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71화 (371/1,329)

제9화 폭풍의 전조(?) (2)

첫 번째 라파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백무용 교수와 김지훈이 나직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시간이 없다던 홍재순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술실에서 함께했다. 간간이 손일석과 신현수까지 들어와 수술을 지켜보았다.

무려 2시간 반 만에 수술이 끝났다. 시간상으로는 차라리 개복을 하는 것이 빨랐고, 금경태 과장과는 비교하기 힘든 속도였다. 순전히 경험의 차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로가 주는 이점은 이런 문제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수술 후 첫째 날 바로 코 줄을 뺐다.

수술 후 둘째 날 물과 미음을 시작했다.

수술 후 사흘 째 되는 날 죽을 먹기 시작했고, 다음 날 퇴원해도 좋다는 오더가 떨어졌다.

회복 속도는 물론 수술 후 통증까지 개복했을 때와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수술 시간은 점점 짧아질 테고, 지금은 라파로로 하기 어려운 환자들에게도 점점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환자들이 속속 밀려오기 시작했다. 불과 2주 만에 한 주의 예약 환자만 6명이 넘었다. 마치 라파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어쩌면 의술의 발전에 대한 열망은 의사보다 환자들에게 더욱 강했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스케줄을 잡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일이었다.

그런데 천안 근무의 끝이 다가올수록 2년차들이 묘한 긴장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지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름 아닌 구미 때문이었다. 구미에는 4년차가 파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3년차가 치프였고, 전반기에 가게 되면 치프 생활을 3개월 더 하게 된다. 문제는 이때만큼은 아무나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치프로서의 자질을 평가하고, 더욱 많은 경험을 쌓게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기에 그동안 전반기에는 가장 뛰어난 전공의 둘을 파견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둘 중 한 명이 4년차 때 총치프를 했다.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 조건을 충족해야 병원에 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간을 떠나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년차 스케줄이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안 나오지? 그나저나 구미를 안 가도 문제고, 가도 문제네.’

다음 수술 환자 차트를 검토하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예전 같았으면 구미에 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일에 전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경아가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넓어도 9개월간의 연속 지방 근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고경아에게 미리 언급을 하는 편이 백번 유리했다.

전화기 앞에 선 김지훈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고경아와 즐거운 대화를 이끌어 가다 적당한 때를 보아 구미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일순 전화기가 조용해졌다. 나직하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한참 만에야 고경아가 입을 열었다.

(지훈 씨,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구미 전반기에는 제일 뛰어난 3년차 선생님들을 보낸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에요?)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그렇게 알고는 있는데 확실한지는…….”

(그럼 꼭 가세요. 아셨죠?)

꼭 가라니,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다.

(나 지훈 씨 앞길을 막을 정도로 옹졸한 여자 아니에요. 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 대신 오프 때는 꼭 서울 올라와야 돼요.)

“경아 씨, 고마워요. 그런데 사실 구미 못 갈 수도 있어요. 현수나 일석이나 워낙 열심히 하거든요.”

(지훈 씨, 그런 말 마세요. 이젠 지훈 씨 꿈이 제 꿈이기도 해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도 사랑하고요.)

김지훈이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막힐 뿐이었다.

“고마워요, 경아 씨.”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래요. 구미에 꼭 가시고, 항상 건강 잘 챙겨야 돼요. 그리고 한눈팔면 알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말아요. 확 죽여 버릴 거야.)

헉! 분위기가 돌변했다.

한참 동안 고경아의 수다를 경건한 자세로 경청하고 통화를 끝냈다.

병동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어째 마지막은 협박과 잔소리로 끝난 것 같았다.

잔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나?

그래도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드시 넘어야 할 통과의례가 남아 있었다.

‘늦어도 오월이나 유월에는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6남 3녀 중의 장남인 고경아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하시냐는 물음에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던 고경아의 모습이 이상하게 찜찜했다.

그날 밤, 손일석이 애써 구미 문제를 잊고 열심히 논문 준비를 하던 김지훈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송재덕 과장일지도 몰랐다.

