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69화 (369/1,329)

제8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2)

그때 손일석과 신현수가 들어왔다.

“넌 표정이 왜 그래?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어느 쪽이야?”

역시 손일석이었다. 표정만 보고도 김지훈의 상태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응. 그게 말이야. 고민스러운 일이 생겼어. 백무용 선생님하고 홍재순 선생님이 앞으로 라파로는 나보고 퍼스트를 서라고 하시네.”

“뭐? 쭈욱?”

“응. 쭈욱.”

손일석과 신현수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들이 아는 한 이런 일은 없었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어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분명 과장님의 허락이 있어야 했을 텐데, 이 자식을 얼마나 믿고 계신 거야? 제길!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야 한다는 소리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친구다. 그럴 능력도 충분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손일석이 눈가를 찢으며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뭐야, 김지훈? 이 자식 완전히 떴잖아? 아!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 홍재순 선생님 완전히 멀쩡하게 만들었지, 지독할 정도로 공부하고 일했지. 그래. 좋겠다, 이 자식아. 부럽다. 근데 왜 얼굴을 찌푸리고 지랄이야?”

“일석아, 좋은 일만은 아니잖아. 다른 치프 선생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손일석이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아이고! 별 걱정을 다 하세요. 천안은 걱정하질 마. 유석재 선생님이 계신다면 모를까, 다들 로칼 체질이야. 사실 어느 정도는 눈길 좀 사나워지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강철 멘탈은 뒀다 뭐할래? 이럴 때 써야지. 씨펄! 혈관 하고 싶다고 너무 빨리 떠벌렸나?”

신현수가 팔짱을 낀 채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치도 없이 물었다. 의외로 심난해 신현수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현수야, 일석이 말대로 정말 괜찮을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라파로 퍼스트는 다른 수술과 조금은 역할이 다르다고 해도 신현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김지훈은 이미 스테이플러 수술에서 사실상의 퍼스트 역할을 했다. 송재덕 과장이 그만큼 믿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백무용 교수는 아예 치프가 해야 할 일을 맡기고 있었다. 홍재순과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거의 절대적 신뢰였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지훈은 이미 한발 앞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후우! 도대체 이유가 뭐지? 도대체 내게 무엇이 부족한 거야? 열정도 있고, 노력도 했어. 인간관계? 지훈이만큼은 아니지만, 그 문제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콧등을 찡그리며 이마를 주무르던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좋아하기보다는 고민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먼저 좋아하고 기뻐했을 텐데, 왜 넌 고민부터 하는 거야? 선배들 눈치를 그렇게 봤었어?’

“김지훈, 너 지금 치프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걱정하는 거야?”

입술을 모은 채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심난하고 걱정이 되는지 이제야 이유를 안 것이다.

“그럼 당연하지, 인마. 수술 팀이라는 게 뭐야? 서로 믿고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최고의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 그런데 내가 중간에 툭 튀어나오면 감정이 나빠질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면 나도 문제지만, 수술 팀이 가진 최고의 실력을 보일 수가 있을까?”

“지금 환자 걱정 때문에 그러는 거야?”

“에이! 설마 그게 다겠니. 하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걱정이 되긴 해. 정규 수술은 몰라도 응급 수술은 쭉 다른 치프 선생님들하고 할 수밖에 없잖아. 손발 안 맞으면 환자한테도 문제가 될지도 몰라.”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야이 자식아, 단순하게 생각해. 온 동네 사람들 다 걱정하고 살래? 그리고 치프들이 기분 나쁘다고 설마 니 말을 다 무시하겠어? 수술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맞는 말이다. 애들 장난이 아니다. 지금까지 믿어 왔던 선배들이었다.

인상을 쓰던 김지훈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그렇지? 맞아. 나도 정말 걱정이 팔자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을 들어서 내가 당황했나 봐. 기본적으로 서로 믿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역시 일석이 넌 보물이야. 너 없었으면 나 어떻게 할 뻔했니.”

