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70화 (370/1,329)

제9화 폭풍의 전조(?) (1)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변해 온 신현수가 마침내 눈에 보일 정도로 달라진 것이다.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야! 현수야, 니가 이런 말을 하니까 놀랍기도 하지만 기분이 정말 좋다. 그렇다고 내가 방심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너 곧 성질나서 죽고 싶어질 거다. 나는 라파로 받고 만다.”

“어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위절제술에 충격을 받은 놈이 우리가 아니라 이 자식이었네. 신현수,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갈 때가 됐다는 소리도 못 들었어? 오래 살고 싶으면 정신 차려, 인마. 아니면 표정하고 목소리도 좀 바꾸든지. 내용은 좋은데 형식이 아주 안 좋아요. 그런 말은 얼굴 풀고 ‘우리 모두 함께 가야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말을 해야지.”

순간 신현수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김지훈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서로의 사이를 막고 있던 벽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맙다, 현수야. 솔직히 잠깐 자만했었는데, 니 덕분에 정신 바짝 차렸어. 너 아니었으면 어디선가 분명히 실수했을 거야.”

“그래. 고마운 건 사실이다. 에휴! 어떻게 이 자식들하고 있으면 풀어질 틈이 없어. 조금만 방심하면 그냥 냅다 목을 조여 와요. 자유분방한 영혼인 나 손일석이 이렇게 힘들게 살 줄 누가 알았겠어.”

때마침 1년차들이 속속 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들어왔다. 왁자지껄했던 의국이 조용해졌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2년차들 모두 각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최고의 라이벌들이 눈앞에 있었다. 훗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지금은 최선을 다해 달려야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항상 해 왔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라파로에서 퍼스트를 서고, 신현수가 위절제술을 했다는 것이 또 다른 생각을 유발하고 있었다. 손일석까지 모두 다 치프들을 넘볼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우리 모두 열심히 달려간다면 언젠가는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수 있어.’

김지훈에게서 시작된 생각이 어느 틈엔가 손일석과 신현수의 머릿속에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분명한 경쟁자였지만 결코 시기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새로운 목표를 가져왔다. 만약 그런 팀을 만들 수 있다면 누군가는 리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실력 하나만으로는 리더가 될 수 없다. 팀원 전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질적으로 다른 경쟁을 불러오고 있었다.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같은 생각에 빠졌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휴! 지금은 써전으로서의 기본을 쌓을 때잖아. 실력도 없으면서 누가 리더가 될지는 왜 생각하는 거야? 차근차근, 하나하나 이루어 가자.’

지금은 내일을 위해 잘 시간이었다.

외롭게 돌아가던 수술 테이프가 멈췄다. 체력적인 한계에 몰린 이상 선택과 집중이 확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깜빡깜빡 잠에 빠져들던 김지훈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걸렸다. 마치 꿈결처럼 큰 스승인 허경발 명예 교수의 집에서 보았던 사진이 떠오른 것이다.

이준영 과장, 송재덕 과장,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모두들 동시대를 살아온 큰 스승님의 제자였다.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제 새로운 세대가 불같은 열정과 노력으로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역시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큰 인연이었다.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버거울 정도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 보니 한 명이 빠졌다. 그래서 송재덕 과장이 그렇게 대장을 부르짖는지도 몰랐다. 불현듯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확 둘 다 해 버려?’

그 어느 년차보다 쟁쟁한 2년차들이었다. 누가 됐든 송재덕 과장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년차 중에 한 명이 대장을 하면 좋겠다.”

완벽한 수술 팀을 꾸리려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어지럽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잠이 확 깰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하기에는 아직 너무 먼 일이었다.

그 시간, 홀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송재덕 과장이 허허 웃고 있었다. 수술실에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위궤양 천공 환자의 위를 잘라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신현수는 상당히 과감하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판단을 했다.

약간의 고민 끝에 신현수에게 위절제술을 주었다.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현수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 수술이 아닌 이상 단순 절제는 충분히 해낼 실력이었고, 신현수는 이를 훌륭하게 입증했다.