“우워워워! 지훈아, 나 수술 뭐 했는지 물어봐. 빨리.”

지나친 흥분이었다.

“뭘 했는데 얼굴이 다 시뻘게졌어. 너도 위절제술 했어?”

“비슷하다. 이 형님이 드디어 비장을 뗐다. 하! 하! 하!”

김지훈이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송재덕 과장의 수술을 안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만 쏙 빠진 것이다.

“축하한다, 일석아. 으으으! 난 뭐니?”

“넌 퍼스트지. 라파로 퍼스트. 으하하하!”

손일석의 웃음소리가 지금처럼 가증스러운 적은 없었다. 곧이어 들어온 신현수가 축하한다며 손일석과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자식! 힘내, 인마. 설마 우리만 받겠어?”

어깨를 두드리는 손일석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건 위로하는 놈의 태도가 아니라 자랑이었다.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만날 나쁜 놈이라고 하시면서 왜 니들만 주시냐? 이건 배신이야, 배신. 분하다. 손일석, 신현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 에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농담처럼 말은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송재덕 과장의 성격상 차례차례 수술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하는 놈에게만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다.

‘나도 기필코 확실한 수술 하나 하고 간다.’

김지훈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렇게 되면 누가 구미로 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친구라고 해서 양보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달력을 보며 따져 보니 송재덕 과장과는 앞으로 수술 당직이 겹치질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죽으나 사나 환자와 라파로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백무용 교수의 손이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김지훈도 몸에 익은 것처럼 익숙하게 퍼스트를 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하루 세 건의 라파로가 시행됐다.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에 끝났다. 시간을 상당히 단축한 것이다.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집도의와 퍼스트의 노력과 경험이 쌓인 덕분이었다.

점심도 못 먹었지만 백무용 교수에게는 남은 수술이 있었다. 홍재순과 교대를 하고 병동으로 올라온 김지훈이 피로에 젖은 눈가를 비볐다.

‘아후! 배고파. 여섯 시는 돼야 수술이 다 끝날 텐데, 오늘도 제때 저녁 먹기는 글렀네.’

수술이 많아지면 교수는 물론 전공의들까지 모두 고달파진다. 밀린 병동 일을 재빨리 하고 의국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종이 가방 하나를 꺼냈다.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퍼졌다.

수술 방 수간호사에게 사정을 해 간신히 얻은 라파로 수술 기구들이었다. 이미 일주일 넘게 연습을 했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평균 3~40센티미터 정도에 달하는 기구들의 길이 때문이었다.

손에 딱 맞은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것은 5살 먹은 애도 할 수 있다. 반면 30센티미터 정도의 막대 끝에 연결된 조그만 가위로 자르라고 하면 어른도 힘들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더구나 안전하고 정교하게 다루어야 할 사람 몸이다.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 가며 한참 동안 낑낑대며 기구를 조작해 보던 김지훈이 이마에 맺힌 땀을 씻었다. 기구 끝에 달린 조그만 가위가 참 멀게도 보였다.

‘이거 보는 것 하고는 상당히 감이 다르네. 야! 그런데 불과 2주 만에 익숙해지신 거야? 백무용 선생님의 손도 대단하시네. 하긴 그러니까 병원에 남으셨겠지.’

역시 고수들은 달랐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책상을 두드리며 달력을 보았다. 어느새 근무지 교대가 한 주밖에 안 남았다. 지금쯤이면 다음 근무지와 파트가 결정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상하네. 왜 아직도 연락이 없지? 찝찝하네. 이거 본의 아니게 서울로 올라가는 거 아냐? 에이 씨! 내가 저 자식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며 잠깐 멍한 상태에 빠졌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손일석이 요란하게 문을 열며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 것이다.

“이 자식은 미친놈처럼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려? 지훈아, 지금 멍 때릴 때가 아니야! 인마! 다음 텀 스케줄 나왔단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그래? 우리 어디로 가는지 확인했어?”

“아직 못했다. 과장님 파트 치프 선생님한테 전했다는데 아까부터 안 보이시네. 그나저나 구미에는 누가 갈까?”

