냥 근무지일 뿐이야. 거기서 개판 치면 차라리 안 가는 게 낫잖아.”
“그래서 너 개판 치려고?”
“아니. 이 악물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놈이 손일석과 신현수라는 걸 잘 아는데 내가 미쳤어? 그리고 이제 반 왔어. 온 만큼 더 가야 하는데 내가 방심할 것 같아? 최선을 다할 거야. 난 마지막에 웃는 놈이 되고 싶거든. 가자. 따뜻한 거? 아니면 찬 거?”
손일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니가 방심할 놈이 아니지. 답답한데 냉커피나 먹자.”
어깨동무를 하며 의국을 나가던 김지훈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신현수가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억지로 첫 텀의 의미를 폄하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최고였다.
“현수야, 넌 뭐 해? 인마, 빨리 와. 왜 죽을상을 하고 앉았어. 너 구미 가기 싫어?”
잠시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천천히 일어났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진심이 있었다. 온 만큼 더 가야 한다는 사실과 마지막에 웃고 싶다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혀 들었다.
‘그래. 우리의 승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구미도 전반기 근무가 모두 끝나야 알 수 있는 일이야. 일단 서울에서 과장님 파트를 어떻게 돌지부터 생각하자.’
가는 놈이나, 못 가는 놈이나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김지훈도 때 이른 서울 근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구미에 이어 금경태 과장 파트를 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간담도를 배워야 하긴 하지만, 홍재순 선생님 일까지 안 마당에 정말 깝깝하네. 그 뻔뻔한 얼굴을 어떻게 보지?’
2년차 3명이 냉커피로 답답한 속을 식혔다.
하지만 잠시 머리를 맞댈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병동으로, 수술실로,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응급실로 달려간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80세 남자 환자가 담석으로 인한 급성 담낭염으로 내원했다. 고령에 당뇨까지 있어 상당히 쇠약한 상태였다. 예전 같았으면 패혈증이 오기 전에 바로 개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라파로가 있다.
문제는 어느 쪽이 환자에게 가장 안전하고 유리한지였다. 바로 개복을 하면 원인은 빨리 제거할 수 있지만, 당뇨와 고령으로 인해 숱한 합병증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수술 후 사망할 가능성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라파로를 한다면 당장은 문제지만, 수술 후 경과는 상당히 좋을 가능성이 높았다. 관건은 항생제로 급성 염증을 가라앉히고, 전신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지였다.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하고 필요한 검사를 냈다.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환자 및 보호자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사이사이 환자의 바이탈이 어떤지 확인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개인 병원에서는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수술 이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당뇨에 연세까지 많으셔서 검사 결과부터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수술을 언제 하든 코 줄과 소변 줄은 지금 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무척이나 걱정되는지 보호자인 아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얼핏 들었는데, 복강경인가 뭔가로 하면 아버님 같은 환자들도 안전하게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여기서도 그렇게 수술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아버님 상태나 검사 결과에 따라서는 복강경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걱정만큼 궁금한 것이 많은지 보호자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김지훈이 전적으로 백무용 교수가 결정할 사안인 어떤 수술을 할지만 빼고 모두 대답을 했다.
질병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사람이었다. 보호자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잠시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때마침 수술을 모두 끝낸 백무용 교수와 홍재순이 함께 응급실로 내려왔다. 환자를 진찰한 백무용 교수가 턱을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역시 라파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순아, 바로 열어야 할까?”
“글쎄요. 애매모호하네요. 지훈아, 니 생각은 어때?”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예상보다 염증이 심했고, 당뇨도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 환자였다. 응급으로 시행한 초음파 소견상 담낭 벽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라파로를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마취 시간만 길어질 상황이었다. 더구나 라파로는 수술실 여건과 간호사 문제 및 기계 장비들 때문에 밤에는 시행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이 밤은 지나가야 가능했다.
‘후우! 어느 쪽이 환자에게 유리할까? 일단 라파로로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금경태 과장은 분명 이보다 심한 환자의 담낭도 라파로로 떼어 냈다. 백무용 교수의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필요했다.
“선생님, 잠깐 환자 바이탈 좀 다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바이탈을 비롯해 환자의 의식 상태, 그리고 체온까지 모두 다시 점검했다. 항생제를 쓰기 시작한 덕인지 고열이 미열로 바뀌어 있었다. 환자의 의식도 또렷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후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환자 상태가 내원했을 때보다는 좋습니다. 일단 항생제 강하게 쓰고, 당 조절 철저히 한 후 내일 수술실이 비는 대로 라파로를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게 환자한테 가장 유리할 것 같습니다.”
“음! 라파로로 하자! 염증이 너무 심하지 않아?”