‘위장관에 관심을 보인다더니, 그쪽 공부를 더 한 걸까? 어쨌든 가뜩이나 뛰어난 놈이 열심히 해서 아주 다행이야. 이사장님 아들이라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수술 실력도 그만하면 충분하고.’

밤늦은 시간임에도 송재덕 과장이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이젠 적절한 격려와 자극을 통해 2년차들을 한 단계 도약시켜야 할 때였다. 그럴 능력들이 있기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 모두 서로 자극 좀 받았겠지? 그럼 일석이 이놈한테는 뭘 주지? 뭘 줘야 그놈들을 더 달리게 하나.”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송재덕 과장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이불 속을 파고들다 말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혁민이는 현수, 기동이는 일석이, 준영이는… 쩝! 그래. 그렇게 돌아가야 세상 일이 편하지. 어차피 대장을 할 놈도 아니고. 쩝! 그래도 아깝네. 아니지. 사람 일을 누가 알겠어? 한 놈보다는 두 놈이 더 낫잖아.’

피곤에 지친 송재덕 과장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시 후,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숱한 전공의들을 경험한 송재덕 과장도 한 가지 사실만은 생각하지 못했다. 2년차들에게 어려운 수술을 주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 주겠다는 결정이 어떤 여파를 끼쳤는지를 말이다. 최고의 써전과 함께 최고의 수술 팀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드디어 천안 병원에서의 첫 라파로 수술이 벌어지는 날이 밝았다.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나름의 수술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어젯밤 고경아가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내가 자랑스럽다니 정말 고마워요, 경아 씨. 3년차 스케줄이 아직 결정은 안 됐지만, 지방을 육 개월이나 돌았으니까 다음 텀에는 서울에 올라갈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그동안 못해 준 거 그때 다 해 줄게요.’

고경아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힘들고 지칠 때마다 전화를 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전화를 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위로해 주고, 때론 기뻐하는 고경아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없던 힘이 절로 생겼다.

일상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병원 근무 중에 힘들었던 일을 호소해 오면 이상하게 가슴이 뿌듯했다. 자주 못 본다고 투정을 부릴 때면 도리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를 약속했기에 모든 것이 더욱 뜨겁고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경아 씨에게 평생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경아 씨. 근데 구미가 또 걸리면 어떻게 하죠?’

3년차 초반의 구미 3년차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잠기 구미를 떠올리던 김지훈이 어깨를 흔들며 힘차게 회진을 돌고 수술 방으로 향했다.

항상 똑같은 모습의 수술 방이었지만 오늘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안호석과 함께 수술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라파로에 필요한 기구와 기계들을 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환자의 배 속에 아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라파로가 시작됐다. 카메라를 통한 시야 확보에 집중하면서 기계에 나타나는 각종 신호들을 주시했다.

안호석의 적절한 움직임까지 신경을 쓰며 퍼스트의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했다.

마음이 편해진 백무용 교수가 오직 담낭을 떼는 과정에만 몰두했다. 담낭 벽을 태우는 하얀 연기가 화면을 채울 때마다 조금씩 담낭이 간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안 병원의 첫 라파로가 진행됐다.

그 시간, 신동석 이사장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과 진상철의 힘을 빌려 진료 부분에 대한 외적 개혁을 어느 정도 완료했다. 이제는 본격적인 도약을 준비할 때였다.

‘금 과장을 적절히 제어하고, 새로운 인력을 보강하면 진료 부분 개혁은 끝이 나겠어. 이제 당면한 문제는 이사회의 승인과 자금 조달인데, 진평호 일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신동석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서울 최초로 모자보건센터를 세운 후 종합병원으로 키우고, 이를 기반으로 대학까지 설립한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넘고 싶었다.

교육 부분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시간에 명문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병원은 달랐다.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적이고도 효율적으로 투자한다면 굴지의 종합병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간 금경태 과장을 전면에 내세워 안일하고 뒤처진 의사들을 정리한 이유도 이를 위해서였다.