“그걸 이제 알았어? 이 자식이 요새 조금 잘나간다고 간덩이가 부었네. 똑바로 행동해라. 형 화나면 넌 바로 죽음이야. 아주 그냥 지금 죽여 버릴까 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신현수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손일석의 말대로 생각이 너무 많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눈앞에 어떤 이득이 있어도 덥석 잡지 않고 여러 면을 고려한다는 말이었다.

홍재순과의 일도 그런 신중함과 고민 끝에 나왔을 것이다. 최대한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결국 이번 일도 그런 일련의 일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결과였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저런 면은 배워야 해.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야. 이러다가 정말 뒤처지겠어.’

신현수가 난생처음 동기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김지훈에게 말이다.

손일석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현수나 나나 지금도 거의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잖아. 지훈이보다 내가 더 자는 것도 아니고 게으른 것도 아닌데,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자체 집담회가 생각이 났다. 모두들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자신은 물론 이론에 가장 강했던 신현수보다 김지훈의 발표가 점점 더 돋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재능과 열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지훈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넌 자체 집담회 준비를 어떻게 해? 시간이 없긴 우리 모두 마찬가진데, 솔직히 요샌 니 발표가 가장 알차 보이거든.”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의 말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라파로에서 퍼스트를 서는 일을 생각할 때 가볍게 농담식으로 받을 말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단지 인턴 때부터 배워 온 방식을 잊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집중과 선택? 나는 그렇게 준비하는 것 같은데.”

단 두 단어에 불과했다. 그런데 손일석과 신현수가 이마에 주름까지 만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든 그렇게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날 밤,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한발 훅 치고 나간 김지훈이 치열한 고민을 안겨 준 것이다.

***

천안에서의 첫 라파로 수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서울 병원에서 금경태 과장의 파트를 돌며 제법 많은 라파로 수술을 보았다. 발표를 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수술 방법도 더욱 확실히 눈에 박았다. 그리고 2년차로서는 생각도 못할 퍼스트를 서게 됐다.

자신을 믿고 퍼스트를 맡긴 송재덕 과장과 백무용 교수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치프들이 보내는 은근히 따가운 눈초리도 이겨 내야 했다. 겸손한 마음과 함께 확실한 실력이 필요한 때였다.

다시 한 번 모든 자료들을 검토하고 퍼스트의 역할을 숙지했다. 아울러 집도의 위치에 서서 수술을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그것이 보다 퍼스트를 확실하게 서는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 세부 전공을 간담도로 굳힌 이상 내겐 정말 귀중한 기회다. 얼마나 많은 수술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김지훈이 가운 주머니에서 수술 기구를 꺼냈다.

외과의는 일단 손으로 말한다.

따르륵! 따가각!

제법 익숙하게 왼손을 쓰고 있었다. 퍼스트가 양손을 쓸 일은 없지만 훗날을 위해서 지금까지 양손을 쓰는 연습을 해 왔듯,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따르륵! 따가각!

양손에 들린 수술 기구가 빙글빙글 돌며 자리를 바꿨다. 톱니가 물렸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수술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손을 놀리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꽤 편해졌네. 이 정도면 라파로를 할 수 있을까? 에이! 퍼스트도 감지덕진데 별생각을 다 하고 앉았다. 정신 차리자. 난 아직 2년차다. 하하! 그래도 현수나 일석이보다 빠르니까 기분이 생각보다 좋네. 이렇게 되면 내가 선두주잔가?’

그날 밤, 김지훈이 눈이 새빨개지도록 수술 테이프를 보았다. 평일 오프를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천안 병원의 환경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고마웠다.

자정이 훌쩍 넘어 새벽 2시 반쯤 됐을까?

머리가 떡이 된 신현수가 손일석과 함께 의국으로 들어왔다. 수술에 들어갔다 나온 모양이었다.

신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만족스러우면서도 자신감이 철철 넘쳐 보였다. 그런데 손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수술 있었구나? 일석아, 근데 넌 왜 그래?”