김지훈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4년차 선생님들 없이 치프를 할 기회긴 한데 우린 일곱 명이고, 자리는 딱 두 개니까 운이 좋아야겠지?”

손일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눈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후반기 되면 어차피 다 치프지만, 3년차 전반기에 치프를 할 병원은 구미밖에 없잖아. 그래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제일 뛰어난 사람을 보낸 것쯤은 알고 있지?”

김지훈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보면 참 음흉한 놈이야. 너도 솔직히 구미 텀에 걸렸으면 좋겠지? 어이구! 선택받은 두 명이 도대체 누굴까? 하긴 답이 딱 나오네. 누군 좋겠다.”

“에이! 그걸 누가 알아? 경석이 형이나 너나 정말 만만한 사람이 아니잖아. 난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 반,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 반이다.”

“반반? 이건 또 무슨 망발이야? 지훈아, 치프를 삼 개월 더 하는 거야. 그리고 구미에서 전반기 치프를 하면 4년차 때 총치프가 될 가능성이 무지하게 높아지잖아. 병원에 남으려면 넌 꼭 총치프 해야 한다. 근데 난데없이 반반은 왜 나와?”

다른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고경아가 이해한다지만 벌써 6개월이나 지방을 돌았다. 여기에 구미까지 3개월을 더 돈다면 미안해서 얼굴도 못 볼 것이다. 꿈을 떠나서 벼룩도 낯짝이 있는 법이다.

‘너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라. 심하게 갈등할 거다. 그리고 다들 갈 자격과 능력이 있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구미에 가고 싶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손일석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난 군대 가야 하는 몸이다. 육방에, 면제에, 신의 아들들하고 싸우려니 정말 힘들다. 제대하고 나면 그때 자리가 있으려나 몰라. 신기동 선생님께 비벼 볼까?”

“일석아, 아직 이 년이나 남았는데 군대 갈 걱정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아? 그리고 혈관 파트가 보통 실력으로 돼? 니 마음만 안 바뀌면 백 프로 남는다.”

“그런가? 내가 실력이 좀 되긴 하지.”

손일석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데 누가 첫 번째 텀으로 가게 될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 가는 게 중요한 거 아냐?”

“아이! 자식이 진짜! 넌 병원에 남는다는 놈이 도대체 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거야? 첫 번째가 중요한 거야, 첫 번째가. 가장 먼저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누구한테 맡기겠어? 어차피 다 치프라서 보내는 게 아니잖아. 하긴 모르는 게 속 편했을 수도 있겠다. 금경태 과장님이 누굴 가장 먼저 보내겠어?”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솔직히 이런 일만큼은 공정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간 뼈저리게 느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 송재덕 과장 파트 치프와 신현수가 함께 들어왔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치프가 조용히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2년차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신현수는 물론 손일석까지 능력은 충분했다. 더구나 한 놈은 위절제술을 했고, 다른 한 놈은 비장 절제술을 했다. 1년차 때 멋도 모르고 한 수술은 의미가 없었다.

과연 누가 구미에 전반기 치프로 가게 될까?

그중 첫 번째 텀은 또 누굴까?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순간 김지훈의 머릿속에 3명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이름이 없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그런데 막상 치프의 손에 들린 스케줄 표를 보는 순간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2년간 어떻게 일을 했고, 어떤 능력을 쌓아 왔는지 평가를 받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 왔고, 후회는 없었다. 솔직히 인정받고 싶었다.

‘후우! 첫 텀은 일석이 말대로 당연히 현수겠지? 그래. 현수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놈이야. 엉뚱한 핑계 대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아버지가 이사장이고, 금경태 과장의 총애까지 받는 신현수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일반 외과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신현수도 이젠 확연하게 변했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런 문제를 들먹이며 위안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생각이 드러날 테고, 결국 신현수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될 것이다.

그건 김지훈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스케줄 표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김지훈 - 구미 3. 4. 5. 서울 6. 7. 8

신현수 - 서울 3. 4. 5. 구미 6. 7. 8

김지훈이 입술을 모으며 눈만 껌벅거렸다.

정말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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