남은 일은 공격적 투자를 통한 확장이었다. 동시에 대대적인 인력 보강과 추가 개편을 할 것이다.

신동석의 시선이 모자보건센터로 향했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었기에 리모델링이 필요했다. 점점 줄어드는 산모의 수가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진료와 연구 및 행정 직원들을 위한 공간의 확장도 절실했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낡은 모자보건센터 세 동만으로는 기존의 환자와 병원 내 인력을 모두 수용하기 힘들었다.

관건은 땅과 돈이었다. 병원을 새로운 부지로 옮기지 않는 한, 대안은 병원 주변에 산재한 자그마한 가정집들과 소규모 건물들을 필요한 만큼 매입하는 것뿐이었다. 그에 소요되는 재원은 어마어마했다.

몇십억이 아니라 최소한 몇백억 이상이 필요한 일이었다. 만일 중간에 누군가 농간이라도 부린다면 최종적으로 얼마가 들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사들이 모두 동의하고 지분만큼 추가 출연을 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진평호가 쉽게 찬성할 리가 없지. 최악의 경우에는 나 혼자 대부분의 자금을 조달해야 할 수도 있다. 집안 재산을 모두 담보로 잡혀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이사들의 동의를 최대한 이끌어 내야 한다.’

신동석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진평호는 지금도 병원과 관련된 어떤 직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인 진철호 이사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문제는 돈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밝은 인물인 진평호가 병원과 대학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십억의 돈으로 수백억 자산가를 알거지로 만드는 것을 똑똑히 본 적이 있었다. 자칫하면 집안의 피땀이 서린 대학과 병원을 모두 잃을 수도 있었다.

발전과 안주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였다.

‘최고의 병원으로 만드는 일에 내 모든 것을 걸 가치가 있을까?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무엇이 남을까? 후우! 최악의 상황이 된다고 해도 먹고사는 일에는 지장이 없겠지. 현수도 제 밥벌이 정도는 충분히 할 테고 말이야. 그럼 연로하신 아버님을 뺀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준비해야 하지?’

병원을 키우고자 하는 일이 도박에 가까울 줄은 몰랐다. 금전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방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평호라는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이 또한 선대부터 해 온 일의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똑똑똑!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던 신동석 이사장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반 외과 최종 개혁안을 들고 온 이혁민 교수였다. 골치 아픈 일이 산적했지만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개혁안에는 자식인 신현수의 미래까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받아 든 신동석이 신중하게 검토했다. 간간이 나직한 신음 소리가 터졌다. 생각지도 못한 전면적인 개편이었다. 아직은 필요한 인물인 금경태 과장의 반발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님,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판단은 이사장님께서 내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병원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일반 외과도 확실한 도약이 필요합니다. 다만,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 일단 서울 병원부터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동석이 입술을 모은 채 보고서를 다시 검토했다. 역시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많았다.

“이미 거론한 문제지만, 이준영 교수를 정식으로 외과에 발령하면 금 과장하고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송재덕 과장님까지 서울로 올린다고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요?”

이혁민 교수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금경태 과장은 선배이자, 다 같이 허경발 명예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간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해야 했고, 누구나 결점이 있기에 참아 왔다. 하지만 김지훈과 이준영 과장으로 인해 탐욕과 시기심에 눈이 먼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았다.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부병원장까지 된 이상 일말의 배려와 관용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었다.

구미 병원의 송동화 과장과 연락을 하며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태프들도 모자라 전공의들까지 줄을 세우려 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경태 선배, 스승님은 언제나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까지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단으로 보다니요. 지훈이가 이준영 선생님과 각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현수가 이사장님 아들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이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반 외과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들이 필요합니다.”

“그럼 금경태 과장을 쫓아내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일반 외과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었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소한 과장으로서는 부적합합니다. 우리는 제자를 가르쳐야 하는 교수이자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입니다. 행정적인 면도 필요하겠지만, 본질을 잊었다면 더 이상 과를 이끌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석 이사장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낡은 모자보건센터가 보였다.

과연 신동석 이사장은 어떤 대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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