김지훈은 물론 홍재순도 입을 꽉 다물었다. 누구보다도 라파로를 가장 열심히 준비한 사람은 백무용 교수였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라파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당히 어려운 케이스가 왔다. 성공한다면 환자에게는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반면 실패한다면 공연히 시간만 끈 꼴이 되고, 도리어 환자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한참 만에야 백무용 교수가 입을 열었다.
“지훈아, 내일 응급 스케줄 내고 방 나오는 대로 바로 하자. 환자 상태 나빠지지 않게 잘 봐.”
결정이 났다. 어깨가 무거워진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막 퇴근을 하던 송재덕 과장이 여느 때처럼 습관적으로 응급실을 들렀다.
“지훈아, 환자 있어? 뭐니? 백 교수, 뭐야?”
김지훈이 간략하게 노티를 하자 송재덕 과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백무용 교수를 보았다. 한눈에 다소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간파했다.
“야! 백 교수, 라파로 시작하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이런 환자는 솔직히 개복보다는 라파로를 해야지. 암! 라파로지. 지훈아, 환자 잘 보고 퍼스트 잘 서라. 내가 발등 밟아 줄까?”
역시 송재덕 과장이었다. 단 몇 마디로 긴장을 풀어 주고 웃음까지 불러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은근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홍재순의 얼굴만 발개졌다.
그날 밤, 김지훈이 수시로 병실을 찾았다. 환자의 바이탈과 체온을 직접 재고, 혈당을 체크했다. 금식 상태였지만 혈당이 높았다. 염증을 악화시킬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 수치에 따라 적정한 용량의 인슐린을 4시간마다 투여했다.
“다행히 열이 잡히고, 소변도 잘 나오시네요. 혈당만 확실하게 조절되면 복강경으로 충분히 수술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버님, 긴장하지 마시고 주무셔야 합니다.”
하룻밤 만에 환자의 상태가 획기적으로 좋아질 수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해 가능한 최고의 상태로 올려야 했다. 라파로라는 수술법 역시 환자의 예후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데.’
김지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양손에 들린 라파로 수술 기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습관이 아니라 손이 놀고 있는 것 자체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 환자 상태가 생각보다 양호했다.
김지훈이 라파로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 시간, 금경태 과장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고 있었다. 진평호가 은밀하게 전해 준 몇 장의 서류에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준영을 정식으로 발령 내고, 송재덕을 서울로 올려? 게다가 송동화에게는 응급 의학과를 신설해서 맡긴다고? 그래, 다 좋아. 그러면 내게도 그만한 대가를 줘야 할 거 아니야? 과장 자리를 내놓은 대신 서울 병원 원장을 하라고 하면 내가 좋아서 절이라도 할 줄 안 모양이군. 신동석, 계속해서 날 이용할 생각인 모양인데, 당신이 내게 이럴 수는 없어.”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서울 병원 원장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왔다. 그런데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분노를 하고 있었다. 병원 조직의 새로운 개편 때문이었다.
중앙 의료원!
기존의 이사회와 더불어 서울, 천안, 구미, 음성 병원을 아우르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가 신설되는 것이다. 임원들이 모두 의사들로 구성돼 주로 진료에 관한 부분을 책임지겠지만, 이사회와 동급인 이상 막강한 권한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서울 병원 원장도 중앙 의료원에서는 원장과 부원장에 이어 서열 3위에 불과했다. 그것도 천안 병원 원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더구나 구미와 음성 병원 원장들도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언권이 강할 리가 없었다. 의사 중에 최고의 힘을 가졌던 자리가 한낱 허울뿐인 자리로 변한 것이다.
“날 바지저고리로 만들겠다, 이건가?”
시뻘게진 얼굴로 흥분을 금치 못하던 금경태 과장이 숨을 몰아쉬었다.
난관은 항상 있어 왔다. 그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 내 이 자리까지 왔다. 지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진평호!’
이사회에서 극비로 다루어진 내용을 은밀하게 전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만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만일 신동석이 등을 돌렸다면 진평호와 공동의 적을 가진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병원 내의 힘은 당연히 신동석이 우세하지만, 진평호가 나섰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 약점이나 빈틈을 찾았단 말이겠지? 그게 뭔지 알아야 신동석과 진평호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뭘까?’
문득 신장 수술을 받지 못해 분노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병원을 접수할 방법을 찾은 거야. 진평호가 가진 것이 뭐지? 돈, 정한득. 그리고?’
금경태 과장이 급히 서류를 펼쳤다. 병원 확장과 모자보건센터 리모델링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다 돈이었다. 예상 규모를 보니 신동석이라고 해도 결코 쉽게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 건물 주인들이 부르는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 것이다.
한동안 깊은 고민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이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