“지훈아, 내가 아무래도 실수를 했어. 혈관 한다고 왜 벌써 떠벌렸을까? 이놈의 주둥아리가 날 구렁텅이에 빠트린다. 에잇! 이놈의 주둥아리를 어떻게 하지? 확 꿰매 버릴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주둥이 타령이야.”

손일석이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신현수를 가리켰다.

“저 자식한테 직접 물어봐라. 아주 입이 찢어지는 거 안 보여? 나쁜 놈이라고 욕은 똑같이 하셨는데, 내가 더 나쁜 놈이었나 봐.”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너도 곧 받을 거야. 걱정 마.”

“나도 받는다고? 현수야, 위궤양에서 위 자르는 수술이 흔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냥 환자가 와? 받고 싶다고 생난리를 치면 과장님이 ‘그래. 알았다, 일석아.’ 하시면서 수술을 주시겠어? 다 때가 맞아야 하는 거야. 난 이미 글렀어. 안타깝지만 천안은 니들 두 놈에게 넘긴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현수야, 너 지금 위절제술을 했다는 거야? 정말이야?”

“김지훈, 너 지금 나 열 받은 거 안 보여? 뭐 들었어? 유문 성형술 정도에 이렇게까지 민감해질 내가 아니잖아. 에휴! 한 놈은 퍼스트에, 한 놈은 위절제술을 받아?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냐.”

신현수가 마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수술 기록지를 꺼냈다. 진단명과 수술명, 그리고 집도의 이름을 쓱쓱 써 내려갔다.

Diagnosis : Peritonitis due to ulcer perforation

(위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

Operation name : partial Gastrectomy

(부분 위절제술)

Operator : Resident 2. HeonSoo Shin

(집도의 : 전공의 2년차 신현수)

김지훈이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다른 수술도 아닌 위절제술이었다. 오직 집도의가 신현수라는 것만 보였다.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은근슬쩍 다가오던 자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두주자? 제길! 현수가 정말 선두주자였네. 안 돼. 지금 이럴 때가 아니네. 어후! 비상이다, 비상.’

슬슬 몰려오는 졸음에 풀어졌던 김지훈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급히 새로운 라파로 수술 테이프를 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훈아, 지겹지도 않아? 그걸 또 봐?”

“지겹긴.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되겠어.”

“너 현수 때문에 충격받은 것 같은데 그러다 죽어, 인마. 그리고 집중과 선택이라며.”

김지훈이 천장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고 보니 너무 티를 냈다. 게다가 신현수에게 해야 할 말도 잊었다. 반드시 이기고 싶은 최고의 라이벌이라고 해도 친구와 벌이는 선의의 경쟁일 뿐이었다.

“현수야, 축하한다. 부러워. 하지만 너 방심하면 순식간에 역전된다. 기다려. 난 일석이하고는 달라. 곧 쫓아간다.”

신현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일석이 발끈했다.

“뭐? 나랑 다르다고? 뭐가 다른데?”

“글렀다고 한 놈이 손일석 아니었나?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내가 요새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니들이 이 형을 조금 앞서가는데 어림도 없어. 위절제술? 난 대장암 수술을 받고야 만다.”

손일석이 불끈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함께 주먹을 흔들었다.

우워워어!

마치 2년차 두 놈의 결의에 찬 고함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두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던 신현수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김지훈이 라파로에서 퍼스트를 선다는 소리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자랑할 일이 아니라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유치하게 행동했어.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훈이는 최소한 우리 앞에서 좋다는 시늉은 안 했잖아. 한 팀을 만들어 이끌어 나가려면 모든 면에서 리더가 돼야 해.’

잠시 주저하던 신현수가 주먹을 쥐고는 아직도 결의를 다지고 있는 김지훈과 손일석의 주먹을 툭 쳤다.

“우리 파이팅하자. 너희들도 곧 받을 거야.”

깜짝 놀란 눈동자들이 신현수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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